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면 그만이지 무슨 삼위일체 하나님인가? “삼위”(three hypostases) 혹은 “하나의 본질”(one essence)과 같은 말이 성경에서 발견될 수 없는데, 왜 삼위일체 하나님인가? 그리고 로마제국의 황제의 입김이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 칼세돈 공의회의 결정 내용이 오늘날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특히 “오직 성경으로만”을 주장했던 종교개혁 전통과 18-19세기 미국의 경건주의 및 복음주의 부흥운동 전통을 이어 받은 우리 한국 개신교는 고대교회의 공의회가 결정한 삼위일체론과 정통 기독론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루터교와 개혁교회와 감리교 등은 고대 교회의 신조들을 중요시 여겨, 로마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그리고 성공회와 에큐메니칼 대화를 하고 있고, 에큐메니칼 신학을 추구하고 있다 하겠다.
필자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기 위하여 본인이 기고한 “니케아 신조” 부분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시 떠올린다. 라이머에 다르면, 신약성서 기록자들은 초기 기독교인들로서 다음의 3 가지 상황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본다.
하나는 여호와는 한 하나님으로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고, 아무도 본적이 없고, 그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될 수 없으며, 그의 백성의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행동하셨다고 하는 구약의 유대교적 유일 신관에 계속해서 충실해야 했고,
둘은 동시에 바로 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님의 탄생, 삶,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서 절대적인 의미에서 우리들에게 자신을 알리셨고, 우리들과 함께하셨으며(임마누엘),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만유를 회복하실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설명해야 했으며,
셋은 오순절 날에 초기 예수 추종자들 위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사실상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의 현존과 실재 그 자체로서 교회를 탄생시켰고, 모든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연합하게 하셨으며, 나아가서 다른 믿는 사람들과의 연합을 불러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고대 교회는 여러 세기를 거쳐서 위와 같은 성부, 성자, 성령 각각에 대한 확신과 이 셋의 통일성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라이머의 위와 같은 주장에서 중요한 것은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세 위격(물론, 휘포스타시스 개념은 4세기 카파도키아 교부들에 의하여 바르게 확정되지만)에 대한 확신과 이 셋의 통일성”에 대한 것이다. 라이머는 성경의 구속사적 내러티브에 나타난 세 위격을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보고, “성서의 내러티브 배후에 있는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전제”(ontological-metaphysical presuppositions)를 인정해야 하고, 결국 내러티브와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전제들“ 사이의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라이머는 전자로부터 후자에로의 연속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의 필연적인 발전이 있었다고 한다. 라이머는 오직 모더니즘만이 내러티브를 순수 역사주의로 이해하여, 그것을 우주적이고 존재론적인 뿌리로부터 잘라 냈다고 한다. 그는 공관 복음서 내러티브에서 발견되는 이 내러티브의 세 주체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빌립보 2장, 골로새서 1장, 에베소서 1장 등 바울의 편지와 요한복음 서설에서 발견되는 존재론적 형이상학적인 차원의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에로의 발전이요, 공관 복음서보다 먼저 기록된 바울의 편지들에서 발견되는 내러티브는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틀 거리 안에서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로써 라이머는 비록 메노나이트 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사용하고 있는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들(“본질”, “위격” 등)을 배제하고, 다만 성경의 내러티브의 세 주체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고백만을 주장하는 한스 요더 등 동일한 메노나이트 계통 신학자들의 반 니케아주의에 반대하였던 것이다(침례교, 오순절 하나님의 성회, 그리스도의 제자의 교회, 회중교회 등도 삼위일체론에 관하여 요더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라이머가 로마가톨릭교회의 정통신학에서처럼 모든 신학적인 주제들에 있어서 그와 같은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전제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라이머가 정통 삼위일체론에 사용된 그와 같은 성경 외적인 개념들이야 말로 성경의 내용을 매개시켜주는 매개체로 보는 것으로 이해한다.
