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안에서 모두 하나
오늘의 중동분쟁은 성경을 통해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먼 옛날 아브라함의 시대에까지 거슬러 갑니다. 오늘의 사건의 원인은 종교적인 문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갈의 자손과 사라의 자손은 다같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오늘날 아랍지역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후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중동분쟁은 근원부터 해석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두 민족의 서로의 상이성과 대조와는 달리 그들의 조상들에게 있어서는 공통점이 여러 가지 있다는 사실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갈의 삶속에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의 삶이 예표적으로 나타나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첫째로 한 민족의 장래에 대한 예표적인 상황이 있습니다 (하갈과 이스라엘민족).
어느날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자 성급한 인간은 14년 미리 앞당겨 인위적으로 약속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육의 자손을 미리 만들게 되는 데서부터 비극이 비롯됩니다. 사라는 그의 종 하갈을 통해서 약속의 자손이 태어날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갈이 아브라함의 아기를 잉태하자 사라가 시기하여 하갈을 광야로 내쫏습니다. 그러자 광야에 있는 샘물 옆에서 하갈이 하나님의 사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네씨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복의 선언과 함께 가나안에 있는 아브라함한테 다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와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자기 이복 동생인 이삭을 괴롭히자 사라는 다시 시기하여 아브라함한테 하갈을 쫏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할 수없이 기도한 다음에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쫏아냅니다. 여기서 하갈은 물이 없어 모자가 광야에서 죽게되었다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간구를 듣고 물을 발견하게 합니다. 그 물을 먹고 그들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갑니다. 그 이후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축복하사 12방백을 낳게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이요 그 족속대로는 십이 방백이었더라(창25:16)
이 사건은 약 500-600년 후에 이스라엘 국가에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왕한테 쫏기다 시피 해서 광야로 나갑니다. 거기서 그들에게 물이 없어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바위를 통해서 물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 복지로 행했습니다. 이미 그들의 삶이 하갈을 통해서 500-600년 전에 미리 예표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둘째로 12자손과 경제적 축복의 예표적인 상황(60-70년후)이 있습니다 (이스마엘과 야곱).
하갈의 자손들도 이스라엘의 자손들 처럼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12방백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자손을 이어나가게끔 합니다. 이스마엘 처럼 한 세대 후인 야곱(이스라엘) 역시 12자손을 낳아 이스라엘의 민족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 것 역시 예표적으로 미리 이스마엘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도 이스마엘 자손들 처럼 모두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힘없는 야곱의 자손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어나갑니다.
이 외에도 두 민족이 경제적 복을 받습니다. 실제로 경제적 축복은 이스라엘과 중동이 많이 받았습니다. 중동은 유전을 점령하고 유대인은 미국의 상권을 거뭐쥡니다. 그래서 미국의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한 것은 중동이 유대인의 상권을 공격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계속 지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미국의 부를 유대인이 점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의 삶은 자손의 축복이나 경제적 축복이 이미 이스마엘의 삶속에 예시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갈등이 예표적으로 나타납니다(이스마엘과 이삭).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스마엘과 이삭은 아버지는 같은데 어머니가 달라서 갈등을 일으킵니다. 즉 노예의 자손과 약속의 자손과의 갈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4장에서 그렇게 보고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같은 약속의 자손인 이삭의 자녀들끼리 다시 갈등을 일으킵니다. 약속의 자손내에서의 갈등입니다. 여기서 분명 야곱만이 약속의 자손이라고 성서는 언급합니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중에서 버림받는 자손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육체적 약속의 자손에서 버림받는 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육체적 약속의 자손에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갈등입니다. 이러한 갈등은 이미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과 사라 아들인 이삭의 갈등에서 미리 예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미 민족적 축복, 형제의 갈등, 광야에서의 고난, 물발견, 가나안 복지 입성에 들어간 것이 하갈과 이스마엘 한테 다 예표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아랍제국과 이스라엘 갈등의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아랍의 어머니인 하갈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장래가 미리 예표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한 육체의 자손의 삶속에 약속의 자손들의 삶이 스며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더나아가 진정한 영적인 자손들인 우리에게까지 미리 예표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의 고난과 물발견, 가나안 입성은 우리 신자들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면서 늘 목이 말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이 물을 마셔야만 겨우 힘을 내어 가나안을 향하여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요즈음 같이 불경기일 때는 우리가 얼마나 목이 마릅니까? 하갈처럼 하나님이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어 늘 부르짓는 인생들인 것입니다.
