- 고대교회
고대, 중세, 근대, 그리고 현대 기독교를 통해서 본 삼위일체론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신학사적 계기들
(1) 고대 교회: 고대 교회의 공의회를 통해서 결정된 “니케아 신조”(325)와 “콘스탄티노플 신조”(381)(이를 통상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라 부른다)야 말로 삼위일체론의 가장 큰 이정표일 것이다. 그리고 니케아 이전 시기의 희랍의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파편적인 기여도 중요하고, 이와 더불어 사도신경의 전신인 “로마 신경”, 져스틴, 이레네오스, 오리겐, 테르툴리아누스의 “신앙 규범”(regula fidei)등의 공헌도 중요하다. 그리고 사모사타의 바울과 사벨리오스와 아리오스와 같은 이단들의 도전 역시 삼위일체론 형성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아타나시오스와 니케아 시기 이후로는 카파도키아의 교부들과 아우구스티누스와 보에티우스의 공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바질 등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콘스탄티노플 신조 형성과정에 기여하였고, 그 후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과 뉴앙스를 달리하는 동방교회의 삼위일체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은 성령의 신성을 확보하였고, “휘포스타시스”(위격) 개념을 정리하여 삼위의 코니노니아를 강조하였으니, 훗날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니케아(325)가 “본질” 개념을 부각시켜 양태론적 경향을 보였다고 비판을 받은 것에 비하여 이들은 위격 개념에 기반을 둔 삼위의 공동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서방교회의 어거스틴의 공헌도 매우 크다 하겠다. 그는 동방교회의 “관계”개념을 삼위일체론에 수용하면서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가 신앙하고 있는 공의회의 삼위일체 전통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하지만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더 큰 공헌은 “삼위일체의 발자취”(vestigiae Trinitatis)일 것이다.
다음 섹션에서 논하겠거니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라고 하는 신앙의 지식추구 방법론에 따라서 주로 고전적인 인간론을 사용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들을 추적하였는데, 적극적으로는 이것이 중세 교회의 신앙전통(catholic Substance) 가운에 하나를 이루고, 소극적으로는 이것이 신론에 대한 지리멸렬한 스콜라주의 신학 혹은 철학적 신학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및 둔스 코스투스와 같은 스콜라주의 신학의 절정기 사이에는 보에티우스(Boethius: c. 480-c. 524)가 위치하고 있다. 그는 유티케스와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하고, 아리우스와 사벨리언주의와 마니교에 반대하여 정통 삼위일체론과 어거스틴주의를 따랐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여 중세 삼위일체론에 기여한 바가 없지 않다. 그는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에 대하여 4개의 철학적인 신학 저서를 내놓을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보에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사용하여 삼위일체론을 설명하였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의 본질 차원의 통일성을 강조한대 반하여 “위격”을 “합리적인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재”(an individual substance of rational nature)라고 보아, 삼위의 구별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구별이 삼위의 공동체성이 아니라 한 위격의 개체성을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폭스는 위격들의 코이노니아와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지지울라스의 삼위일체론을 소개하는 그의 저서(God as Communion)에서 이와 같은 보에티우스의 “합리적 본성을 지진 개별적인 실재”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들을 추적하는 맥락에서 나온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적 경험과 의식”이야 말로 모더니즘의 개인주의의 원천이 되었다고 본다.
(2) 중세교회와 종교개혁: 중세 시기에도 성경과 교회전통의 삼위일체론과 같은 보편교회의 주된 유산(catholic Substance)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중세 시기는 복음에 대한 집중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보다는 명제적 진리를 절대시하는 성서주의가 철학과 혼재되어 지리멸렬한 철학적 신학을 낳았으니, 이와 같은 교회의 지배이념으로 인하여, 복음이 질식되었고, 교회의 예배의 대상이요, 세례와 성만찬이라고 하는 삶의 자리에 관련된 삼위일체론보다는 신앙의 지식추구차원을 강조하여 배 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되는 신학의 역사를 보였다.
