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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선교의 제 문제들에 관해"

  • 한국일
  • 입력 2009.05.04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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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큐메니칼적 선교에 대한 편견을 불식해야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선교의 제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과 통합적 전망 모색: 예장 통합적 관점에서” 
 
        
서론:

본 논문은 필자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의 교회와 신학적 관점에서 복음주의 선교와 에큐메니칼 선교의 특징과 문제점들을 다루고 통합적 선교전망을 대안으로 모색하고자 함에 목적이 있다. 논문의 주제를 다루기에 앞서 본 교단의 신학적 성격과 그에 따른 역할을 먼저 간단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첫째, 본 교단의 신학적 위치는 진보적 교단과 보수적 교단 사이의 중도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신학이나 실천적인 면에서 전체 한국교회를 아우르며 신학적 차이에서 오는 배타적 갈등관계를 중재하고 화해를 도모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둘째, 본 교단은 공식적으로 한국기독교협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에 소속된 회원교회로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향하며 세계교회들과 활발한 교제를 하면서 동시에 목회와 선교활동의 실제에 있어서 교계 지도자 및 일반 목회자와 교인들은 대부분 복음주의적 입장을 선호하는 중간 입장에 있다. 셋째 본교단의 신학은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진영의 신학을 상호 비판적 대화를 통해서 통합하며 균형잡힌 신학을 추구하는 통전적 신학을 지항한다.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왜곡된 정보와 잘못된 선입견이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정신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70년대 독재정권이 “용공단체”나 사회질서와 안정을 파괴하는 급진적 혁명세력으로 오도하고 단죄했던 왜곡된 이해를 아직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하여 부정적일 뿐 아니라 선교와 에큐메니칼 운동은 서로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선교는 복음주의 교회의 활동이며 에큐메니칼 운동은 단지 사회참여 활동만을 지향한다는 이중적 도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긍정적인 소개와 논의가 활발치 못한 탓도 있으나 정식 문서를 통한 올바른 인식이 아니라, 구전으로 왜곡되게 전해 듣고서 부정적 인식에 그치게 된 것이 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하여 냉냉하게 반응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사료된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에큐메니칼 운동과 선교에 관한 공식문서와 학자들의 글을 통해 왜곡된 인식을 교정하는 것이 선교학의 시급한 학문적 과제라 할 수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적 기원을 보면, 교파주의적 선교활동으로 인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한 선교현장의 요청에서 시작 되었으므로 그 효시부터 선교와 분리되지 않는다.  또한 한국교회 선교는 복음주의 노선을 따른다고 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세계복음주의의 신학적 입장이나 흐름과는 달리 대체로 근본주의적 성향에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으며 실천은 중시하는 반면 그에 대한 신학적, 선교학적 성찰을 소홀히 함을 나타낸다.

본고에서는 선교와 관련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편견을 시정하여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선교 사이의 불필요한 갈등과 대립구조를 극복하고, 복음주의 선교를 에큐메니칼 선교정신으로 조명할 때 선교가 세계와 역사 속에서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며 역동적일 수 있는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본 논문에서는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선교의 기원이나 일반적 특성에 대해서는 지면상 다루지 않는다. 에큐메니칼 선교라 함은 세계교회협의회 기본 방침을 따르면서 발표된 신학문서의 방향과 정책에 맞추어 선교활동을 추구하는 입장을 말한다. 복음주의란 에큐메니칼 입장에 대해 비판적이고 대응적인 신학과 선교를 추구하며 1974년 로잔대회에서 자신들의 신학과 선교의 방향을 포괄적으로 제시한 입장을 가리킨다.
 
1.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선교의 쟁점들

선교신학의 차이에 따라 두 입장은 선교에 있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떤 항목은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선교의 모든 면에서 차이를 갖는 것은 아니다. 또한 두 입장의 차이점은 항상 부정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한 면으로 치우쳐 나타나는 각 입장의 극단적인 선교이해를 상호 보완하는 긍정적인 기능도 갖는다.  그러므로 선교이해의 차이에 근거한 쟁점들은 각 입장의 주장이면서 동시에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문제들을 선교학적으로 논하기보다는 선교현장을 염두에 두고 직면하게 되는 갈등과 쟁점들을 소개함으로 논쟁점이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한다.

첫째 선교의 개념의 편협성과 포괄성의 문제이다.

오늘날 선교학에서 선교 개념 자체가 문제가 된다. 선교와 전도의 관계를 어떻게 규명해야하는가? 선교는 해외지역의 활동으로, 전도는 국내활동으로 구분하는 것이 정당한가? 선교와 사회참여의 관계는 어떠한가? 만일 사회적 책임을 선교내용으로 수용한다면 사회 봉사활동은 단지 전도의 길을 열어주는 선교의 전단계의 수단인가 아니면 그 자체도 선교활동으로 간주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선교활동의 범위에 속하는 문제이며 이러한 질문들은 구원론과 동시에 인간론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선교활동이 지나치게 넓게 확장되는 것에 대한 “범선교주의” 비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도 중요한 쟁점으로 나타난다.

둘째 선교의 내용과 목표에 관련된 문제이다.

선교의 내용과 관련하여 선교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의 영혼구원인가? 여기에는 인간이해에신학적 인간론이 전제가 된다. 또한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 역시 선교의 중요한 쟁점이다. 선교의 목표에서 우선순위 문제가 중요한 논점이다. 개인구원과 사회변혁에서 우선순위가 존재하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복음주의 관점에서 사회참여적 입장을 정리한 그랜드 래피즈(Grand Rapids) 보고서(1982)는 사회참여가 선교의 필수적 과제인 것을 인정하지만 영혼구원이 논리적으로 우선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존 스토트는 우선순위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결정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놓기도 한다.

셋째 선교의 주체에 관련된 문제이다.

현대선교에서 선교의 주체와 활동의 장과 관련하여 교회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선교학적 해명이 중요한 이슈이다. 빌링엔 선교대회(1952) 이후에 하나님의 선교를 선교의 근본모형으로 수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기존의 교회가 선교의 중심이었던 선교모형에서 하나님의 선교로 전환되면서 교회의 선교의 역할이 무엇인가?  교회는 선교의 목표인가 아니면 도구인가? 교회를 구약의 방주나 도피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타당한가?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를 통해서 수행되지만 교회 밖의 역사 속에서의 활동으로도 이해한다. 교회 중심의 구속사와 세상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 사이의 관계 정립도 선교학의 중요한 논점이다.