하갈의 자손과 사라의 자손은 서로 사랑해야
그러므로 하갈의 자손과 사라의 자손은 둘 다 사랑해야할 대상이지 원수지간으로 지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같은 아버지의 형제들입니다. 육의 자손 에서와 약속의 자손 야곱의 화해는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과 이삭은 어렸을 때는 싸웠을는지도 모르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이 돌아갈 때까지 한 집에서 같이 삽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가 죽기 전에 아들 이삭에게도 자기 모든 소유를 주고 자기 사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창25:5). 그리고 이스마엘은 이삭과 같이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을 때 장사를 합니다.
창 25장 8절-9절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 하였으니"
적어도 그들이 75년동안 한 집에서 같이 삽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같이 힘을 합해서 장사를 지냅니다. 서로 안 맞았거나 싫었으면 벌써 떠났을 것입니다. 이것은 약속의 자손과 육의 자손들의 화해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같은 아버지에게서 난 자손들이 갈등을 극복하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화해를 해서 오래동안 같이 삽니다. 같은 어머니로부터 난 자손이 세월이 지난 다음에 얍복강의 하나님의 사자의 축복으로 인해 화해를 합니다.
같은 아버지로부터 난 자손들 화해해야
이제는 같은 아버지로부터 난 자손들이 화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사건을 보면 멀리 아라비아(아랍)에서 온 사람들도 방언의 체험을 경험하며 성령안에서 하나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런 것을 보았을 때 육의 자손은 그렇게 의미가 없고 성령안에서 하나되는 영의 자손이 의미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세계는 육의 자손들끼리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했습니다.
하나의 영안에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청교도의 자손들 역시 육의 자손들과 화해를 해야합니다. 미국은 아랍은 무시하고 이스라엘만 위하는 편협한 정책을 수행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라크의 침공으로 미국은 서브프라임모기지사건을 불러들여 제 2의 경제공황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이라크를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청교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둔 이스마엘의 자손들이나 이삭의 자손들 모두를 믿음의 조상의 자손이라 동등하게 생각하고 균등한 정책을 행해야 하고 육적인 방법론 가지고 접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노예의 자손들끼리 싸울 필요없어
결론적으로 두 민족이 현재로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영적으로는 노예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노예들끼리 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랍사람들은 영적, 육적으로 노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적으로 노예입니다. 그래서 세계평화를 위하여 노예로 있는 동안이라도 서로 사랑하고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의 혈연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받아들이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도록 시간을 벌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죽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두 민족이 너무나도 혈연과 육적인 예루살렘의 영토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갈등이 끊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에서 사도바울이 지적하는 것입니다.
바울, 이스라엘은 영적으로는 하갈의 자손
두 민족은 육적으로는 축복을 받았다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모두 하갈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즉 노예의 자손인 셈입니다. 즉 신앙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아브라함의 혈연적인 자손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윗왕과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혈연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실때까지의 족보를 보면 그들의 족보에는 있어서는 안될 이방의 죄인인 여인들까지 포함되어있습니다. 창녀도 포함되어있습니다. 간음한 여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족보는 의미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즉 육의 자손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약속의 자손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육적인 자손을 중요시하고 본처의 후손을 자랑하니 중동 사람들이 열 받는 것입니다. 한국인들 처럼 이스라엘사람들은 족보를 꽤나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족보를 헌신짝 버리듯 버린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의 핵심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평생은 혈연과 형식, 외적인 것의 가열찬 투쟁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한 해석에서 육체의 자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의 눈으로 보기에는 하갈 자손이나 이스라엘 자손이나 똑같이 보는 것이지요. 바울의 개념은 육의 자손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지요. 갈라디아 4:25절에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서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고.....라고 쓰고있습니다.