라이머는 신약성서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위(二位)일체론”에 관한 성서구절들(롬 8:11; 고후 4:4; 갈 1:1; 엡 1:20; 딤전 1:2; 벧전 1:21; 요2 1:13)과 “셋이 한 쌍을 이루는” 성서 구절들(마 28:19; 행 2:32-33; 고정 6:11; 12:4ff.; 갈 3:11-14; 히 10:29; 벧전 1:2)이야 말로 신약성경의 삼위일체론과 훗날 공의회의 삼위일체론 사이의 “연속성”을 말해주고 있다고 못 박았다. 따라서 라이머는 “셋이 한 쌍을 이루는 하나님 개념은 신약성서와 초기 기독교의 시기로부터 기독교적 경건과 사고로서 존재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라이머는 여기에 더하여 3 가지 요소가 삼위일체 교리 발전에 기여했다고 본다. 하나는 신약성서의 이단으로부터 아리우스 등 고대 교회의 이단에 이르는 많은 이단들의 압력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둘은 이교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설명해야 하는 선교적인 자극이며, 셋은 이 삼위일체론을 알려고 하는 단순한 열망이다. 그리하여 전통 삼위일체 교리야 말로 한편 유대교적 유일신적 사고와 다른 한편 희랍 로마의 이원론과 다신교를 넘어 설 수 있었던 기독교의 하나님 개념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정통 교리가 확정된 시기가 신약성서의 경전 화(397) 시기와 같았다고 하는 사실은 기독교의 정통성의 표준이 요청되는 상황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린드벡 역시 사도신경과 같은 기독교 신앙 내용을 성경의 구원 이야기의 기본으로 본다. 사도신경은 대체로 기초 문법적이다. 즉,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성경 이야기 속에 있는 중심 요소들의 필수 불가결성을 확인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무조건적으로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린드벡은 “대부분의 교회들의 전통에 있어서 니케아 신조와 칼케돈 신조란 본질적인 성경적 가르침을 새로운 언어로 재 진술한 내용으로서 무조건적으로 항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였다. 그는 사도신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구원사로부터 나왔고, 역으로 그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는 라이머처럼 이와 같은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적 문화적인 용어사용에 의하여 번역된 것(ousia와 hypostasis 등과 같은 개념들)이 “니케아 신조”라며, 성서적 내러티브와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전제” 사이의 불연속성이 아니라 연속성을 주장한다.
이는 도토리에서 도토리나무가 자란 것이지, 밤으로부터 도토리나무가 된 것이 아니고, 달걀에서 닭이 나온 것이지, 오리 알에서 닭이 나온 것이 아닌 것과 같다 하겠다. 즉,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정통 삼위일체론이란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던 것이 생기며 돌연변이를 말하는 진화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교리의 발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암시적인 내용을 명시적인 내용으로 만든 것이었으니, 어디 까지나 그것은 성경의 메시지를 매개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즉, 이와 같은 교리의 발전개념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발전 개념과는 다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신학의 시녀로 삼은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이야 말로 복음을 질식시키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구약성경의 구원사의 이야기로부터 소원하게 만들었으며, 복음과 성경과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교리내용에 지리멸렬한 철학적 해석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끝으로 레오나르도 보프는 구속사의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과 사역을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본문으로 보고, 이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위격”, “본질”, “영원히 낳으심”, “영원히 발출하심”과 같은 신앙의 지식추구가 일어난 것이라고 본다. 그는 그와 같은 개념들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말로 할 수 없는 신비적 경험(the ineffable Mystery)에 대한 “신앙의 설명”이라고 한다.
그는 그것이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리가 아니라 하나의 경험이다.”라고 한다. 그는 “우리의 용어와 개념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그것은 다만 유추적이고 지시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신앙의 유추”(analogia fidei)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보프처럼 성경의 구원사의 세 주체에 대한 신비적인 경험만을 말하고,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성(본질)을 전적으로 도외시하며, 성경 외적인 모든 삼위일체론적 개념들을 단순히 그것에 대한 설명어로 볼 경우에, 성경의 구원사 자체가 암시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간과하기가 쉽다고 보인다.
