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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아버지, 대한의 성웅 이상재 선생

  • 홍영일
  • 입력 2009.03.25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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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를 구하는 길은 기독교 뿐
 
저자 전택부 장로(1915-2008.10.21)는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선생은 우리나라 개화기의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독립운동가, 사상가, 열열한 애국자였다. 일제 치하에서는 많은 애국지사가 국외로 망명을 했으나 선생은 끝까지 국내에 남아 민중과 더불어 동거 동락했다.”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다.
 
1850년 10월 26일 서천군 한산면에서 태어나 15세에 결혼하고, 목은 이색의 16대손으로 “목은 선생의 재현”이라 칭송을 받던 그가 18세에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세도가의 자제나 뇌물을 써야 급제하는 부패한 불공정한 과거 시험에 크게 실망하고 낙향하려던 중에 친척의 소개로 죽천 박정양 (竹泉 朴定陽, 1841-1904) 승지를 알게 되어 개인 비서로 활동하게 된 것이 정계에 발을 들어 놓게 된 계기이다.
 
1876년 한일 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1896년 독립협회가 창설되기까지 약 20년간 동안 우리나라는 민란이나 전쟁을 겪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 청일전쟁, 갑오경장, 민비시해, 아관파천 등 역사상 유례없는 큰 사건과 사회적 변동이 있었다.
 
견문을 넓이며 세계 무대에 올라서게 된다.

1881년 제2차 일본시찰단에 박정양을 따라 일본을 가게 된 것이 이상재 선생이 견문을 넓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국내 대신들의 반대로 출발부터 비밀리에 떠났다.
 
그리고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 공사로 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가게 된 것이 세계무대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청국 공사반대로 신임장 제출부터 애를 먹었다. 사모관대를 쓰고 거리를 지날 때는 이상한 복장 때문에 눈길을 끌었다. 음식을 먹을 때 이상재는 젓가락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미국에서 민주주의를 배우게 된다. 이상재 선생은 평생 한복을 입고 다닌 사람으로 유명하다.
 
45세 되는 해에 국정에 발언할 수 있는 관직에 오르게 된다. 이때가 바로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한꺼번에 일어난 1894년이다. 국운이 청국과 일본의 간섭으로 풍전등화 같은 신세이고 수구파니 개혁파니 파벌싸움은 극에 달하고 지도층의 부패와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이상재는 조석으로 과감한 개혁을 시도한다.
 
 이상재는 독립협회의 민권운동에 앞장서서 일한 인물이다.

그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관으로 국왕(이상재 선생은 고종황제보다 2년 연상)을 알현한 자리에서 매관매직하는 서류 뭉치를 화롯불에 던져 버린다. 무례한 짓이지만 국왕의 고민을 해결해 준 셈이다. 국왕의 명령을 불복종한 적도 있다. 동학란의 빌미가 되었던 세금을 곡물로 직접 받았던 제도를 부활시켜려는 반포를 목숨을 걸고 저지하였던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달아날 일인데, 국정을 바로 잡은 일로 백여 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이상재는 1896년 서재필, 윤치호와 함께 순 국문으로 된 민간 신문인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독립협회는 여러 차례 민중대회를 연다. 그중에 1898년 10월 29일 만민공동회에서 이상재는 “외국인에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동심 합력하여 전제왕권을 견고히 하자” 등 6개조의 관민합동 만민결의안을 결의한다. 황제를 무시한 것이 아닌데도 황제를 폐위시키고 공화정치를 꾀한다는 간신배들의 농간에 독립협회는 해산 당한다.

1902년 이완용이 중심이 되어 조작하여 정부 전복 음모를 꾸몄다는 이른바 개혁당 사건으로 이상재는 국사범으로 체포 된다. 그 감옥에서 이승만(이상재보다 25세 연하)을 만나게 되고, 감방 벽 틈에 끼어 있는 성경구절(눈을 눈으로……악한 사람을 대적하지 마라.)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한다. 전대미문의 옥중에 학교를 설립하기도 한다.

1904년(54세) 이 나라를 구하는 길은 기독교뿐이라고 생각하고, 비장한 각오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한다. 1905년 11월 9일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 당하자, 이상재는 YMCA를 중심으로 군중의 결사반대 시위를 진두 지휘한다. 헤이그 파견 비밀계획은 참정대신으로 있다가 파면 당한 한규설 대감 집에서 이루어졌다.