바울이 보는 바에는 하갈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가 없는 종의 복음, 노예의 복음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은 하갈 처럼 노예인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노예인데 노예끼리 싸움을 하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예수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육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싸울 건덕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혈연이요, 한 형제이며, 모두 12방백을 조상으로 두고 있는 자손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서로 형제들끼리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갈과 함께 하겠다고 언급한 말씀이 나옵니다. 부르기만 하면 하나님은 노예에게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예의 축복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노예보다도 못한 기생입니다.
바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온 혈족이 아니라 노예나 이방인, 죄인이라할지라도 아브라함의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즉 죽은 여자의 몸에서 경수가 다시 나와서 생기있는 몸으로 살아나 새 생명을 잉태시킬 수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육체적 후손이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믿음의 후손이 약속의 자녀
그래서 육체적 후손이 약속의 자손이 아니라 믿음의 후손이 약속의 자손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적으로 하갈 자손이라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면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육체적으로는 약속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지 않으면 즉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난 것을 믿지 않는다면 하갈과 같은 노예의 자손인 것입니다.
어차피 그들은 육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에 싸울 명분도 없는 것입니다. 미국 역시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아랍에도에도 많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잠재적인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무고한 백성이 희생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본인들이 청교도의 후손이라 생각하지만 청교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면 청교도의 후손이 아닌 것입니다. 육적인 후손은 신앙적인 관점에서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미국은 청교도들의 신앙처럼 형제를 서로 사랑하고 포용하는 자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희생을 당했지만 이번기회에 육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청교도들 처럼 의로 여긴 바 된 아브라함의 믿음을 받아들이게끔 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적인 화해요 세계평화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검에는 검, 폭력에는 폭력으로 나가면 청교도의 말기처럼 율법주의로 빠지는 것이지요. 율법주의로 빠지면 똑같이 종의 복음, 노예의 복음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무력을 가해 무고한 인민들을 죽이면 그들 역시 하갈의 자손인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는 종교를 포장으로 해서 모두 육적인 노예들과의 싸움을 벌이는 것이 되는 셈입니다. 물론 테러를 비호하거나 테러를 일으킨 사람들은 마땅히 처벌되어야 하지만 무고한 시민들까지 죽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 전통과 종교, 인종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싸움은 잘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는 대권경쟁과 같은 서로 의미없이 주도권 잡기 싸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는 청교도의 정신을 가진 미국이 노예의 복음인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고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중동에 아직도 남아있는, 즉 선교의 대상이 되고있는 아랍인들을 포함하는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대한 희생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동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넓은 도량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도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영적인 후손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변화는 그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영의 사람이 되어야하고 외적이고 육적인 것에 치우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가족 중심주의, 혈연중심주의, 같은 신앙노선 주의 등은 모두 노예의 자손들이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 하늘의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교회들이 물질적인 조건때문에 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약속의 자손이 아니라 육의 자손들이 하는 양태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떠나고 양보하고 남을 배려하고, 화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살펴보았지만 하갈안에 이스라엘의 예표적인 삶이 들어있고, 이스라엘 집안에 하갈이 있습니다. 성경은 원수도 적도 없고 모두 한 핏줄 자손, 가족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대측 모두 하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국교회는 서로 특정 지지목사가 다르다고 해서 원수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볼 때 하갈안에 이스라엘이 있고 이스라엘안에 하갈이 있듯이 원수도 적도 그리스도안에서 모두 하나이며 친구입니다. 예수안에는 사마리아여성이 있었고, 그 여인안에는 예수가 있었습니다. 특정지지자들, 반대지지자들 모두 그리스도안에서 사랑의 대상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잔류측안에 이탈측이 있고, 이탈측안에 잔류측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정교회에서 잔류측과 이탈측은 서로 원수의 대상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들입니다.
