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유한 자가 하늘의 땅을 차지하게 될 것
영국 맨체스터에도 유명한 박지성과 루니, 호날도우가 있지만 옛날 동부유럽 헝가리에도 천재적인 축구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푸스카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유럽 컵 축구대회에서 우승한 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하여 칭찬을 보내고 환호를 보내고 영광을 보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서 “어떻게 이렇게 축구를 잘 할 수 있었느냐”고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합니다.
“내가 공을 차고 있지 않은 때는 축구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있는 때입니다. 내가 축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있지 않은 때는 축구에 대하여 생각하는 때입니다. 나는 축구 외에 말해 본 일도 생각해 본일 도 없습니다.” 이정도 되면 축구에 미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브라질의 젊은이들은 라이트를 켜놓고 밤새도록 축구를 한다고 합니다. 국민들이 사실상 축구에 미쳐있습니다.
땅에 집착한 이스라엘
오늘 본문은 푸스카스처럼 걸어가지 않고 쉬는 때는 땅에 대하여 얘기하고 땅에 대하여 얘기하지 않은 때는 땅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때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온전히 일생의 모든 삶이 땅에 사로잡혀 있는 민족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팔레스틴 난민이 차지하고 있는 옛 블레셋 영토를 차지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의 땅에 대한 관심과 애착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창세기는 땅의 이야기
1-11장
창세기는 땅과 관련된 두 개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1-11장에 있는 것으로서 땅에 완전히 정착하여 살면서도 추방과 땅의 잃어버림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벨의 사람들은 땅을 잃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사실상 다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나치게 땅을 의지하다가 그 결과로서 땅을 상실하게 되는 것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안전하게 땅에 정착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다시 잃게 만드는 어리석음과 부주의함을 밀도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12-50장
창세기의 또 다른 이야기는 12-50장에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취급하고 있으며 땅을 갖지는 못하였으나 땅을 향해 나아가되 땅 얻음을 확신하면서 사는 삶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땅을 소유한 사람은 상실하는 쪽으로, 상실한 사람은 약속의 땅을 추구하는 쪽으로
즉, 땅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땅의 잃어버림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땅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 땅 얻을 것을 확신하면서 약속의 땅을 추구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처음부터 이렇다 할 만한 땅을 갖지 못한 유목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땅을 갖고 있지는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다는 의식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약속들의 본질은 땅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자리를 잡는 것이요, 야훼께서 인도하시는 그 곳에서 안전을 보증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여정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땅으로 가는 순례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에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강력하게 냉정하게 정든 고향을 떠나라고 촉구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길은 자기가 처해있던 정든 옛자리를 떠나는 것과 현재의 땅 없음을 신앙의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땅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였습니다. 순례자는 약속 때문에 어딘가에 속하거나 정착하지 못하면서 언젠가는 영원히 정착할 날을 기다리면서 약속의 땅을 향하여 발이 닳도록 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저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집” 하면서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살면서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드디어 안전한 땅에 거하게 되어 아브라함과 이삭은 거기서 거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안정된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착각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그러나 훗날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바람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대는 애굽으로 옮겨 갑니다. 그래서 야곱의 식구들이 요셉을 따라가게 됨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번성하게 됩니다. 그 땅은 그들이 마치 약속의 땅으로 착각한 땅이었습니다. 물자가 풍성하고 문화가 발달하고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문화와 종교는 다르지만 그런대로 살만은 했습니다. 그 땅이 이집트 즉, 애굽이었습니다. 여기는 편안하고 안정된 땅이었습니다.
누구도 떠나고 싶지 않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바로의 압정이 시작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의미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땅이 안전하고 내 집이 이만하면 안전하다 고 할 때 이미 나도 모르게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종교성이 상실되고 의식주에만 급급한 나머지 민족의 정체성까지 상실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전하고 편안할 때가 가장 어렵고 두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고난의 시작의 예고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출애굽 시켜 아브라함에게 제시했던 땅으로 데려가고자 원했던 것입니다. 약속의 자손은 그가 아무리 부유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애굽의 폭정같은 고난을 주어서라도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순례자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제는 광야로의 출애굽의 기쁨도 잠시잠간, 광야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약속의 땅과 애굽의 땅
차라리 노예생활을 해도 고기가 많고 물이 많은 옛 땅인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간다는 기대에 부풀어 순례자로 자처하여 소망과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날이갈수록 거세어지는 배고픔과 갈증, 추위, 짐승의 위험 때문에 기대와 약속을 상실하고 애굽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집트는 노예의 신분을 강요하는 곳이면서도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충분한 자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랑자와 순례자
이제 그들은 순례자가 아니라 유랑자로서 꿈도 기대도 없이 하루하루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유랑자로서의 삶을 산 사람들은 한 명도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단지 순례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교훈을 얻게됩니다.