이와는 반대로 19세기 개신교의 하르낙은 기독교의 본질추구를 위해서 삼위일체론과 기독론과 같은 전통적인 신학을 제거하고 신약성경으로부터 헬라 화된 부분 등을 제거하여 소위 양파 까기 식의 “단순한 복음”을 주장함으로써, 로마가톨릭 스콜라주의 신학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중세 시기에는 주지주의에 입각한 철학적 지식의 덩어리가 초기 사도적인 복음과 공의회전통의 삼위일체론에 덧붙여짐에 따라서 교회가 활력을 잃었고, 역동성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중세 동안에 위 5세기 말과 6세기 초의 위(偉)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Pseudo-Areopagite)의 글들과 14세기의 팔라마스(1296-1359)의 신학은 그나마 어느 정도로 중세 신학의 숨통을 터주었다고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자는 스콜라주의 신학의 모든 하나님 지식을 “카타파탁 신학”(긍정의 신학)으로 돌리고, 인간의 언어와 개념과 경험을 초월하는 빛과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아포파틱” 본질을 추구했기 때문이요, 후자는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에너지들“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본질과 삼위 그 자체에 대한 “아포파틱 신학”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계시와 사역 차원의 모든 것들을 모두 “카타파틱 신학”이라고 하였으니, 역시 스콜라주의적 노력 저 너머에 있는 빛과 영광의 영원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송영할 것을 강조하였다.
더군다나 디오니시우스와 팔라마스는 모세의 하나님 경험, 예수님의 변화산상의 경험, 바울과 사도요한의 신비한 경험 등이 모두 위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경험이기 때문에, 인간의 철학적 신 인식으로는 여기에 접근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사상 패턴으로 보면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기 보다는 플라톤적이라고 보인다.
물론, 우리는 공의회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의 유산을 떠나서 중세의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을 생각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전제 하에서 알셀름과 아퀴나스, 그리고 둔스 스코투스와 보나벤투라와 같은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의 삼위일체론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서 그 누구보다도 플라톤 철학을 배경으로 하는 안셀름과 상당한 정도로(어느 정도로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받아들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사용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삼위일체야 말로 중세 삼위일체의 중요한 신학적 계기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열거된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자들 이외의 다른 신학자들에서 삼신론적 경향 혹은 양태론적 경향들이 발견되고, 중세 말로 오면 이성을 전적으로 계시로부터 독립시켜 버리는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도 등장한다.
안셀름은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의 “지식을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의 방법론을 따라서 플라톤 철학을 배경으로 “그 자보다 더 큰 자가 없는 그 자”라고 하는 철학적 신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 신은 인간의 정신 안에 존재함은 물론 인간의 정신 밖에도 존재하시는 신이다. 그와 같은 신은 자명하여 직관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는 존재론적 논증에 의한 신 존재증명으로서 교회의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앙을 이와 같이 철학적 지식으로 설명하였다. 이것이 소위 “지식을 추구하는 신앙”이다.
아퀴나스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라서 “지식을 추구하는 신앙”을 인정하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사용하여 밑으로부터 위로 상승하는 다섯 가지 방법에 따른 우주론적 신 존재 증명을 제시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회의 전통을 통해서 내려오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는 자명하시지만 인간에게는 자명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증명이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말하자면 결과에서 원인으로, 그러나 궁극적으로 최초의 “원인 지워지지 않은 원인”(Uncaused Cause)으로, 그리고 운동으로부터 그 이전 운동으로, 그러나 긍극적으로 “부동의 동작자”(the Unmoved Mover)로 소급하여 얻어지는 “지고의 선”(summum bonum)을 본질로 하는 하나님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즉, 그는 교회의 전통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주론적 신 존재증명을 통하여 설명하였는데, 그것은 그 당시 유대교와 이슬람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의 신에 대한 변증을 삶의 자리로 하고 있었다. 아퀴나스는 교회의 전통적인 하나님의 세 위격들은 철학적 노력에 의해서 도달 된 철학적 신 개념과 접촉점이 없는 것으로 보지만, 전통적 하나님의 본질은 철학적으로 도달된 신 개념과 접촉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참고: 손은실 박사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삼위일체론).