넷째 선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특별히 타문화 선교에서 문화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편협한 신앙을 가질수록 문화에 대한 부정적 이해나 반문화적 태도를 취하게 되며 문화변혁적 차원을 강조한다.  자문화중심주의에 서있는 선교사는 자신이 속한 문화의 어두운 면은 보지 못하고 타문화 만을 판단하고 비판하려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또한 문화가 활동하는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그 사회 속에서 이해해야 하며 문화에 대한 신학적 조명을 통해서 복음이 문화와 올바른 관계를 갖도록 필요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다른 문화에 전해져 바르게 정착하는 과정에 대한 선교학적 성찰로서 토착화 또는 상황화에 대한 올바른 선교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보수적 시각에서는 복음이 문화를 변혁시키는 면에 강조를 둔다. 그러나 문화가 기능하는 해석학적 역할 (문화해석학)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선교사와 선교지의 관계를 상호 배움과 상호변혁의 새로운 관계로 설정하게 한다.

다섯째 선교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선교현장이나 현대 선교학에서 첨예하게 논쟁이 되는 것이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에 대한 이해이다. 신학적 성향에 따라 타종교를 사탄이나 우상숭배라고 정죄하는 배타주의 입장에서부터, 타종교는 기독교와 진리에서 차이가 없으며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가 같은 신을 지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종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 따라 기독교는 타종교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또한 기독교와 타종교간 대화문제는 현대선교학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대화문제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모든 대화가 종교다원주의를 지향하는가? 대화의 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대화와 증언의 관계는? 선교에서 대화가 갖는 위치는 무엇인가 등의 문제들을 풀어가야 한다.

오늘의 세계상황은 전에 없던 종교간 갈등과 충돌로 인해 인류생존이 위협받고 있다. 종교의 차이가 유혈충돌을 야기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는 타종교와 함께 세계평화를 위해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가를 모색해야 한다.  또한 오늘의 상황을 고려할 때 평화의 문제는 다만 정치적 차원에 속한 문제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개인의 내면적 평화에 제한되는가? 타종교 혹은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문제를 선교에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여섯째 선교와 협력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오늘의 선교는 더 이상 선교사 중심의 일방적 형태로 진행하기 어렵다. 일방적 형태의 선교는 이전의 서구제국주의와 문화우월주의의 소산이다. 또한 세계 모든 지역에 이미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열세하지만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다. 19세기에 수행되었던 교파주의적 선교형태는 비판받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오늘날에도 선교현장에서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타문화권 선교사들은 현지 교단에 소속되거나 적어도 그들과 상호존중의 협력관계 안에서 선교활동을 해야만 한다.
 
그러한 협력관계를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 개인적으로 파송되는 선교사 차원에서 협력관계는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 선교현지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후원교회의 기대나 요청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복음주의 입장의 전통적 선교이해와 에큐메니칼의 협력선교를 현장에서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특히 협력교단을 찾기 어려운 지역(교회가 없는 곳, 개신교가 극히 열세한 남미나 러시아 지역 등)에서 협력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협력관계와 관련하여 진정한 상호성을 가로막는 이전과 다른 양상의 문제가 선교현장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식민주의 시대에는 선교지에 대한 선교사의 몰이해와 일방적인 부정적 판단이 문제가 되었다면, 현대선교에서는 선교지 교회들이 자신들의 변화에 대해서는 문을 닫아놓고 선교사에게 현지에 동화하라는 식의 역차별 현상도 종종 나타난다. 이것은 선교지 교회의 주체적 자의식이 지나치게 나타날 때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일곱째 회심과 개종 그리고 회심의 차원의 문제이다.

선교의 필수적 사항인 회심과 개종은 현대선교상황에서 예민한 문제로 다루어진다. 자칫하면 개종을 제국주의시대의 유산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전도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넘어오는 과정에 회심과 개종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문제는 회심의 동기를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회심과 개종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개종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면 회심사건 없는 개종자의 숫자만을 강조하게 된다. 또한 진정한 회심은 회심자의 자유로운 양심의 상태가 보존되었을 때 가능하다.

에큐메니칼 협력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남미의 천주교 지역과 정교회가 지배하는 러시아 지역이다. 기독교의 다른 교파 교인들을 선교사의 교파로 개종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예민한 주제이다. 이것은 기존 종교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은 선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복음주의 입장은 정교회나 천주교회를 부정적으로 보고 타종교와 동일하게 간주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선교활동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에큐메니칼 관점에서는 기본적으로 그들을 개종시키기 보다는 협력관계 속에서 그들의 신앙생활의 진지함과 열심을 회복하도록 협력하며 동시에 명목상의 교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권유할 수 있다. 여기에서 종종 기득권을 주장하는 기존교회와 선교사간에 마찰이 빚어질 수 있다.
 
2. 선교개념이해: 특징과 문제점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입장을 기초하고 있는 신학적 차이에 따라 선교에 대한 이해가 공통적인 부분도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첨예하게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교회의 복음주의 선교이해는 세계복음주의 입장과 다른 면도 갖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 복음주의 입장을 표방하는 한국교회의 선교이해가 신학적, 선교학적 성찰을 거쳐 세계복음주의 입장과 신학적으로 조율하지 않은 채 이전의 개념들에 천착하거나 한국 상황에서 연유한 독자적, 주관적 경험들에 더 많이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한국교회의 주관적 경험에 근거한 복음주의 선교이해를 불가피하게 세계복음주의 입장에 비추어 언급할 수 밖에 없음을 전제로 한다. 복음주의 선교이해는 1974년 세계복음주의 교회와 선교 단체들이 공식적으로 천명한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을 중심으로 하고, 에큐메니칼 선교는 1982년에 발표한 문서(”Ecumenical Affirmation: Mission and Evangelization”) 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복음주의 선교의 특징

복음주의 선교의 내용은 에큐메니칼 입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서술하기에 용이하다. 왜냐하면 복음주의 신학은 전통적인 내용을 재확인하며 그것을 새로운 사조와 흐름으로부터 고수, 보전하려는 방어적 사고와 태도로 그 내용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선교의 입장은 휘튼선언문(1966), 프랑크푸르트 선언문(1970), 로잔언약문(1974), 마닐라 선언문(1989) 등에 기반을 두고 있다.  복음주의 신학과 그것에 기초한 선교를 단일한 입장에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독일의 선교학자인 피터 바이엘하우스는 복음주의 진영은 신학적 특성에 따라 여섯 입장을 구분한다. 여기에서는 대표적인 복음주의 선교학자 도날드 맥가브란이 작성한 현대복음주의의 선교신학 과 세계 복음주의 입장을 반영하여 작성된 로잔언약문(Lausanne Covenant, 1974)을 중심으로 그 특징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성서의 절대적 영감 및 권위성:

성서는 만물에 나타나 보이는 일반계시와 대비되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서 우리에게 영원한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며 선포하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말씀이다. 그 진실성과 권위에 손상이 없다. 이 진리의 적용은 특정상황에 따라 변화될 수 있으나 진리 그 자체는 항상 동일한 것으로 남는다.

