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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교수의 지성에서 영성으로

  • 홍영일
  • 입력 2010.12.30 0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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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이 눈이 낫게 되면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겠습니다
인간 논리에 맞는 이야기만 한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습니까?
 
“절대로 신을 믿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이 신앙을 가지니까 뉴스가 되는 거지요.
이 글은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그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에게 바치고자 합니다.”
 
자타가 공인인 하는 지성인 이어령 교수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지성이 헛수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성을 설명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치 모세가 바로 궁전에서 배운 학식이 결국 살인사건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데 그간에 배운 학식이 사용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성과 영성은 별개의 차원이 아니라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이어령 교수가 세례를 받은 일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세례를 받고 나서의 이어령 교수가 전하는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다. 이 책에도 저자의 날카로운 안목과 논설은 여전히 전개 되지만 그 중 몇 가지를 추려 적어 본다. 독후감이라기보다 저자의 생각이 담긴 글의 일부분을 발췌하였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쓰레기가 쌓여가는 내 방을 빛과 향기로 채우기 위해서

영혼의 무게가 1.25온스(35.4g)랍니다. 죽음 직전의 사람의 무게를 비교해서 줄어든 무게를 알아냈다고 합니다. 영혼을 저울로 달아보는 과학자들의 어리석음에 분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물건을 많이 들여놓을수록 내 몸이 쉴 빈자리는 그만큼 사라지게 된다는 평범한 상식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방을 가득 채우고도 나를 구속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빛이고 향기이고 바람과 같은 공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빛과 향기와 공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은 영혼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면 만족입니다. 빛의 무게, 공기의 무게, 영혼의 무게는 그냥 가벼운 것이 아니라 하늘로 상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대목을 감상해 보십시오.
창조는 만족이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아주 짧은 한마디 말이지만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창조물에 대한 감상법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힘이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창조력입니다. ‘메멘트 모리’(Memento Mori )라는 말은 ‘죽음을 생각하라.’ ‘죽는다는 것을 잘 생각하며 살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들이 돌을 쌓아 천 년 가는 성과 도읍을 세우는 까닭은 생병이 쉬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죽음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을 눈치챈 그때부터 나의 곁에는 하나님께서 계셨던 것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 모든 창조는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글들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독이 들어 있는 버섯인지도 모릅니다.
 
지진이 나도 흔들리지 않는 집을, 내 영혼의 집을 짓게 하소서

사랑은 말로 몸짓으로 나타나지만, 정은 조용히 지열처럼 자신도 모르게 맨 밑바닥에서부터 타오릅니다. 누군가 가까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 자기 병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병을 앓게 되면 자신이 혼자인지 아니면 남과 함께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결국, 종교와 가까운 것이, 인간이 종교에 다가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병에는 종교의 광맥이 묻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물이 흘러야 영혼의 무지개가 생깁니다. 실제로 새끼를 낳아놓고서도 간혹 돌보지 않는 모성애가 없는 이기적인 낙타가 있다고 합니다. 이럴 때 몽골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런 배정한 어미를 다스리는 비법으로 음악을 들려준다고 합니다. 마두금이라는 연주에 맞춰 할머니가 다정다감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구슬픈 노래를 부르면 낙타가 울게 되고, 눈물을 흘린 낙타는 모성애가 되돌아와 새끼에게 젖을 먹이게 된다고 합니다. 찬송가를 한 번 부르는 것은 기도를 백 번 하는 것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손뼉을 치면서 노래할 때 제일 먼저 찾아오는 변화가 바로 초월적인 감동입니다.

리더가 누군가를 이끌어 가려면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영혼을 일깨워서 눈물을 쏟아나게 해야 합니다. 비가 와야 무지개가 돋는 것처럼 눈물이 흘러야 영혼에 무지개가 생깁니다.
지도자는 엄격히 말해서 리더가 아니라 매니저라고 해야 옳습니다. 예수님처럼 무리 가운데 늘 함께하는 그러나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리더들을 존경하게 됩니다. 섬김의 지도자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진정한 업그레이드된 지도자들은 섬기는 것도 모르게 섬기는 자이어야 할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한 손은 주먹을 쥐고 한 손은 손바닥을 펴 보이고 있습니다. 정의의 손과 사랑의 손, 이것이 결합하여 후광이 퍼져 나가는 모습이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만두를 맛있게 먹으려면 통째로 씹어 먹어야 한다.

세례를 받기로 결심한 뒤에 많은 고민을 했지만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만두를 통째로 먹어야 한다는 평범한 상식을 받아 드리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만두를 먹을 때 껍질 따로 만두 속 따로 먹지 않습니다. 통째로 입안에 넣고 씹어 먹습니다. 그동안 나는 만두 껍질을 벗겨 먹고, 속을 먹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속 하나하나의 재료를 구분해서 맛을 분석해서 먹으려 했지요. 복합적인 만두 속의 맛을 제대로 씹지 못한 채 평생을 허송했습니다. 종교를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분석하는 데 주력하고 살았습니다. 삶의 맛을 잃고 살았습니다.