이처럼 자연신학적인 하나님의 본질과 성서적 하나님의 본질 사이의 접촉점을 인정하면서 성서의 삼위로 상승하는 신학적인 절차는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이형기, “동방정교회와 WARC사이의 신학적인 대화: 성삼위일체에 대한 일치된 진술”).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은 이와 같이 “이성”에게 자리와 역할을 여러 모양과 여러 정도로 내어 주었다. 그리고 중세 교회는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와 플로렌스 공의(1438-1445)회에서 삼위일체론을 교통 정리한 샘이다.
그리고 피오레의 요아킴(c. 1135-1202)과 그를 뒤잇는 프란시스칸 승단의 삼위일체론의 색깔이 안셀름과 특히 아퀴나스의 그것과 다르다고 하는 사실도 중요하다. 필자가 기고한 글(요아킴의 삼위일체론)에서 지적한 대로 그의 삼위일체론은 비록 정죄는 받았으나(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와 1265년 교황 알렌산더 4세에 의하여), 오랜 중세 시기 동안 미래 지향적인 종말론을 상실했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는 삼았으나, 삼위일체의 역사화 그리고 역사의 삼위일체 화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 로마가톨릭교회에게 그리고 직제 상 문제가 많았고 경건생활과 도덕에 있어서도 문제가 많았던 중세교회에게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요아킴과 그의 종말론적 삼위일체론을 따르는 프란시스칸 사람들은 그 당시 교회에 대하여 개혁적인 마인드를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중세 전통 속에도 미래 지향적인 종말론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은 복음을 재발견하였고, 중세 말과 중세의 구원론 등에 반론을 제기하는 맥락에서 중세를 통해서 매개된, 그러나 고대 교부들로 회귀하는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귀하게 여겼다. 따라서 루터나 칼뱅의 경우,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철학적 군더더기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고대 공의회의 결정이 당시에도 유효하다고 보았다. 루터는 니케아 신조의 삼위일체론과 시릴적인 경향의 정통 기독론을 받아 드리는 입장이었으나, 삼위일체론에 관하여는 성서적 증언을 강조하다보니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의 구별을 중요시하였고, 스콜라주의 신학에서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그 어떤 합리주의적인 추론과 설명을 하지 않았으며,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복잡한 사변을 감행하지도 않았다.
삼위일체론에 관하여는, 루터의 동역자 멜랑히톤 역시 루터의 주장과 대동소이하였다. 이들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름 전통을 따랐다. 멜랑히톤이 작성한 루터교의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싣고 있다.
츠빙글리와 칼뱅 역시 루터와 대동소이하였다. 칼뱅은 카롤리와 미카엘 세르베투스의 반삼위일체론에 반대하여 니케아 신조의 정통 삼위일체론을 내세웠고, 이를 성경구절들로 뒷받침하였다. 칼뱅은 루터처럼 삼위의 구별을 강조하였으니, 그의 최종판 '기독교 강요'는 사도신경의 삼위의 구조를 따라서 구조화되었다. 특히, 그는 삼위의 “위격”을 “개별적 실재”(subsistentia)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영국교회의 개혁자들 역시 루터와 칼뱅 등 주류 개혁자들의 삼위일체론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16세기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과 영국교회의 “39 신앙조항”은 전적으로 정통 삼위일체론을 믿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17세기 루터교 및 개혁교회의 정통주의 교의학은 의심의 여지없이 정통 삼위일체론을 따랐다. 그리고 19세기 로마가톨릭교회의 트렌트 공의회의 교리문서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과 걸맞게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초두에 싣고 있다.
대체로 16세기 좌경화 종교개혁자들은 반 삼위일체론자들이거나 정통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미카엘 세르베투스와 소키누스가 반 삼위일체론자들이었고, 후프마이어 등 취리히 재세례파 종교개혁자들은 문자적인 성서주의를 주장한 나머지,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성서적 증언에 따른 용어는 확보하면서도 니케아 신조의 정통 삼위일체론은 받아 드리지 않았다. 메노 시몬스 역시 그러하였고, 그를 따른 메노나이트 파 사람들과 기타 형제단 공동체 역시 그와 같은 노선을 따랐다.