그러니까, 세 주체(세 위격)에 대한 설명어들 역시 성경의 메시지 내용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러니까, 삼위일체론에 관련하여 “신앙유추”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 각각의 정체성과 특수성, 이 셋의 관계, 그리고 이 삼위의 본질 등을 성경내용을 바탕으로 추구하는 “신앙의 지식”추구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직 성경으로만”을 주장했던 종교개혁 전통과 18-19세기 미국의 경건주의 및 복음주의 부흥운동 전통을 이어 받은 우리 한국 개신교는 고대교회의 공의회가 결정한 삼위일체론과 정통 기독론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루터교와 개혁교회와 감리교 등은 고대 교회의 신조들을 중요시 여겨, 로마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그리고 성공회와 에큐메니칼 대화를 하고 있고, 에큐메니칼 신학을 추구하고 있다 하겠다.
필자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기 위하여 본인이 기고한 “니케아 신조” 부분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시 떠올린다. 라이머에 다르면, 신약성서 기록자들은 초기 기독교인들로서 다음의 3 가지 상황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본다.
하나는 여호와는 한 하나님으로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고, 아무도 본적이 없고, 그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될 수 없으며, 그의 백성의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행동하셨다고 하는 구약의 유대교적 유일 신관에 계속해서 충실해야 했고,
둘은 동시에 바로 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님의 탄생, 삶,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서 절대적인 의미에서 우리들에게 자신을 알리셨고, 우리들과 함께하셨으며(임마누엘),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만유를 회복하실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설명해야 했으며,
셋은 오순절 날에 초기 예수 추종자들 위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사실상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의 현존과 실재 그 자체로서 교회를 탄생시켰고, 모든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연합하게 하셨으며, 나아가서 다른 믿는 사람들과의 연합을 불러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고대 교회는 여러 세기를 거쳐서 위와 같은 성부, 성자, 성령 각각에 대한 확신과 이 셋의 통일성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라이머의 위와 같은 주장에서 중요한 것은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세 위격(물론, 휘포스타시스 개념은 4세기 카파도키아 교부들에 의하여 바르게 확정되지만)에 대한 확신과 이 셋의 통일성”에 대한 것이다. 라이머는 성경의 구속사적 내러티브에 나타난 세 위격을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보고, “성서의 내러티브 배후에 있는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전제”(ontological-metaphysical presuppositions)를 인정해야 하고, 결국 내러티브와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전제들“ 사이의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라이머는 전자로부터 후자에로의 연속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의 필연적인 발전이 있었다고 한다. 라이머는 오직 모더니즘만이 내러티브를 순수 역사주의로 이해하여, 그것을 우주적이고 존재론적인 뿌리로부터 잘라 냈다고 한다. 그는 공관 복음서 내러티브에서 발견되는 이 내러티브의 세 주체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빌립보 2장, 골로새서 1장, 에베소서 1장 등 바울의 편지와 요한복음 서설에서 발견되는 존재론적 형이상학적인 차원의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에로의 발전이요, 공관 복음서보다 먼저 기록된 바울의 편지들에서 발견되는 내러티브는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틀 거리 안에서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로써 라이머는 비록 메노나이트 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사용하고 있는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들(“본질”, “위격” 등)을 배제하고, 다만 성경의 내러티브의 세 주체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고백만을 주장하는 한스 요더 등 동일한 메노나이트 계통 신학자들의 반 니케아주의에 반대하였던 것이다(침례교, 오순절 하나님의 성회, 그리스도의 제자의 교회, 회중교회 등도 삼위일체론에 관하여 요더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라이머가 로마가톨릭교회의 정통신학에서처럼 모든 신학적인 주제들에 있어서 그와 같은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전제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라이머가 정통 삼위일체론에 사용된 그와 같은 성경 외적인 개념들이야 말로 성경의 내용을 매개시켜주는 매개체로 보는 것으로 이해한다.