같은 신앙공동체라도 어떤 사람은 순례자로서의 삶을 자처하고 늘 약 속의 땅을 기대하면서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이 애착하지 않고 하루하루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같은 교인인데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이나 땅에 대한 전혀 기대 없이 오늘도 타성적인 예배에 습관화 되어 있고, 건물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관습에만 이끌려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순례자가 아닌 유랑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례자와 유랑자를 구분하기 위해서 광야의 고난을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랑자가 아닌 순례지로서 즐겁고 풍요한 세상과도 같은 안전한 이집트를 버리고 죽음과도 같은 광야를 선택할 때 메추라기와 만나와 생수 나오는 바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불경기 일때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방법을 택하지 않고 어렵지만 신앙적인 방법을 선택할 때 거기에서 샘물이 나오는 법입니다. 순례자는 때로는 모험이 있어야 하고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인위적인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보게됩니다.
모든 일을 할 때 잔수를 쓰는 유랑자의 방법을 택하지 말고 힘들더라도 순례자의 방법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사람들은 약속의 땅을 행하여 나아가고 있는 순례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유랑자는 희망이 없고 꿈이 없고 오늘 하루의 만나와 메추라기에 만족하고 저택에 앉아서 평안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유랑자들은 광야 생활에서도 계속 떡과 고기를 요구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을 알 것이요,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떡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떡을 주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영광만 보라고 말씁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만 가르쳐 줄 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개인적으로 어려울 때 떡만을 요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랑자는 떡만을 요구하지만 순례자는 비록 가난하고 허스름한 집일지라도 희망과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약속의 땅에 푯대를 걸고 선한 싸움을 마칠 때까지 하나님의 임재를 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나안, 약속의 땅인가? 심판의 땅인가?
가나안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이 실현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 광야에서 볼 수 없었던 풍부한 물자와 기름진 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결과제인 이방민족들을 우선 멸하고 신앙적인 삶을 시작해야 했는데 그들은 너무 많은 복에 겨워 나태와 안일에 빠집니다. 이방여인과 음행하고 이방신을 믿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문젯거리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도 자기가 관리할 능력이 없으면 그것은 약속이 화로서 작용합니다. 교회도 관리할 능력이 없으면 화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이는 분규교회에 잘 나타납니다. 건물이 복이 아니라 화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그것은 솔로몬에게서도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지혜와 모든 부귀영화를 주자 그 축복을 감당하지 못하여 그는 결국 나라를 둘로 나뉘게 하는 장본인이 됩니다. 둘로 나눠지는 교회들도 하나님의 복을 감당하지 못해서 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비일비재하게 나타납니다. 어떤 약속을 이루기까지 우리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주님께 매달립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그러나 복이 임한 후의 우리의 신앙자세는 달라집니다. ”내 뜻대로 살기로 했네“ 일단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복을 많이 받아 십일조가 늘자 십일조 생활을 게을리 하게 되기도 하고 교회의 공예배에도 사업상 빠지게 되기도 합니다. 자식이 대학에 들어가면 40일 작정 새벽기도는 끝이 나고 더 이상 새벽기도에 안나옵니다.