(1) 고대 교회: 고대 교회의 공의회를 통해서 결정된 “니케아 신조”(325)와 “콘스탄티노플 신조”(381)(이를 통상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라 부른다)야 말로 삼위일체론의 가장 큰 이정표일 것이다. 그리고 니케아 이전 시기의 희랍의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파편적인 기여도 중요하고, 이와 더불어 사도신경의 전신인 “로마 신경”, 져스틴, 이레네오스, 오리겐, 테르툴리아누스의 “신앙 규범”(regula fidei)등의 공헌도 중요하다. 그리고 사모사타의 바울과 사벨리오스와 아리오스와 같은 이단들의 도전 역시 삼위일체론 형성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아타나시오스와 니케아 시기 이후로는 카파도키아의 교부들과 아우구스티누스와 보에티우스의 공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바질 등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콘스탄티노플 신조 형성과정에 기여하였고, 그 후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과 뉴앙스를 달리하는 동방교회의 삼위일체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은 성령의 신성을 확보하였고, “휘포스타시스”(위격) 개념을 정리하여 삼위의 코니노니아를 강조하였으니, 훗날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니케아(325)가 “본질” 개념을 부각시켜 양태론적 경향을 보였다고 비판을 받은 것에 비하여 이들은 위격 개념에 기반을 둔 삼위의 공동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서방교회의 어거스틴의 공헌도 매우 크다 하겠다. 그는 동방교회의 “관계”개념을 삼위일체론에 수용하면서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가 신앙하고 있는 공의회의 삼위일체 전통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하지만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더 큰 공헌은 “삼위일체의 발자취”(vestigiae Trinitatis)일 것이다.
다음 섹션에서 논하겠거니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라고 하는 신앙의 지식추구 방법론에 따라서 주로 고전적인 인간론을 사용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들을 추적하였는데, 적극적으로는 이것이 중세 교회의 신앙전통(catholic Substance) 가운에 하나를 이루고, 소극적으로는 이것이 신론에 대한 지리멸렬한 스콜라주의 신학 혹은 철학적 신학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및 둔스 코스투스와 같은 스콜라주의 신학의 절정기 사이에는 보에티우스(Boethius: c. 480-c. 524)가 위치하고 있다. 그는 유티케스와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하고, 아리우스와 사벨리언주의와 마니교에 반대하여 정통 삼위일체론과 어거스틴주의를 따랐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여 중세 삼위일체론에 기여한 바가 없지 않다. 그는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에 대하여 4개의 철학적인 신학 저서를 내놓을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보에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사용하여 삼위일체론을 설명하였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의 본질 차원의 통일성을 강조한대 반하여 “위격”을 “합리적인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재”(an individual substance of rational nature)라고 보아, 삼위의 구별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구별이 삼위의 공동체성이 아니라 한 위격의 개체성을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폭스는 위격들의 코이노니아와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지지울라스의 삼위일체론을 소개하는 그의 저서(God as Communion)에서 이와 같은 보에티우스의 “합리적 본성을 지진 개별적인 실재”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들을 추적하는 맥락에서 나온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적 경험과 의식”이야 말로 모더니즘의 개인주의의 원천이 되었다고 본다.
(2) 중세교회와 종교개혁: 중세 시기에도 성경과 교회전통의 삼위일체론과 같은 보편교회의 주된 유산(catholic Substance)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중세 시기는 복음에 대한 집중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보다는 명제적 진리를 절대시하는 성서주의가 철학과 혼재되어 지리멸렬한 철학적 신학을 낳았으니, 이와 같은 교회의 지배이념으로 인하여, 복음이 질식되었고, 교회의 예배의 대상이요, 세례와 성만찬이라고 하는 삶의 자리에 관련된 삼위일체론보다는 신앙의 지식추구차원을 강조하여 배 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되는 신학의 역사를 보였다.