라이머는 신약성서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위(二位)일체론”에 관한 성서구절들(롬 8:11; 고후 4:4; 갈 1:1; 엡 1:20; 딤전 1:2; 벧전 1:21; 요2 1:13)과 “셋이 한 쌍을 이루는” 성서 구절들(마 28:19; 행 2:32-33; 고정 6:11; 12:4ff.; 갈 3:11-14; 히 10:29; 벧전 1:2)이야 말로 신약성경의 삼위일체론과 훗날 공의회의 삼위일체론 사이의 “연속성”을 말해주고 있다고 못 박았다. 따라서 라이머는 “셋이 한 쌍을 이루는 하나님 개념은 신약성서와 초기 기독교의 시기로부터 기독교적 경건과 사고로서 존재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라이머는 여기에 더하여 3 가지 요소가 삼위일체 교리 발전에 기여했다고 본다. 하나는 신약성서의 이단으로부터 아리우스 등 고대 교회의 이단에 이르는 많은 이단들의 압력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둘은 이교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설명해야 하는 선교적인 자극이며, 셋은 이 삼위일체론을 알려고 하는 단순한 열망이다. 그리하여 전통 삼위일체 교리야 말로 한편 유대교적 유일신적 사고와 다른 한편 희랍 로마의 이원론과 다신교를 넘어 설 수 있었던 기독교의 하나님 개념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정통 교리가 확정된 시기가 신약성서의 경전 화(397) 시기와 같았다고 하는 사실은 기독교의 정통성의 표준이 요청되는 상황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린드벡 역시 사도신경과 같은 기독교 신앙 내용을 성경의 구원 이야기의 기본으로 본다. 사도신경은 대체로 기초 문법적이다. 즉,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성경 이야기 속에 있는 중심 요소들의 필수 불가결성을 확인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무조건적으로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린드벡은 “대부분의 교회들의 전통에 있어서 니케아 신조와 칼케돈 신조란 본질적인 성경적 가르침을 새로운 언어로 재 진술한 내용으로서 무조건적으로 항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였다. 그는 사도신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구원사로부터 나왔고, 역으로 그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는 라이머처럼 이와 같은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적 문화적인 용어사용에 의하여 번역된 것(ousia와 hypostasis 등과 같은 개념들)이 “니케아 신조”라며, 성서적 내러티브와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전제” 사이의 불연속성이 아니라 연속성을 주장한다.
이는 도토리에서 도토리나무가 자란 것이지, 밤으로부터 도토리나무가 된 것이 아니고, 달걀에서 닭이 나온 것이지, 오리 알에서 닭이 나온 것이 아닌 것과 같다 하겠다. 즉,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정통 삼위일체론이란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던 것이 생기며 돌연변이를 말하는 진화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교리의 발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암시적인 내용을 명시적인 내용으로 만든 것이었으니, 어디 까지나 그것은 성경의 메시지를 매개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즉, 이와 같은 교리의 발전개념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발전 개념과는 다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신학의 시녀로 삼은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이야 말로 복음을 질식시키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구약성경의 구원사의 이야기로부터 소원하게 만들었으며, 복음과 성경과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교리내용에 지리멸렬한 철학적 해석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끝으로 레오나르도 보프는 구속사의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과 사역을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본문으로 보고, 이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위격”, “본질”, “영원히 낳으심”, “영원히 발출하심”과 같은 신앙의 지식추구가 일어난 것이라고 본다. 그는 그와 같은 개념들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말로 할 수 없는 신비적 경험(the ineffable Mystery)에 대한 “신앙의 설명”이라고 한다.
그는 그것이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리가 아니라 하나의 경험이다.”라고 한다. 그는 “우리의 용어와 개념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그것은 다만 유추적이고 지시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신앙의 유추”(analogia fidei)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보프처럼 성경의 구원사의 세 주체에 대한 신비적인 경험만을 말하고,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성(본질)을 전적으로 도외시하며, 성경 외적인 모든 삼위일체론적 개념들을 단순히 그것에 대한 설명어로 볼 경우에, 성경의 구원사 자체가 암시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간과하기가 쉽다고 보인다.
그러니까, 세 주체(세 위격)에 대한 설명어들 역시 성경의 메시지 내용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러니까, 삼위일체론에 관련하여 “신앙유추”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 각각의 정체성과 특수성, 이 셋의 관계, 그리고 이 삼위의 본질 등을 성경내용을 바탕으로 추구하는 “신앙의 지식”추구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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