약속의 땅 감당하지 못할 때 땅 상실의 역사가 시작
교회에서도 평신도나 서리집사때는 순수한 열정으로 열심히 하였는데 그 사실이 인정받아 항존직으로 되었을 경우, 그 때부터 믿음의 쇠퇴와 주님을 처음 만났던 열정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다시 땅 상실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또한 물질적으로 어느정도 정착해서 살만하니 신앙적인 나태가 시작이 됩니다. 어느듯 교회생활은 내면의 깊은 감격이 없는 습관화된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광야의 고통이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포로기의 고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전은 다시 불안으로, 생명은 죽음으로, 기쁨은 슬픔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이라는 땅을 신앙으로 감당하지 못하자 하나님은 다시 그들에게 땅을 상실케합니다. 우리도 어렵게 얻은 땅을 대한예수교 장로회 27차 총회를 통해서 신사참배 가결이라는 수치스런 결정 때문에 다시 공산주의의 치하에 밟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땅을 빼앗습니다. “우리가 바벨론 강가에서 울었도다”고 시편기자는 기술합니다. 그리이스출신 가수 나나무스크리가 부르는 자유의 노래(a song of liberty) 는 시편 137편을 노래한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복을 신앙으로 감당하지 못했을 경우, 그 축복을 상실시키는 방법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바사와 고레스를 통해서 스룹바벨과 에스라 느헤미야를 인도자로 내세워 땅을 다시 찾을 수 있게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진정한 땅은 가나안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그것은 새 약속에 의한 땅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새 가나안을 기다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헌 땅을 되찾고 수호하기 위하여 로마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더니 다시 추방당하게 됩니다. 예수가 오셨습니다. 옛 땅의 개념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새 땅을 선포합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가난한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들이 추구하던 땅과는 너무 거리가 멉니다. 온유한 자가 들어가는 땅입니다. 처음에 결혼하면 남자가 마치 모든 땅이 다 자기의 것인 것 처럼 행동합니다. “밥 가져와” 하고 소리칩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 식사 같이 합시다”, 좀더 나이가 들면 눈치를 보면서 자기가 부엌상을 차리는 시늉을 합니다. 그러면 아내가 와서 밥을 차려주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우리는 너무 이 세상의 땅에 정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땅이 비록 적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곳이면 거기가 예배처요,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는 곳이면 산이라 할지라도 거룩한 곳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계신 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에게는 고난이 임하고 있습니까? 약속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언젠가 현실적으로 만져 볼 수 있는 복으로서 응답할 것입니다. 지금 가정이 평안하고 축복이 임하는 가운데 넉넉한 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여기에서 머물러 내가 신앙적인 침체상태에 있으면 어서 근신하여 광야와 포로기의 고난이 임하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 역시 영적인 침체 상태에 있으면 언제 광야의 고난과 포로기의 수난이 임할는 지 모릅니다.
중세의 사제들이 타락한 이유는 더 이상 올라가야 할 서품이 없어졌고 자기 갱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님의 화선언을 받은 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부할 만큼 했고 사회적 입지를 얻었다고 해서 만족할 것이 아닙니다. 매일 자신을 돌아보아 광야와 포로기의 수난이 다시 임하지 않도록 늘 겸손하고 순종하고 온유한 자로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니라. 그 땅은 엉겅퀴와 기사니무를 내지 않는 더 이상의 고난이나 질병과 죽음이 없는 빛가운데 있는 영원한 약속의 땅, 새 하늘이 있는 새 땅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온유한 자에게 새 땅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너무 이세상의 땅에 관심을 두지 맙시다. 우리는 갖고있음으로 해서 점점 잃어버리는 쪽으로 가지말고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약속의 땅을 얻기 위해서 한걸음씩 전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공을 차고 있지 않은 때는 축구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있는 때입니다. 내가 축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있지 않은 때는 축구에 대하여 생각하는 때입니다. 나는 축구 외에 말해 본 일도 생각해 본일 도 없습니다.” 이정도 되면 축구에 미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브라질의 젊은이들은 라이트를 켜놓고 밤새도록 축구를 한다고 합니다. 국민들이 사실상 축구에 미쳐있습니다.
땅에 집착한 이스라엘
오늘 본문은 푸스카스처럼 걸어가지 않고 쉬는 때는 땅에 대하여 얘기하고 땅에 대하여 얘기하지 않은 때는 땅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때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온전히 일생의 모든 삶이 땅에 사로잡혀 있는 민족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팔레스틴 난민이 차지하고 있는 옛 블레셋 영토를 차지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의 땅에 대한 관심과 애착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창세기는 땅의 이야기
1-11장
창세기는 땅과 관련된 두 개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1-11장에 있는 것으로서 땅에 완전히 정착하여 살면서도 추방과 땅의 잃어버림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벨의 사람들은 땅을 잃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사실상 다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나치게 땅을 의지하다가 그 결과로서 땅을 상실하게 되는 것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안전하게 땅에 정착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다시 잃게 만드는 어리석음과 부주의함을 밀도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12-50장
창세기의 또 다른 이야기는 12-50장에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취급하고 있으며 땅을 갖지는 못하였으나 땅을 향해 나아가되 땅 얻음을 확신하면서 사는 삶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땅을 소유한 사람은 상실하는 쪽으로, 상실한 사람은 약속의 땅을 추구하는 쪽으로
즉, 땅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땅의 잃어버림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땅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 땅 얻을 것을 확신하면서 약속의 땅을 추구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처음부터 이렇다 할 만한 땅을 갖지 못한 유목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땅을 갖고 있지는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다는 의식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약속들의 본질은 땅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자리를 잡는 것이요, 야훼께서 인도하시는 그 곳에서 안전을 보증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여정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땅으로 가는 순례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에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강력하게 냉정하게 정든 고향을 떠나라고 촉구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길은 자기가 처해있던 정든 옛자리를 떠나는 것과 현재의 땅 없음을 신앙의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땅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였습니다. 순례자는 약속 때문에 어딘가에 속하거나 정착하지 못하면서 언젠가는 영원히 정착할 날을 기다리면서 약속의 땅을 향하여 발이 닳도록 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저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집” 하면서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살면서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드디어 안전한 땅에 거하게 되어 아브라함과 이삭은 거기서 거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안정된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착각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그러나 훗날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바람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대는 애굽으로 옮겨 갑니다. 그래서 야곱의 식구들이 요셉을 따라가게 됨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번성하게 됩니다. 그 땅은 그들이 마치 약속의 땅으로 착각한 땅이었습니다. 물자가 풍성하고 문화가 발달하고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문화와 종교는 다르지만 그런대로 살만은 했습니다. 그 땅이 이집트 즉, 애굽이었습니다. 여기는 편안하고 안정된 땅이었습니다.