이와는 반대로 19세기 개신교의 하르낙은 기독교의 본질추구를 위해서 삼위일체론과 기독론과 같은 전통적인 신학을 제거하고 신약성경으로부터 헬라 화된 부분 등을 제거하여 소위 양파 까기 식의 “단순한 복음”을 주장함으로써, 로마가톨릭 스콜라주의 신학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중세 시기에는 주지주의에 입각한 철학적 지식의 덩어리가 초기 사도적인 복음과 공의회전통의 삼위일체론에 덧붙여짐에 따라서 교회가 활력을 잃었고, 역동성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중세 동안에 위 5세기 말과 6세기 초의 위(偉)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Pseudo-Areopagite)의 글들과 14세기의 팔라마스(1296-1359)의 신학은 그나마 어느 정도로 중세 신학의 숨통을 터주었다고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자는 스콜라주의 신학의 모든 하나님 지식을 “카타파탁 신학”(긍정의 신학)으로 돌리고, 인간의 언어와 개념과 경험을 초월하는 빛과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아포파틱” 본질을 추구했기 때문이요, 후자는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에너지들“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본질과 삼위 그 자체에 대한 “아포파틱 신학”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계시와 사역 차원의 모든 것들을 모두 “카타파틱 신학”이라고 하였으니, 역시 스콜라주의적 노력 저 너머에 있는 빛과 영광의 영원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송영할 것을 강조하였다.
더군다나 디오니시우스와 팔라마스는 모세의 하나님 경험, 예수님의 변화산상의 경험, 바울과 사도요한의 신비한 경험 등이 모두 위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경험이기 때문에, 인간의 철학적 신 인식으로는 여기에 접근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사상 패턴으로 보면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기 보다는 플라톤적이라고 보인다.
물론, 우리는 공의회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의 유산을 떠나서 중세의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을 생각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전제 하에서 알셀름과 아퀴나스, 그리고 둔스 스코투스와 보나벤투라와 같은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의 삼위일체론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서 그 누구보다도 플라톤 철학을 배경으로 하는 안셀름과 상당한 정도로(어느 정도로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받아들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사용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삼위일체야 말로 중세 삼위일체의 중요한 신학적 계기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열거된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자들 이외의 다른 신학자들에서 삼신론적 경향 혹은 양태론적 경향들이 발견되고, 중세 말로 오면 이성을 전적으로 계시로부터 독립시켜 버리는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도 등장한다.
안셀름은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의 “지식을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의 방법론을 따라서 플라톤 철학을 배경으로 “그 자보다 더 큰 자가 없는 그 자”라고 하는 철학적 신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 신은 인간의 정신 안에 존재함은 물론 인간의 정신 밖에도 존재하시는 신이다. 그와 같은 신은 자명하여 직관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는 존재론적 논증에 의한 신 존재증명으로서 교회의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앙을 이와 같이 철학적 지식으로 설명하였다. 이것이 소위 “지식을 추구하는 신앙”이다.
아퀴나스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라서 “지식을 추구하는 신앙”을 인정하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사용하여 밑으로부터 위로 상승하는 다섯 가지 방법에 따른 우주론적 신 존재 증명을 제시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회의 전통을 통해서 내려오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는 자명하시지만 인간에게는 자명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증명이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말하자면 결과에서 원인으로, 그러나 궁극적으로 최초의 “원인 지워지지 않은 원인”(Uncaused Cause)으로, 그리고 운동으로부터 그 이전 운동으로, 그러나 긍극적으로 “부동의 동작자”(the Unmoved Mover)로 소급하여 얻어지는 “지고의 선”(summum bonum)을 본질로 하는 하나님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즉, 그는 교회의 전통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주론적 신 존재증명을 통하여 설명하였는데, 그것은 그 당시 유대교와 이슬람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의 신에 대한 변증을 삶의 자리로 하고 있었다. 아퀴나스는 교회의 전통적인 하나님의 세 위격들은 철학적 노력에 의해서 도달 된 철학적 신 개념과 접촉점이 없는 것으로 보지만, 전통적 하나님의 본질은 철학적으로 도달된 신 개념과 접촉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참고: 손은실 박사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삼위일체론).