첫째로 한 민족의 장래에 대한 예표적인 상황이 있습니다 (하갈과 이스라엘민족).
어느날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자 성급한 인간은 14년 미리 앞당겨 인위적으로 약속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육의 자손을 미리 만들게 되는 데서부터 비극이 비롯됩니다. 사라는 그의 종 하갈을 통해서 약속의 자손이 태어날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갈이 아브라함의 아기를 잉태하자 사라가 시기하여 하갈을 광야로 내쫏습니다. 그러자 광야에 있는 샘물 옆에서 하갈이 하나님의 사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네씨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복의 선언과 함께 가나안에 있는 아브라함한테 다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와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자기 이복 동생인 이삭을 괴롭히자 사라는 다시 시기하여 아브라함한테 하갈을 쫏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할 수없이 기도한 다음에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쫏아냅니다. 여기서 하갈은 물이 없어 모자가 광야에서 죽게되었다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간구를 듣고 물을 발견하게 합니다. 그 물을 먹고 그들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갑니다. 그 이후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축복하사 12방백을 낳게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이요 그 족속대로는 십이 방백이었더라(창25:16)
이 사건은 약 500-600년 후에 이스라엘 국가에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왕한테 쫏기다 시피 해서 광야로 나갑니다. 거기서 그들에게 물이 없어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바위를 통해서 물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 복지로 행했습니다. 이미 그들의 삶이 하갈을 통해서 500-600년 전에 미리 예표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둘째로 12자손과 경제적 축복의 예표적인 상황(60-70년후)이 있습니다 (이스마엘과 야곱).
하갈의 자손들도 이스라엘의 자손들 처럼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12방백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자손을 이어나가게끔 합니다. 이스마엘 처럼 한 세대 후인 야곱(이스라엘) 역시 12자손을 낳아 이스라엘의 민족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 것 역시 예표적으로 미리 이스마엘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도 이스마엘 자손들 처럼 모두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힘없는 야곱의 자손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어나갑니다.
이 외에도 두 민족이 경제적 복을 받습니다. 실제로 경제적 축복은 이스라엘과 중동이 많이 받았습니다. 중동은 유전을 점령하고 유대인은 미국의 상권을 거뭐쥡니다. 그래서 미국의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한 것은 중동이 유대인의 상권을 공격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계속 지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미국의 부를 유대인이 점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의 삶은 자손의 축복이나 경제적 축복이 이미 이스마엘의 삶속에 예시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갈등이 예표적으로 나타납니다(이스마엘과 이삭).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스마엘과 이삭은 아버지는 같은데 어머니가 달라서 갈등을 일으킵니다. 즉 노예의 자손과 약속의 자손과의 갈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4장에서 그렇게 보고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같은 약속의 자손인 이삭의 자녀들끼리 다시 갈등을 일으킵니다. 약속의 자손내에서의 갈등입니다. 여기서 분명 야곱만이 약속의 자손이라고 성서는 언급합니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중에서 버림받는 자손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육체적 약속의 자손에서 버림받는 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육체적 약속의 자손에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갈등입니다. 이러한 갈등은 이미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과 사라 아들인 이삭의 갈등에서 미리 예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미 민족적 축복, 형제의 갈등, 광야에서의 고난, 물발견, 가나안 복지 입성에 들어간 것이 하갈과 이스마엘 한테 다 예표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아랍제국과 이스라엘 갈등의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아랍의 어머니인 하갈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장래가 미리 예표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한 육체의 자손의 삶속에 약속의 자손들의 삶이 스며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더나아가 진정한 영적인 자손들인 우리에게까지 미리 예표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의 고난과 물발견, 가나안 입성은 우리 신자들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면서 늘 목이 말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이 물을 마셔야만 겨우 힘을 내어 가나안을 향하여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요즈음 같이 불경기일 때는 우리가 얼마나 목이 마릅니까? 하갈처럼 하나님이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어 늘 부르짓는 인생들인 것입니다.