3ㆍ1운동 때에는 동지들의 용구에 의하여 배후에서 맹활약을 한다. 옥고도 치른다. 3ㆍ1운동이 무저항 비폭력의 혁명운동으로 전개된 것은 이상재 선생의 영향이다.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문도 오세창, 이상재, 이승훈, 박승봉 등 네 사람이 교정 검열하였다.
 
“지식을 쌓아라, 믿음을 지녀라, 희망을 잃지 마라.”

조선왕조의 깨끗하고 곧은 관리였던 월남 선생은 우리의 독립을 되찾는 길은 우리 청소년들을 올바르게 키우는 길뿐이라고 믿고 59세의 나이에 YMCA 종교부의 일개 간사로 봉사한다(64세 Y 총무, 71세에 회장이 된다). “지식을 쌓아라, 믿음을 지녀라, 희망을 잃지 마라.” 등 3가지 교훈에 힘을 쏟았다 이상재는 청소년 지도를 위해 미국에서 공부한 이승만 박사를 데려온다.
 
일본은 YMCA를 없애려고 총독을 암살을 획책 한다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는 한편, 유신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YMCA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파고들었다. 파괴공작은 간신히 막아 냈으나 일본 YMCA에 예속되고 만다.
 
이상재는 한 때 친일파 매국노 송병준이 물주였던 조선일보에 사장으로 추대되었다. 민족진영에서 운영한 동아일보와 싸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수락하여, 사내 공산조직을 몰아내는 데 앞장을 선다. 일본에 맞선 공동 투쟁 전선을 목표로 결성된 신간회의 회장직을 역임하여, 1927년 3월 29일 78세를 일기로 별세,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른다. 가장 어려웠던 시대에 이상재의 지혜와 강력한 지도력이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생애는 유모로 가득 차 있다.

저자 전택부 장로가 ‘해학과 풍자와 기지’라는 별도에 장을 만들어 이상재 선생의 유모를 소개하고 있다. YMCA 강연회 때 일본의 형사가 너무 많이 섞여 있을 것을 보고 “ 때 아닌 개나리꽃이 왜 이렇게 많이 피었는가?”라고 하였다. 그 당시 일본 형사를 ‘개’로 순경은 ‘나아리’라고 불렀다.
 
나라를 망친 이완용이 창설한 ‘조선미술협회’ 발대식에서 이토 히로부미, 송병준이 참석한 자리에서 “대감네들은 도쿄에 가서 사시는 게 어떻겠소? 대감들은 나라 망치는데 천재가 아니오, 도쿄로 이사 가면 일본도 망할 것이 분명하니 말이요.”라고 했다고 한다.
 
변영로 시인이 친구들과 함께 종로 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뒤에서 “ 변정상씨(변영로의 부친이름), 변정상씨”라고 불렀다. 변영로 시인이 아무리 아버치 친구라도 자기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못마땅하다고 하니까, “이 놈아, 네가 변정상의 씨가 아니냐!”라고 하시면서 “너는 변씨 가문의 씨답게 체통을 지켜야 하며, 씨알머리가 있어야 한다. 한국인의 씨답게 살아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외국 풍조를 비꼬아 한 말이다. “요새 웬일인지 상놈도 많고 미친놈도 많습니다. 김 상놈(긴 상), 박 상놈(복 상), 미쳤다 김(Mr.Kim), 미쳤다 박(Mr. Park) 하니까 말이야”
 
일본의 도쿄의 병기창을 구경하면서 “과연 일본이 강대국임을 알게 되었소. 그런데 한가지 걱정은, 성경에 칼로써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한다. 했으니 일본이 그처럼 칼을 쓰다가 망할까 하는 일이요.”라고 한다.
 
청년들과 농을 하며 노는 것을 본 친구가 “자네가 청년들과 너무 상없이 굴면 청년들이 버릇이 나빠지지 않겠나?”라며 나무랐다. 그러자 선생은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청년들더러 노인이 되라고 하면 청년이 청년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으나,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온전하라. (마태5: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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