(2) 영혼과 영생에 관한 교리

인간은 한 육체에 들어 있는 영원불멸의 영혼으로 이해한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며 누구도 타락의 결과인 영원한 사망으로부터 스스로 자력 구원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이것이 영원한 구속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전 인간이 자동적,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보편 구원론을 배격한다. (결과적으로 복음주의 선교는 영혼구원의 우선성과 절대성을 강조하게 된다.)

(3) 유일한 중재자 그리스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외에 인간이 구원 받을만한 어떤 다른 이름을 주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가져오는 유일한 중보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불신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신에 대한 믿음이 있지만 그 신앙이 그들을 구원하는데 충분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적 주권을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지않는 자들의 멸망을 확신한다. 물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신(?)과의 사귐에로 돌이키게 할 수 있으나 그 과정은 감추어져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복음전도에 대한 책임이 중요하다.

(4) 전도와 영혼구원의 긴급성

교회의 선교를 거의 전도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으며 전도는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하는 필수적 행동으로 간주된다. 전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권면하며 설득하여 그들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결단에 이르도록 초대해야 한다. 전도는 대화나 세상 안에서의 봉사적 책임과 구별되는 특별한 행위이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일 중에 전도가 최우선적이어야 한다. 선교에서 서구교회의 주도적 역할이 점차적으로 약해지면서 동시에 신생교회의 새로운 참여를 인식하고 있다. 전 세계를 전도지역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복음주의 선교에서는 선교사 파송지역을 선별하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전도를 위해 교회간의 일치와 협력을 강조하나 “복음주의적 단체들은 구조적인 일치(structure unity)보다 영적인 연합(spriritual unity)”에 대해서 더 많이 강조하고 있다.(E.L. Stockwell)

(5) 교회론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사람들을 인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 안에 창설하신 것이다. 교회는 여러 가지 과제들 중에 이 세상을 복음화하는 선교의 사명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교회는 이 세상의 하나님의 구원의 방주로서 사람들을 불러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전도의 일에 최우선적 목적을 두어야 한다. 복음전파와 하나님 왕국을 확장하는 도구로 부름받은 교회는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교회성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6)복음화와 종말

예수님이 친히 육체로 다시 오시는 재림은 복음주의 선교의 중요한 교리이다. 예수의 재림은 이 세상의 종말과 심판의 날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현실적 통치가 실현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이다. 성경의 증거(마24:14)에 따라 땅끝까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그러므로 재림약속은 세계전도에 박차를 가하는 동기가 된다. 재림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거짓된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은 거부된다. 복음주의 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전도에 주력함으로써 예수의 재림을 앞당길 수 있다고 믿는다.

1) 성령론

세계선교는 인간의 행위으로서가 아니라 성령의 지시와 인도하심을 받으며 실행된다. 선교의 결과는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선교에서 성령은 교회를 세우고, 파송하고, 복음을 전파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회개의 결단으로 이르게 하는 선교의 영이다.

맥가브란의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대개 로잔언약의 내용과 일치하며 특히 교회성장에 역점을 두는 반면, 로잔언약을 통해서 복음주의 선교의 가장 큰 전환점을 가져온 5항의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강조하지 않았다. 맥가브란은 이 점에 있어서 로잔언약 이전의 복음주의 입장에 충실하게 서 있으며 그 선교신학을 반영하는데 그쳤다고 볼 수 있다.

타종교와의 대화에 관하여 선교의 현실적 문제로서 그 필요성을 언급하지만 복음선포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전인적 구원에 대해서도 교회의 사회봉사적 차원에서 사랑의 실천인 구제행위(social service)를 언급하지만 사회구조적 변화를 요청하는 사회적 행위(social action)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며, 막 8:36절 말씀(“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에 의존해 인간의 영혼구원에 강조점과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사회개혁은 필요한 것이지만 복음화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구원의 결실이며 복음전파와 함께 수행해야 할 선교의 내용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2) 복음주의 선교실제의 문제점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한국교회의 선교실제는 이러한 세계복음주의 선교의 입장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것은 일관된 선교신학적 뒷받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신학적 요인들에 영향 받으며 수행되는 선교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는 거의 복음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선교의 실제적인 문제를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 비롯한 신학적 요인과 신학외적 요인에 기인한 비신학적 요인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선교신학적 요인

선교이해의 편협성: 선교의 초점을 주로 개인의 영혼구원과 교회개척 및 성장에 두기 때문에 선교현지의 사회, 역사, 전통, 문화 등 선교활동의 기본구조를 인식하는 거시적 안목을 갖지 못하고 그로 인해 선교지 사람들과 교회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로잔 언약과 마닐라대회 문서에 이미 전인적 선교가 제시되어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한 영혼구원, 교회와 세계를 분리한 교회중심의 선교형태에 머물러 있어 교회가 속해 있는 사회와 세계문제에 대한 책임적 인식과 실천력이 약하다.

(2) 협력정신과 실천의 부족

자기중심적 배타적 선교소명의식: 한국교회의 선교적 열정은 독자적 소명의식에 근거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서양교회로부터 한국교회로 옮겨갔다”, “세계선교의 마지막 주자” 같은 종말의식과 함께 선교를 말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의식은 종종 인간의 선교활동이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길 수 있다는 조급한 종말의식과 결부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한국교회가 세계선교를 주도한다는 잘못된 자기중심적 소명의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현지교단과 협력하기보다는 독자적 선교회를 설립하여 현지교단과 경쟁관계에 있거나 현지 목회자들을 빼내옴으로 현지교회를 분열시킨다는 비판도 받는다.