하갈의 자손과 사라의 자손은 서로 사랑해야
그러므로 하갈의 자손과 사라의 자손은 둘 다 사랑해야할 대상이지 원수지간으로 지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같은 아버지의 형제들입니다. 육의 자손 에서와 약속의 자손 야곱의 화해는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과 이삭은 어렸을 때는 싸웠을는지도 모르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이 돌아갈 때까지 한 집에서 같이 삽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가 죽기 전에 아들 이삭에게도 자기 모든 소유를 주고 자기 사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창25:5). 그리고 이스마엘은 이삭과 같이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을 때 장사를 합니다.
창 25장 8절-9절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 하였으니"
적어도 그들이 75년동안 한 집에서 같이 삽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같이 힘을 합해서 장사를 지냅니다. 서로 안 맞았거나 싫었으면 벌써 떠났을 것입니다. 이것은 약속의 자손과 육의 자손들의 화해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같은 아버지에게서 난 자손들이 갈등을 극복하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화해를 해서 오래동안 같이 삽니다. 같은 어머니로부터 난 자손이 세월이 지난 다음에 얍복강의 하나님의 사자의 축복으로 인해 화해를 합니다.
같은 아버지로부터 난 자손들 화해해야
이제는 같은 아버지로부터 난 자손들이 화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사건을 보면 멀리 아라비아(아랍)에서 온 사람들도 방언의 체험을 경험하며 성령안에서 하나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런 것을 보았을 때 육의 자손은 그렇게 의미가 없고 성령안에서 하나되는 영의 자손이 의미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세계는 육의 자손들끼리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했습니다.
하나의 영안에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청교도의 자손들 역시 육의 자손들과 화해를 해야합니다. 미국은 아랍은 무시하고 이스라엘만 위하는 편협한 정책을 수행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라크의 침공으로 미국은 서브프라임모기지사건을 불러들여 제 2의 경제공황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이라크를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청교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둔 이스마엘의 자손들이나 이삭의 자손들 모두를 믿음의 조상의 자손이라 동등하게 생각하고 균등한 정책을 행해야 하고 육적인 방법론 가지고 접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노예의 자손들끼리 싸울 필요없어
결론적으로 두 민족이 현재로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영적으로는 노예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노예들끼리 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랍사람들은 영적, 육적으로 노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적으로 노예입니다. 그래서 세계평화를 위하여 노예로 있는 동안이라도 서로 사랑하고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의 혈연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받아들이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도록 시간을 벌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죽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두 민족이 너무나도 혈연과 육적인 예루살렘의 영토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갈등이 끊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에서 사도바울이 지적하는 것입니다.
바울, 이스라엘은 영적으로는 하갈의 자손
두 민족은 육적으로는 축복을 받았다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모두 하갈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즉 노예의 자손인 셈입니다. 즉 신앙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아브라함의 혈연적인 자손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윗왕과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혈연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실때까지의 족보를 보면 그들의 족보에는 있어서는 안될 이방의 죄인인 여인들까지 포함되어있습니다. 창녀도 포함되어있습니다. 간음한 여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족보는 의미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즉 육의 자손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약속의 자손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육적인 자손을 중요시하고 본처의 후손을 자랑하니 중동 사람들이 열 받는 것입니다. 한국인들 처럼 이스라엘사람들은 족보를 꽤나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족보를 헌신짝 버리듯 버린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의 핵심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평생은 혈연과 형식, 외적인 것의 가열찬 투쟁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한 해석에서 육체의 자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의 눈으로 보기에는 하갈 자손이나 이스라엘 자손이나 똑같이 보는 것이지요. 바울의 개념은 육의 자손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지요. 갈라디아 4:25절에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서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고.....라고 쓰고있습니다.