누구도 떠나고 싶지 않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바로의 압정이 시작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의미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땅이 안전하고 내 집이 이만하면 안전하다 고 할 때 이미 나도 모르게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종교성이 상실되고 의식주에만 급급한 나머지 민족의 정체성까지 상실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전하고 편안할 때가 가장 어렵고 두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고난의 시작의 예고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출애굽 시켜 아브라함에게 제시했던 땅으로 데려가고자 원했던 것입니다. 약속의 자손은 그가 아무리 부유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애굽의 폭정같은 고난을 주어서라도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순례자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제는 광야로의 출애굽의 기쁨도 잠시잠간, 광야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약속의 땅과 애굽의 땅
차라리 노예생활을 해도 고기가 많고 물이 많은 옛 땅인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간다는 기대에 부풀어 순례자로 자처하여 소망과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날이갈수록 거세어지는 배고픔과 갈증, 추위, 짐승의 위험 때문에 기대와 약속을 상실하고 애굽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집트는 노예의 신분을 강요하는 곳이면서도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충분한 자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랑자와 순례자
이제 그들은 순례자가 아니라 유랑자로서 꿈도 기대도 없이 하루하루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유랑자로서의 삶을 산 사람들은 한 명도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단지 순례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교훈을 얻게됩니다.
같은 신앙공동체라도 어떤 사람은 순례자로서의 삶을 자처하고 늘 약 속의 땅을 기대하면서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이 애착하지 않고 하루하루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같은 교인인데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이나 땅에 대한 전혀 기대 없이 오늘도 타성적인 예배에 습관화 되어 있고, 건물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관습에만 이끌려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순례자가 아닌 유랑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례자와 유랑자를 구분하기 위해서 광야의 고난을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랑자가 아닌 순례지로서 즐겁고 풍요한 세상과도 같은 안전한 이집트를 버리고 죽음과도 같은 광야를 선택할 때 메추라기와 만나와 생수 나오는 바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불경기 일때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방법을 택하지 않고 어렵지만 신앙적인 방법을 선택할 때 거기에서 샘물이 나오는 법입니다. 순례자는 때로는 모험이 있어야 하고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인위적인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보게됩니다.
모든 일을 할 때 잔수를 쓰는 유랑자의 방법을 택하지 말고 힘들더라도 순례자의 방법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사람들은 약속의 땅을 행하여 나아가고 있는 순례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유랑자는 희망이 없고 꿈이 없고 오늘 하루의 만나와 메추라기에 만족하고 저택에 앉아서 평안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유랑자들은 광야 생활에서도 계속 떡과 고기를 요구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을 알 것이요,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떡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떡을 주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영광만 보라고 말씁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만 가르쳐 줄 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개인적으로 어려울 때 떡만을 요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랑자는 떡만을 요구하지만 순례자는 비록 가난하고 허스름한 집일지라도 희망과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약속의 땅에 푯대를 걸고 선한 싸움을 마칠 때까지 하나님의 임재를 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나안, 약속의 땅인가? 심판의 땅인가?
가나안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이 실현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 광야에서 볼 수 없었던 풍부한 물자와 기름진 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결과제인 이방민족들을 우선 멸하고 신앙적인 삶을 시작해야 했는데 그들은 너무 많은 복에 겨워 나태와 안일에 빠집니다. 이방여인과 음행하고 이방신을 믿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문젯거리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도 자기가 관리할 능력이 없으면 그것은 약속이 화로서 작용합니다. 교회도 관리할 능력이 없으면 화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이는 분규교회에 잘 나타납니다. 건물이 복이 아니라 화로서 작용하게 됩니다.