(3) 배타적, 공격적 선교전략의 맹목적 추종

선교전략이나 구호선정의 부적절성: 소수의 선교 단체들이 주로 선교동원과 후원을 위해 지나치게 선동적, 전투적인 정책과 자극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한국교회는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현상을 보인다. 선교적 분별력이나 선교학적 성찰보다는 감정적인 접근을 통해서 주로 선교를 충동적으로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행동주의: 한국교회 선교의 가장 큰 약점은 장기적 안목이 결여된 일회적 이벤트성의 프로젝트 중심으로 활동을 진행하는 것으로 지적된다. 또한 사업항목을 결정할 때 현지사정에 적합하고 필요한 것이기보다는 후원교회가 원하는 것에 따라 내용이 결정되는 경우도 있다.

(4) 효과적 선교를 위한 인프라 구축의 부재

선교지의 교회와 연결을 갖지 못하고 파송교회 중심으로 선교활동이 진행되기 때문에 선교현장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통한 기본 자료를 갖추지 못한 채 직접 선교현장에 뛰어드는 일이 생긴다. 다시 말하면, 선교현장 리서치에 의한 정확하고 깊은 지식이나 정보 없이 주먹구구식의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5)선교사 파송과 관리의 구조적 문제

교단선교부가 교단이름으로 파송만 하고 체계적인 관리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비전문화, 인력의 부족 등의 이유로) 거의 선교사의 개인적 역량에 의존되므로 개인에 따라 그 차이가 심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한국 후원교회의 직접적인 현지선교활동간섭: 후원교회의 영향과 선교방향이 선교사를 통해 현지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경향이 있다. 이럴 때 타문화 선교를 국내 목회의 연장으로 이해하게 되므로 후원교회 목회사역의 연장이나 복사형태를 취하게 된다. 현재 개교회 중심의 후원구조에서는 선교사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못하고 후원교회의 간섭을 배제하기 어렵다.
 
3. 에큐메니칼 선교의 특징과 비판점

1) 에큐메니칼 선교의 특징(1982, 2000 문서를 중심으로)

교회일치와 공동의 증언으로서 선교:

에큐메니칼 선교는 기독교인들간의 분열이 교회 증언에 스캔들이 된다는 점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한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의 징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교적 소명과 교회 일치 운동, 복음화 사이에 해결되지 않은 관계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다양한 교회들의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교회간 일치야 말로 에큐메니칼 선교의 전제조건이다. 그것을 위해 다양한 방법의 선교를 인정하는 것과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선교 모형의 변화를 중요시 한다. 선교는 교회들의 공동의 증언과 협력으로 이루어진다.

삶의 모든 영역을 위한 복음

에큐메니칼 선교의 폭 넓은 이해는 복음이해에 근거한다. 복음은 개인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를 포괄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삶의 모든 영역에 선포되어야 하며 따라서 선교적 실천은 복음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사회 구조에 하나의 도전이며, 동시에 개인들을 회개하도록 요청하는 부름이다. 복음의 증언은 이 세계의 모든 구조들, 즉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제도들을 향해서 선포되고 실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회심과 변화 역시 사회적 차원을 포괄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

에큐메니칼 선교는 빌링엔 선교대회(1952) 이후 하나님의 선교 패러다임을 추구한다. 선교의 주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대행자이다. 하나님의 활동이 전 세계 안에서 어떤 한계를 갖지 않고 진행되는 것같이 선교 역시 전 세계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때로는 교회가 생각하지 못하는 범위와 방식에서 진행되기도 한다. 성령의 역사는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의 선교를 하나님의 선교로 이끌어간다. 하나님의 선교는 통전적이며 전인적 구원과 전 우주적 회복을 목표로 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시대나 상황에 따라 급진적 성향을 띄기도 한다.

2000년 발표된 문서에서 전도(evangelism)와 선교(mission) 개념을 구분하였다. 선교는 통전적 이해를 담고 있으며 다섯가지로 구분된다: 복음선포(kerygma), 봉사행위(diakonia), 기도와 예배(leiturgia),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증거(martyria),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세우고 훈련하고 전인적 회복을 지향하는 교제(koinonia)이다. 전도는 선교의 다양한 차원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제자도를 향하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인격적 회심으로의 초청과 복음의 분명하고 의도적인 선포에 초점을 두고 있다.

다양한 문화속에 성육화된 복음

방콕 선교대회(1973)는 문화는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는 인간의 소리를 형성(shape)한다고 표현했다. 살바도르에서 개최된 선교대회(1968)는 하나의 복음은 다양한 문화 속에 선포되고 실현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서로 다른 문화권 속에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 복음의 문화적 토착화에 대한 적극적 이해가 필요하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추구하는 일치는 획일적 일치가 아니라 공통적 신앙과 공통적 선교에 대한 복합적인 표현이다. 타문화에 대한 우월주의를 버리고 타문화 선교현장을 단지 선교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함께 다양한 교회의 전통을 통해서 함께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동역자로 존중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상호문화적 해석학”적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

이 주제는 에큐메니칼 선교의 대표적 특징이다.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물질적 부와 빈곤의 격차가 크다는 사실을 주지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정으로 이 세계 안에서 기쁜 소식이 되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장애가 되는 세계 안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불의를 해결해야 한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적 삶이었다. 예수 안에서는 영적 복음과 물질적인 복음이 하나의 복음이었다. 특히 남미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제시된 가난한 자를 위한 우선적 선택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지침을 제공해준다.

선교의 장과 대상으로서의 육대 주

과거의 선교현장은 지리적으로 구분하여 주로 비서구지역에 제한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현장은 서구지역을 포함한 육 대륙임을 선언한다. 선교는 더 이상 특정지역에 한하는 지리적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선교는 전세계에서 모든 교회들이 함께 수행하도록 요청되고 있다.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 속에서의 증언

오늘의 상황은 종교다원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세계 모든 지역에서 실천하고 있는 선교는 타종교인들과의 만남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은 세계 모든 장소에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방법으로 기대하지 못하는 장소에서 일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풍요로움과 인간을 대하는 방식을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웃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함께 손잡고 인류 공동체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 오늘의 선교는 일방통행이 될 수 없다. 증언은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 통행적이며 증언과 함께 대화가 이웃과의 공존과 선교를 위한 한 방식임을 주목해야 한다.
 