이처럼 자연신학적인 하나님의 본질과 성서적 하나님의 본질 사이의 접촉점을 인정하면서 성서의 삼위로 상승하는 신학적인 절차는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이형기, “동방정교회와 WARC사이의 신학적인 대화: 성삼위일체에 대한 일치된 진술”).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은 이와 같이 “이성”에게 자리와 역할을 여러 모양과 여러 정도로 내어 주었다. 그리고 중세 교회는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와 플로렌스 공의(1438-1445)회에서 삼위일체론을 교통 정리한 샘이다.
그리고 피오레의 요아킴(c. 1135-1202)과 그를 뒤잇는 프란시스칸 승단의 삼위일체론의 색깔이 안셀름과 특히 아퀴나스의 그것과 다르다고 하는 사실도 중요하다. 필자가 기고한 글(요아킴의 삼위일체론)에서 지적한 대로 그의 삼위일체론은 비록 정죄는 받았으나(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와 1265년 교황 알렌산더 4세에 의하여), 오랜 중세 시기 동안 미래 지향적인 종말론을 상실했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는 삼았으나, 삼위일체의 역사화 그리고 역사의 삼위일체 화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 로마가톨릭교회에게 그리고 직제 상 문제가 많았고 경건생활과 도덕에 있어서도 문제가 많았던 중세교회에게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요아킴과 그의 종말론적 삼위일체론을 따르는 프란시스칸 사람들은 그 당시 교회에 대하여 개혁적인 마인드를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중세 전통 속에도 미래 지향적인 종말론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은 복음을 재발견하였고, 중세 말과 중세의 구원론 등에 반론을 제기하는 맥락에서 중세를 통해서 매개된, 그러나 고대 교부들로 회귀하는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귀하게 여겼다. 따라서 루터나 칼뱅의 경우,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철학적 군더더기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고대 공의회의 결정이 당시에도 유효하다고 보았다. 루터는 니케아 신조의 삼위일체론과 시릴적인 경향의 정통 기독론을 받아 드리는 입장이었으나, 삼위일체론에 관하여는 성서적 증언을 강조하다보니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의 구별을 중요시하였고, 스콜라주의 신학에서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그 어떤 합리주의적인 추론과 설명을 하지 않았으며,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복잡한 사변을 감행하지도 않았다.
삼위일체론에 관하여는, 루터의 동역자 멜랑히톤 역시 루터의 주장과 대동소이하였다. 이들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름 전통을 따랐다. 멜랑히톤이 작성한 루터교의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싣고 있다.
츠빙글리와 칼뱅 역시 루터와 대동소이하였다. 칼뱅은 카롤리와 미카엘 세르베투스의 반삼위일체론에 반대하여 니케아 신조의 정통 삼위일체론을 내세웠고, 이를 성경구절들로 뒷받침하였다. 칼뱅은 루터처럼 삼위의 구별을 강조하였으니, 그의 최종판 '기독교 강요'는 사도신경의 삼위의 구조를 따라서 구조화되었다. 특히, 그는 삼위의 “위격”을 “개별적 실재”(subsistentia)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영국교회의 개혁자들 역시 루터와 칼뱅 등 주류 개혁자들의 삼위일체론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16세기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과 영국교회의 “39 신앙조항”은 전적으로 정통 삼위일체론을 믿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17세기 루터교 및 개혁교회의 정통주의 교의학은 의심의 여지없이 정통 삼위일체론을 따랐다. 그리고 19세기 로마가톨릭교회의 트렌트 공의회의 교리문서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과 걸맞게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초두에 싣고 있다.
대체로 16세기 좌경화 종교개혁자들은 반 삼위일체론자들이거나 정통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미카엘 세르베투스와 소키누스가 반 삼위일체론자들이었고, 후프마이어 등 취리히 재세례파 종교개혁자들은 문자적인 성서주의를 주장한 나머지,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성서적 증언에 따른 용어는 확보하면서도 니케아 신조의 정통 삼위일체론은 받아 드리지 않았다. 메노 시몬스 역시 그러하였고, 그를 따른 메노나이트 파 사람들과 기타 형제단 공동체 역시 그와 같은 노선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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