그것은 솔로몬에게서도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지혜와 모든 부귀영화를 주자 그 축복을 감당하지 못하여 그는 결국 나라를 둘로 나뉘게 하는 장본인이 됩니다. 둘로 나눠지는 교회들도 하나님의 복을 감당하지 못해서 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비일비재하게 나타납니다. 어떤 약속을 이루기까지 우리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주님께 매달립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그러나 복이 임한 후의 우리의 신앙자세는 달라집니다. ”내 뜻대로 살기로 했네“ 일단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복을 많이 받아 십일조가 늘자 십일조 생활을 게을리 하게 되기도 하고 교회의 공예배에도 사업상 빠지게 되기도 합니다. 자식이 대학에 들어가면 40일 작정 새벽기도는 끝이 나고 더 이상 새벽기도에 안나옵니다.
약속의 땅 감당하지 못할 때 땅 상실의 역사가 시작
교회에서도 평신도나 서리집사때는 순수한 열정으로 열심히 하였는데 그 사실이 인정받아 항존직으로 되었을 경우, 그 때부터 믿음의 쇠퇴와 주님을 처음 만났던 열정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다시 땅 상실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또한 물질적으로 어느정도 정착해서 살만하니 신앙적인 나태가 시작이 됩니다. 어느듯 교회생활은 내면의 깊은 감격이 없는 습관화된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광야의 고통이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포로기의 고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전은 다시 불안으로, 생명은 죽음으로, 기쁨은 슬픔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이라는 땅을 신앙으로 감당하지 못하자 하나님은 다시 그들에게 땅을 상실케합니다. 우리도 어렵게 얻은 땅을 대한예수교 장로회 27차 총회를 통해서 신사참배 가결이라는 수치스런 결정 때문에 다시 공산주의의 치하에 밟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땅을 빼앗습니다. “우리가 바벨론 강가에서 울었도다”고 시편기자는 기술합니다. 그리이스출신 가수 나나무스크리가 부르는 자유의 노래(a song of liberty) 는 시편 137편을 노래한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복을 신앙으로 감당하지 못했을 경우, 그 축복을 상실시키는 방법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바사와 고레스를 통해서 스룹바벨과 에스라 느헤미야를 인도자로 내세워 땅을 다시 찾을 수 있게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진정한 땅은 가나안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그것은 새 약속에 의한 땅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새 가나안을 기다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헌 땅을 되찾고 수호하기 위하여 로마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더니 다시 추방당하게 됩니다. 예수가 오셨습니다. 옛 땅의 개념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새 땅을 선포합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가난한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들이 추구하던 땅과는 너무 거리가 멉니다. 온유한 자가 들어가는 땅입니다. 처음에 결혼하면 남자가 마치 모든 땅이 다 자기의 것인 것 처럼 행동합니다. “밥 가져와” 하고 소리칩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 식사 같이 합시다”, 좀더 나이가 들면 눈치를 보면서 자기가 부엌상을 차리는 시늉을 합니다. 그러면 아내가 와서 밥을 차려주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우리는 너무 이 세상의 땅에 정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땅이 비록 적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곳이면 거기가 예배처요,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는 곳이면 산이라 할지라도 거룩한 곳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계신 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에게는 고난이 임하고 있습니까? 약속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언젠가 현실적으로 만져 볼 수 있는 복으로서 응답할 것입니다. 지금 가정이 평안하고 축복이 임하는 가운데 넉넉한 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여기에서 머물러 내가 신앙적인 침체상태에 있으면 어서 근신하여 광야와 포로기의 고난이 임하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 역시 영적인 침체 상태에 있으면 언제 광야의 고난과 포로기의 수난이 임할는 지 모릅니다.
중세의 사제들이 타락한 이유는 더 이상 올라가야 할 서품이 없어졌고 자기 갱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님의 화선언을 받은 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부할 만큼 했고 사회적 입지를 얻었다고 해서 만족할 것이 아닙니다. 매일 자신을 돌아보아 광야와 포로기의 수난이 다시 임하지 않도록 늘 겸손하고 순종하고 온유한 자로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니라. 그 땅은 엉겅퀴와 기사니무를 내지 않는 더 이상의 고난이나 질병과 죽음이 없는 빛가운데 있는 영원한 약속의 땅, 새 하늘이 있는 새 땅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온유한 자에게 새 땅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너무 이세상의 땅에 관심을 두지 맙시다. 우리는 갖고있음으로 해서 점점 잃어버리는 쪽으로 가지말고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약속의 땅을 얻기 위해서 한걸음씩 전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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