2) 복음주의 선교가 비판하는 에큐메니칼 선교의 문제점:

에큐메니칼 관점에서 복음주의 선교의 의미를 고찰하기 전에 먼저 복음주의 신학이 에큐메니칼 선교에 대하여 비판하는 소리를 들어보자.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선교학자인 도날드 맥가브란은 다음과 같이 비난하고 있다.

1) 에큐메니칼 운동은 복음전파와 교회를 무시하고 단지 사회참여만을 강조한다.
2) 에큐메니칼 선교는 개인의 죄에 대한 심각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타나는 절대무오한 계시의 필요성도, 하나님과의 긴급한 화해의 필요성도 부인하며 복음을 알지 못함에 기인한 손실을 부인한다.
3) 에큐메니칼 운동은 사회정의를 강조하면서 하나님과의 화해보다는 인간환경의 조건들을 개선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4) 에큐메니칼 선교는 모든 종교의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5) 에큐메니칼 선교는 수직적 관계보다 수평적 관계를 더 중시한다.
또한 “프랑크푸르트 선언”(1970)을 주도적으로 작성한 독일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선교학자 피터 바이엘하우스는 그의 한 논문에서 에큐메니칼 선교에 대하여,
에큐메니칼 선교는 선교의 본질인 복음전파를 외면하고 구원의 개념을 정치적 해방, 사회적 정의, 여성해방과 인종의 평등한 권리, 다른 종교와 이념을 가진 사람과의 형제애로 대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칼 선교는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전통적 의미의 구원관을 벗어나서 정치, 사회적 혁명으로 대치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복음주의 입장에서 에큐메니칼 선교에 대한 비판점들을 정리하면 크게 네 가지 관점으로 집약할 수 있다.

1) 복음전도에 무관심하고 사회-정치적 참여만 강조함으로 죄에 대한 회개와 영원한 구원을 소홀히 한다.
2) 하나님의 선교를 주장하면서 개인의 인격적 회심이나 교회개척 및 성장의 중요성은 간과한다.
3)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면서 따라서 회심이나 개종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선교를 대화로 대치한다.
4) 교회의 모든 활동을 선교로 이해함으로 “범선교주의”에 빠지게 된다.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한 개인과 단체 중 극단의 일각에서 이와 같은 주장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에큐메니칼 문서에 나타나는 중심 내용들이 아니다. 에큐메니칼 선교를 이해할 때 소수의 극단적 주장들을 견지하면서 발표된 문서를 통하여 올바른 이해를 얻어야 할 것이다.
 
4. 두 입장의 화해와 상호보완적 선교이해:
 
“복음주의 선교를 통하여 시대를 초월하는 선교의 핵심을 확인하며 동시에 에큐메니칼 관점에서 시대적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복음주의 선교의 의미확대”

냉전시대의 유산인 에큐메니칼 운동(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한 부정적 이해와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의 배타적 대립구조를 넘어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대화와 협력을 통한 화해와 상호보완의 관계 안에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는 긍정적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각 입장의 차이와 독특성을 통해서 선교에서 놓치기 쉬운 점을 강조하게 될 뿐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 선교의 포괄적 과제를 보다 풍부하게 수행하게 될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그 발생기원으로 볼 때 선교와 분리되지 않는데, 보다 효율적이고 바람직한 선교활동을 위해 현장의 요청에 의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에큐메니칼 관점에서 선교를 이해할 때 크게 두 가지 사실이 강조된다. 첫째, 선교는 교회의 일치와 협력관계에 기초하여 모든 세계 교회들의 공동의 증언과 실천을 통해서 수행된다. 둘째, 선교는 개인적 사건이나 교회 내부적 일이 아니라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목회와 선교활동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은 많은 경우에 신학적인 것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신학적 인식의 전환이 교회와 선교사역의 실천에도 새로운 변혁을 가져올 수 있음을 자각할 때 신학적 접근의 필요가 절실히 요청될 것이다. 에큐메니칼 관점에서 복음주의 선교를 성찰할 때 선교에 대한 관점과 인식의 전환을 위한 선교신학적 접근이 무엇인지, 또한 선교현장에서 요청되는 변화가 무엇인가를 앞에서 다룬 쟁점과 복음주의 선교의 문제점과 관련하여 모색해보고자 한다.

에큐메니칼 선교에 관한 문서로 1982년에 공식적 입장을 표명한 “Mission and Evangelism: An Ecumenical Affirmation”과 1987년 동수의 복음주의신학자와 함께 작성한 “Stuttgart Consultation”, 1998년 제8차 하라레 총회를 앞두고 발표한 “Mission and Evangelism in Unity Today”를 근거로 하여 복음주의 선교의 의미를 조명하려 한다.

1) 선교개념 이해의 확장

선교는 복음전도와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가는 교회의 포괄적인 사역이다. 한국교회는 선교를 주로 복음전도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비기독교 사회인 우리의 경험을 고려할 때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탈 기독교사회를 경험하고 있는 과거의 선교위임을 수행했던 서구사회에서도 재복음화가 이루어지기 위한 복음선포의 긴밀한 필요성이 인식되고 있으며 사람들을 교회로 다시 모이도록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복음전도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에게 듣게 하며 인격적 회심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하는 선교의 핵심적 사항이다.

그러나 전도적 관점에서만 선교를 이해하면 선교의 목표가 전도를 통한 개종, 그 결과 교회가 성장하는 것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러한 개념에서는 복음전도의 궁극적 목적인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교회개척으로 축소되어진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표상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기 때문이다.
 