바울이 보는 바에는 하갈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가 없는 종의 복음, 노예의 복음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은 하갈 처럼 노예인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노예인데 노예끼리 싸움을 하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예수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육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싸울 건덕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혈연이요, 한 형제이며, 모두 12방백을 조상으로 두고 있는 자손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서로 형제들끼리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갈과 함께 하겠다고 언급한 말씀이 나옵니다. 부르기만 하면 하나님은 노예에게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예의 축복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노예보다도 못한 기생입니다.
바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온 혈족이 아니라 노예나 이방인, 죄인이라할지라도 아브라함의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즉 죽은 여자의 몸에서 경수가 다시 나와서 생기있는 몸으로 살아나 새 생명을 잉태시킬 수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육체적 후손이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믿음의 후손이 약속의 자녀
그래서 육체적 후손이 약속의 자손이 아니라 믿음의 후손이 약속의 자손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적으로 하갈 자손이라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면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육체적으로는 약속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지 않으면 즉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난 것을 믿지 않는다면 하갈과 같은 노예의 자손인 것입니다.
어차피 그들은 육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에 싸울 명분도 없는 것입니다. 미국 역시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아랍에도에도 많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잠재적인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무고한 백성이 희생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본인들이 청교도의 후손이라 생각하지만 청교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면 청교도의 후손이 아닌 것입니다. 육적인 후손은 신앙적인 관점에서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미국은 청교도들의 신앙처럼 형제를 서로 사랑하고 포용하는 자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희생을 당했지만 이번기회에 육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청교도들 처럼 의로 여긴 바 된 아브라함의 믿음을 받아들이게끔 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적인 화해요 세계평화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검에는 검, 폭력에는 폭력으로 나가면 청교도의 말기처럼 율법주의로 빠지는 것이지요. 율법주의로 빠지면 똑같이 종의 복음, 노예의 복음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무력을 가해 무고한 인민들을 죽이면 그들 역시 하갈의 자손인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는 종교를 포장으로 해서 모두 육적인 노예들과의 싸움을 벌이는 것이 되는 셈입니다. 물론 테러를 비호하거나 테러를 일으킨 사람들은 마땅히 처벌되어야 하지만 무고한 시민들까지 죽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 전통과 종교, 인종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싸움은 잘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는 대권경쟁과 같은 서로 의미없이 주도권 잡기 싸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는 청교도의 정신을 가진 미국이 노예의 복음인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고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중동에 아직도 남아있는, 즉 선교의 대상이 되고있는 아랍인들을 포함하는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대한 희생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동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넓은 도량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도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영적인 후손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변화는 그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영의 사람이 되어야하고 외적이고 육적인 것에 치우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가족 중심주의, 혈연중심주의, 같은 신앙노선 주의 등은 모두 노예의 자손들이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 하늘의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교회들이 물질적인 조건때문에 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약속의 자손이 아니라 육의 자손들이 하는 양태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떠나고 양보하고 남을 배려하고, 화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살펴보았지만 하갈안에 이스라엘의 예표적인 삶이 들어있고, 이스라엘 집안에 하갈이 있습니다. 성경은 원수도 적도 없고 모두 한 핏줄 자손, 가족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대측 모두 하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국교회는 서로 특정 지지목사가 다르다고 해서 원수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볼 때 하갈안에 이스라엘이 있고 이스라엘안에 하갈이 있듯이 원수도 적도 그리스도안에서 모두 하나이며 친구입니다. 예수안에는 사마리아여성이 있었고, 그 여인안에는 예수가 있었습니다. 특정지지자들, 반대지지자들 모두 그리스도안에서 사랑의 대상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잔류측안에 이탈측이 있고, 이탈측안에 잔류측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정교회에서 잔류측과 이탈측은 서로 원수의 대상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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