종교는 절대로 합리성으로 설명되거나 분석될 수 없는 영성의 세계임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지성이 아니라 영성이 관장하는 세계이고 그 영성은 하늘나라의 빛과 접속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세례란 물로 씻는 의식이 아니라 가슴 깊이 묻혀 있는 온천수의 뜨거운 수맥을 퍼 올리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왜 우는지 세례 받으면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파괴라는 극적인 경험 없이는 영성을 갖기 어렵지요.

십자가 상에서 어머니와 작별하는 예수님은 “여자여, 당신의 아들을 보십시오.”라고 제자들을 가리켰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의 사형장에서 아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아들을 얻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자기의 육신의 어머니만 어머니로 알았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밖에서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누가 나의 어머니이고 나의 형제들이란 말이냐.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 원리는 우선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너에게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너는 그것들을 나보다 더 사랑한다.” 기독교는 애통하고 가난한 것을 복이 있다고 합니다. 나눔, 사랑, 관용 이것만 있으면 대한민국의 앞날은 밝습니다.
이웃은 모든 인간을 뜻합니다.

기독교를 편협하다고 비웃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만을 보고, 레위인만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내가 그 많은 종교 가운데서 기독교를 택한 것은 다른 종교가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불교와 유교는 어렸을 때부터 내 몸 안에 배어 있는 혈액형과도 같은 것이었지요. 다만,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처럼 내 가족, 내 민족, 내 국가를 뛰어넘는 이웃의 사랑,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에게 결핍되어 있는 사실에 눈떴기에 비로소 예수를 나의 주로 영접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제상을 차린 것을 우상숭배라고 생각하지 말고, 성찬식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훨씬 이해가 빠를 거예요. 제상에 차려 놓은 음식을 먹으며 조상의 영을 영접하듯이 그렇게 빵과 포도주를 마시며 예수님을 영접하고 있으니 어찌 마르다와 마리아가 우리를 부러워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모순과 대립을 결합하여 융합하고 조화시키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입니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자식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문화가 다른 종속, 그리고 종교가 다른 이교도에게도 그 상처에 기름을 붓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오늘의 글로벌 시대에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배타적이고 텃세가 심한 문화적 쇄국주의를 녹여 다문화의 시대 글로벌 시대의 한국문화를 이끌어갈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말하는 딸 민아(50세/2010년 기준)

대학 전 과목을 스트레이트 A로, 영문과와 불문학과 복수 전공을 3년 만에 마친 수재중에 수재이다. 영문학을 하겠다고 미국에 유학을 가 석사까지 마치는 날, 법대로 옮겨 졸업 후 단번에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유명한 로펌 회사에 스카우트되어 변호사 생활을 하게 된 것을 기뻐했더니, 여 검사생활을 하다가 다 포기하고 주님 사업에 몰두하는 딸을 원망할 수가 없었다.

불행과 절망 속에서 민아를 위로하고 새 삶으로 인도해 주신 분은 지상의 아버지가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딸 민아의 간증요약)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다르다.
1992년 (32세) 악성 갑상선 암으로 수술을 받았다.
1996년, 1999년 두 차례나 암이 재발하였다

한 친구의 권유로 하용조 목사의 간증을 들었다. 몸이 안 좋아 강대 상에 기대어 설교하시면서 “나의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라는 데 감명을 받아 성경공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2002년까지 둘째 아들이 유치원부터 6학년까지 6년간 특수 자폐증 증상과 과잉행동증상으로 난폭해져서 학교에 다니기 어려울 정도였다. 10년간의 검사직을 사직하였다, (네 자녀의 어머니). ADHD 증후군은 공해로 인해 내분비장애를 일으켜 생겨난다고 해서 공기 좋은 하와이로 오게 되었다.

2006년 망막박리로 7개월간 실명하게 되었다. 

2007년 1월 (이어령 씨의 약속기도) “우리 딸이 눈이 낫게 되면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겠습니다. 남은 생애를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2007년 2월 치유의 기적으로 고침을 받았다. 4개월 후에 아들의 자폐증도 완전히 나았다.
2007.7.23 생일날, 아버지(이어령 박사/73세 때, 2010년 현재 76세)가 세례를 받았다.
2007.8.16 버클리대학을 나와 하버드 법대 가려고 준비 중이던 25세의 장남 유진이가 아무 이유 없이 혼수상태에 빠지더니 9월 5일 하늘나라로 갔다.
 
 엄마보다 더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계신 보좌에 아들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 아들 대신에 부모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을 위한 사역에 헌신하겠습니다. 25년간 모두 그리워하는 아들을 선물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얼마 전 엄마 아빠 이혼하고 힘들었던 기간에 유진이가 흘린 눈물을 다 씻어 주신 줄 믿습니다. 비석에는 “선물로 와서 너무 많은 사랑을 주고 간 아이, 내 아버지 집에 편히 쉬고 있다.”라고 적었습니다.

“제가 사역하는 곳에서는 자기 친아버지 어머니보다 더 의지하고 신앙의 어머니로 알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와서 기도해 달라고 하는 제 아들보다 더 소중한 그런 아이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정말 너무 귀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원하는 말씀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는 부분까지도 진리라는 것을 믿게 하셨습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렘 29:11)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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