선교는 개인구원이나 교회성장의 범주를 넘어서 이 세상을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로 새롭게 창조하려는 본래의 목표를 지향해야 한다.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본받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 실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여기에서 교회의 선교적 과제와 책임 속에 사회봉사적 역할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선교란 복음전도를 포함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가는 교회의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교적 과제는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 삶을 통해서 구현된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춘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할 뿐 아니라 행위와 삶으로 직접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말씀선포와 함께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배고픈 자를 친히 먹이시고, 사회의 중심에 편입되지 못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함축적으로 표현하면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봉사)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74년 로잔에서 개최된 세계복음주의 대회에서는 이 두 가지 역할이 본질적인 것과 부가적인 것으로 구별되지 않고 둘 다를 교회의 필수적이며 본질적인 의무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회에서 봉사적 측면이 약화되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신앙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종종 영혼과 육체, 개인과 사회, 구속과 창조, 은혜와 자연, 하늘과 땅, 칭의와 정의, 신앙과 행동을 분리하여 전자를 본질적인 것, 후자를 부가적인 것 또는 전자를 우선적인 것 후자를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를 따르게 되면 교회의 사회봉사는 선교의 실천에 있어서 언제나 이차적인 것으로 뒷전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웃은 그의 영혼만을 사랑해야 하는 육체 없는 영혼이 아니고, 육체의 보살핌만을 요구하는 영혼 없는 육체도 아니며, 사회로부터 고립된 영육의 존재도 아니다”라는 존 스토트의 말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서 교회의 사회봉사를 자신의 실천과제로 포함할 수 있는 선교이해, 즉 통전적 선교이해에 기초할 때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수행이라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선교적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게 된다.
 
2)전 세계의 선교 현장화

선교는 어떤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지 않고 전 세계를 하나님의 선교현장으로 인식해야 한다. 과거의 서구교회 중심적 선교는 지리적으로 서구사회에서 비서구사회로 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서구사회는 이미 복음화된 기독교 사회이며 이교도들이 살고 있는 비서구 사회만이 선교 현장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3년 멕시코대회에서 “6대륙에서의 선교”라는 주제를 선언하면서 이와 같은 일방적인 선교구도가 바뀌게 되었다. 지금까지 세계선교를 주도해 오던 서구사회가 더 이상 기독교 사회가 아니라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탈기독교 사회”(Post-Christentum) 혹은 “기독교 이후의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더 이상 서구사회에서 비서구사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복음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즉 서구사회는 재복음화 운동(Re-Evangelization)을 전개해야 하며 과거에 그들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였던 신생 교회들이 이를 위해서 협력해야 한다. 서구교회는 점점 비어가고 있는 현상을 심각하게 자성하며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한 필요성을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에 대하여 아직 세계선교를 위한 역량을 가진 서구교회가 자기 지역에 몰두함으로 미전도지역의 선교를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우려의 소리도 들린다.

이 구조에 대한 오늘의 세계선교상황에로의 적용은 서구와 비서구사회에서 선교사 파송국가와 선교사를 필요로 하는 국가와 교회 사이의 상호배움과 협력관계를 제안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제는 세계 모든 지역의 모든 교회가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야 함을 인식하고 제각기 소유하고 있는 선교적 자원을 모아 효율적인 협력관계 속에서 선교를 수행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상황에 따라서 순수한 복음전도 측면이 강조되어야 할 지역이 있으며 반대로 폭 넓은 의미의 선교적 접근이 필요한 지역이 있다. 예를 들면, 과거에 기독교 지역이었던 유럽의 교회들은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실천을 자국이나 해외 선교지에서 수행하고 있으나 정작 자국내의 기독교 신앙과 교회는 미약해져 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과 그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고 듣는 복음전도를 통한 교회의 성장과 “재복음화”의 측면이 강조,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편협한 선교이해로 인해 주로 복음전도와 교회성장 측면에 집중하면서 신앙을 사회적 차원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영적, 피안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신생 교회들은 선교의 폭 넓은 이해와 그 의미의 역사적, 세계적 구체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3)다양한 문화 속에서 선교: 선교와 문화

선교는 다양한 문화들의 차이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자세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서구 국가들이 세계를 지배하던 19세기 식민지 시대의 선교는 서구문화 우월주의가 반영되던 시기였다. 서구문화가 기준이 되어 선교현장의 문화를 평가하고 판단하였다. 선교현장의 문화는 대부분 미개하거나 야만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며 기독교에로의 개종은 선교사의 문화형태까지 수용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제 1.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신생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서구 제국주의의 문화적 획일주의와 정복주의가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모든 문화를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것으로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선교현장에서 경험하는 문화의 차이와 다양성들이 인정되고 존중을 받게 되었다. 다양한 문화는 복음의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풍성한 의미를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다양한 문화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만나는 에큐메니칼 모임에서 서로의 차이들을 통해 성경과 그리스도의 은혜의 다양하고 풍성한 면들이 드러났다. 물론 복음이 새로운 문화를 만나면서 그 내용의 순수성이 혼잡케 되는 현상은 경계해야 하지만 복음이 선교현장에서 가장 풍성하고 견고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문화적 상황에 진실하게 뿌리를 내릴(성육신화)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선교는 선교사와 그의 문화를 절대화하는 일방적인 형태가 아니라 타문화 속에서의 신앙경험을 존중하는 쌍방적인 사건으로 이해된다. 그럴 때 선교는 상호이해와 존중, 배움의 과정이 된다.
 
4)기독교와 타종교 간의 대화: 선교와 종교

선교에 있어서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적 적대관계를 극복하고 사랑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기독교인은 종교의 차이를 넘어서 다른 사람과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하며 이것을 선교의 책임과 과제로 수용해야 한다. 평화로운 공존자체가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닐지라도 종교의 차이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오늘의 세계현실을 고려할 때 필수적인 것이다. 
 
선교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적 갈등 속에서도(바울의 경우, 모슬렘 사회에서의 선교) 실천되어야 하지만 평화로운 공존관계 일수록 더욱 효과적으로 바르게 수행되어진다. 더욱이 다양한 인종, 문화,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아시아 상황에서 평화로운 공존을 실현하는 것은 기독교 선교의 전제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기독교와 타종교간 대화가 필수적이다. 대화는 하나님이 인간과 대화하셨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 기간에 누구와도 차별 없이 대화를 나누셨다. 특히 당시에 천대 받고 소외당했던 사람들과 대화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예수님이 사람들과 기꺼이 나누셨던 대화나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는 복음선포가 언제나 일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을 존중히 대하셨으며 상호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말씀하셨다. 선교에서 대화를 언급함은 선교가 일방적이거나 강요적 방식이 아닌 상호인격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 상호존중의 태도에서 진행되는 것임을 가리킨다.

타종교와의 대화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는 대화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혼합주의나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거나 더 나아가 복음선포를 포기하고 선교를 대화로 대체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에 근거한다. 그러나 진정한 대화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대화는 상대방에게 경청하는 동시에 자신의 신앙에 대한 증언을 병행, 포괄한다.
 
에큐메니칼 대회의 문서 어디에도 대화에서 복음증거를 포기하거나 기독교에로의 초청을 대화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발견할 수 없다.  대화는 새로운 공동체와 인류를 위한 공동의 봉사에 참여하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회심을 포기하고 오직 대화만을 말하는 종교다원주의적 대화와(틸리히, 종교다원주의자)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기독교인이 다른 종교인과 대화할 때 그 대화는 선교의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선교를 실천하는 한 형태로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종교적 갈등상황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대화는 상대방에 대한 편견을 불식하여 서로에 대한 보다 바른 이해를 얻고, 나아가 인류의 평화를 위한 협력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요청되는 것이다.
 
5) 전인적 생명의 회복과 전 피조세계의 보전과 지속적 발전을 가능케 하는 대안적 삶의 태도:

선교는 인간의 전인적 생명과 전 피조세계의 올바른 질서회복을 포함해야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성장으로 인한 물질적 풍요로움은 인간에게 편리한 삶을 제공하는 동시에 환경오염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역기능을 초래하였다. 환경문제는 이제 세계 어느 지역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매일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 자연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문명의 발전은 도리어 인류를 파국으로 몰아가게 될 것이다. 교회는 생명의 포괄적 의미를 인식하고 누구보다도 환경보존에 앞장서야 한다. 인간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으로 인하여 신음하는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회복하는 것은 곧 인류의 생명을 사랑하는 교회의 선교적 과제이다.

환경과 생태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의 방식(Lifestyle)을 바꾸어가야 한다. 과거 가난했던 시절에는 가능한 한 더 많은 것을 소유하여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제는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할 수 있지만 스스로 덜 쓰고 안 쓰는 절제된 삶의 방식이다. 즉 피조세계의 보전을 위해 절제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 인류의 생존을 지탱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 삶이란 검소한 삶, 단순한 삶, 절제하는 삶, 스스로 불편함을 선택하여 문명의 이기가 주는 역기능을 최소화 하는 자세,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나눔을 행하는 삶의 방식들이 교회에서부터 강조되어 사회로 확산되어가야 할 것이다.
 
6)상호협력관계의 선교

선교는 세계의 모든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원을 모으고 나누는 협력관계 안에서 함께 수행하는 것이다. 오늘의 선교상황에서 복음주의나 에큐메니칼 선교를 막론하고 세계 모든 교회는 동반자적 협력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선교사의 가장 큰 어려움은 동료 선교사들과의 불화로 지적된다.
 
선교현지에서 10년 이상 활동한 한 선교사의 말을 들어보면, 한국 선교사들간의 협력에 장애가 되는 요소를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다: 선교사들간에 불필요한 경쟁심, 폐쇄적인 성격, 파벌의식, 권위의식, 선교사 자신의 협력선교에 대한 관심과 의지의 부족, 지나친 교파주의, 파송교회나 후원기관의 선교에 대한 에큐메니칼 의식의 결여 등이다. 그러므로 먼저 선교사를 파송하기 전에 현지 교단이나 선교회, 한국의 (파송)교단이나 선교회가 협력관계를 맺고 선교협정을 맺은 후 현지교회의 필요를 따라 선교지를 결정하고 선교사를 선정하여 훈련하고 파송한 후 철저히 현지 교회와의 협력 하에 선교를 수행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 선교가 정상적인 채널로 이루어져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선교가 되고, 또한 선교사가 현지교회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으며, 선교사 개인에 따라 선교활동이 좌우되는 현상을 피하고 선교의 지속성이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총회의 세계선교부와 에큐메니칼 협력관계를 다루는 창구가 일원화 되거나 적어도 긴밀한 체제를 이루어야 한다.

또한 선교사가 파송되기 전 선교사 훈련과정에서 에큐메니칼 운동과 선교협력의 목적과 방법을 구체적으로 교육하여 선교협력의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에큐메니칼 협력관계에서 보면, 선교는 선교하는 교회와 선교현지 교회사이에 상호주체성의 존중과 문화와 형태의 차이에 근거한 다양한 기독교 신앙의 경험과 차이의 인정, 그리고 상호 배움과 상호변혁을 위한 개방성의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선교현장의 상황에 따라 협력관계가 실현되기 어려운 현지상황을 고려하여 개척선교형태도 역시 존중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문화권이나 공산권지역(중국, 베트남), 개신교 약세지역으로서 협력관계 교단을 찾기 어려운 나라(천주교가 지배하는 남미상황, 힌두교가 강력한 네팔 등), 혹은 교회가 없는 곳(미전도 지역)에 교회를 개척해야 할 지역적 특수상황에서는 협력관계의 근본정신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또는 교단의 위임을 받은 선교사가 현지교단과 협력관계를 가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어야 하겠다.

현지교회와의 협력관계에서 재정후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일관된 정책이 있어야 한다. 현지교회에 대한 재정후원이 현지교회의 자립기반을 박탈하고 선교사 의존적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립기반을 세워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7)교단의 선교정책과 파송구조의 개선

선교는 파송만이 아니라 선교를 바르게 수행할 수 있도록 관리하고 후원하는 구조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현재 한국교회가 해외에 파송한 선교사의 숫자는 많지만 그 선교활동을 효율적으로 바르게 수행토록 하는 구조적인 측면에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 선교사들은 교단 파송 선교사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개교회 파송 선교사의 특성을 지닌다. 그것은 개교회가 교단을 통해서 파송하고 후원하며 선교활동에 대한 보고를 받고 감독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후원교회가 선교현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극단적인 경우에 후원교회 당회장에 의해서 선교사의 운명이 결정되기도 한다. 한국교회 선교의 가장 큰 취약점은 선교사를 파송만 하고 충분한 관리와 돌봄이 없다는 것이다. 한 선교사의 말을 빌리면, 선교사는 선교현장에서 고아처럼 되든가, 아니면 특수부대 요원처럼 자신이 스스로 싸워서 생존하여 영웅이 되거나 도태되든가 하는 두 가지 길 중의 하나라고 한다. 
 
선교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철저하게 관리하고 돌보며 돌아온 후의 사역까지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파송하는 교회, 후원자, 교단, 선교사가 연합하여 함께 수행할 때 바른 선교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선교사 관리에 전문성을 가지지 못한 개교회나 교단의 선교부로는 그 많은 선교사를 돌보기에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

다양한 제안을 종합하면, 선교사를 파송하는 기관, 후원하는 기관, 수용하는 기관 사이의 역할분담과 긴밀한 협력체계를 이룰 때 한국교회 선교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선교사 선발과 파송은 선교부가, 후원은 후원교회가, 현지에서의 선교사 관리와 배치는 현지 선교부가 담당하는 것이다. 후원교회나 목회자의 영향력이 선교지에 직접적으로 행사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선교에 대한 오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외국의 선교 단체들은 선교사 관리와 보호에 있어서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기도와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관리는 전문적인 선교기관을 통해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교회의 현 선교사 파송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 전문화된 선교단체의 경험을 배우거나 그들과 협력하는 것이 현재의 개교회 중심의 선교구조를 개선하는 길이 될 것이다.
 
선교사 파송과 관리구조의 갱신을 위해서 최소한 지역별 선교행정 담당자제도를 신설하여 현지 선교회와 긴밀한 협력 하에 일관된 선교정책 실현과 선교사 관리에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교단 선교부)

한국교회 선교는 개교회의 선교열정과 재정적 후원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후원교회의 지속적인 열심을 보존하되 현장에 대한 산발적이며 직접적인 영향으로 야기되는 선교지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후원교회의 목사와 선교 담당자들에 대한 교육이 있어야 한다.(후원교회)

한국교회의 보다 나은 미래의 선교방향을 정립하기 위해서 신학교의 선교학 교육과정과 선교사 훈련과정에서 세계선교동향과 선교현지의 상황을 반영하도록 조정할 필요가 있으며 교단 선교부, 선교학자, 현지 선교사회 간에 상호 긴밀한 협력체제가 형성되어야 하고, 선교정책에 대한 지속적이며 정기적인 선교학적 성찰과 반성을 통해 올바른 선교정책을 마련키 위한 위의 기관들의 정례모임이 필요하다.
 
결론

선교는 어느 특정한 교회나 집단이 독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 활동하시며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속한 지역과 다른 지역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되 때로는 교회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심도 인정해야 한다. 복음주의 선교는 주로 선교현장을 주로 해외선교지에 집중하고 있고 에큐메니칼 선교는 해외선교현장을 포함하여 모든 곳을 선교현장으로 인식하고 활동한다. 여기에서 각각 그 특징의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두 차이점은 서로 보완하면 어느 곳에 치우친 선교활동을 보다 온전하게 만들어 갈 수 있다.

신생교회로서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과 활발한 해외선교 활동은 복음적 신앙의 열심에서 비롯되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영생을 약속하는 구원의 확신과 성도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복음전파의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믿음의 열심은 복음주의 신앙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열정 배후에 있는 자기중심적 배타주의의 편협한 신앙의 역기능을 외면할 수 없다. 복음주의 신앙을 에큐메니칼 관점에서 조명하면 그 본래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복음주의 신앙의 개인주의와 교회중심주의에 치우친 편향성을 극복하고 그 의미의 구체성, 역사성, 세계사적 지평을 회복하여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켜가도록 부름 받은 세계를 향한 선교적 책임을 수행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자기 경험을 절대화 하는 비대화적 경직성, 다른 입장을 정죄하는 배타적 극단주의, 교회 상황의 대중성을 무시하고 신학을 현학적으로 만들어가는 소수의 엘리트주의 등은 피해야 할 것들이다.

본 교단 선교사들의 역할은 교단의 신학적 성향으로 볼 때 선교현장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신학적으로 보수와 진보를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신학적 넓이와 유연성은 선교현지의 진보적 토착교회와 보수적 신학을 배경으로 한 선교사간에 중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한다.
 
예컨대, 필리핀에서와 남미에서 본 교단 선교사들은 합동교단의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하면서 현지교단의 진보적 성향을 가진 교회들과 보수성향을 가진 한국 선교사들 사이의 마찰과 긴장관계를 풀어나가야 할 과제들을 안고 있다. 여기에 본 교단이 복음주의적 신앙에 기초하면서 에큐메니칼 관점의 넓은 지평에서 선교적 의미를 확장하여 실천해야 할 고유한 사명이 있다.
 
 
논문초록
 
제목: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선교의 통합적 과제와 전망. 예장통합 교단 관점에서”
      
 
한국교회는 신학적 성향에 따라 크게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입장으로 구분되는데 실천현장에서 대부분의 교회와 목회자들이 복음주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이 두 신학적 관점은 그 차이로 인해 종종 갈등과 대립에 직면한다. 문제는 에큐메니칼 입장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 있는데 그로 인하여 심각한 갈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본 논문에서는 에큐메니칼 신학에 대한 편견을 불식하고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신학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상호 보완적 관계를 갖게 된다면 선교가 얼마나 폭 넓고 역동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큐메니칼 선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처음부터 선교활동과 함께 시작하였다. 선교현장에서 교파주의적 갈등과 혼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회 일치와 연합 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하였다.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선교는 선교신학의 차이에 따라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서로의 강점을 세우면서 상대편의 약점을 보완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다.

두 입장의 상이성이 드러나는 선교이해의 쟁점들을 살펴보자.

쟁점은 주로 선교의 개념, 목표,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위치와 역할, 문화에 대한 이해와 평가, 종교에 대한 이해와 관계규정, 협력관계, 회심과 개종에 관한 주제들이다.

복음주의 선교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선교이해의 편협성, 배타적 선교소명으로 인한 불화, 공격적 선교전략의 맹목적 추구, 개교회 중심의 선교 파송구조 등이며, 에큐메니칼 선교의 문제점은 복음전도보다는 사회적 관심과 참여를 더 강조하며, 하나님의 선교의 극단적 형태로서 개인의 인격적 결단을 강조하지 않으며,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면서 선교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하는 범선교주의 등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입장에서 문제로 지적당하는 것은 결코 각 입장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소수그룹에서 발견되는 내용들이다. 각 입장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선교에 관한 공식문서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시대의 선교적 과제는 과거 냉전시대의 유산인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부정적 이해와 복음주의와의 배타적 대립구조를 넘어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대화와 협력을 통해서 폭 넓고 역동적인 선교사명을 수행하는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위해 본 교단의 폭 넓은 신학적 사고와 다양한 신학적 입장에 대한 포용적 태도는 한국 교회상황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화해의 협력관계를 형성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일교수는 장신대, 장신대대학원을 나오고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선교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글은 명성교회 사랑방 선교회에 발표된 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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