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5천 년 역사에 문(文)에는 다산, 무(武)에는 충무공이다.
저자 차 벽은 자기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18년간 유배 생활을 한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고, 또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18년간 살다간 남양주시 조안면 마재에도 자신이 살았던 곳이 인연이 되어, 다산의 삶에 관심을 끌게 되었다고 한다.
다산초당(600권의 저서를 제작한 곳, 다산의 유배생활 기념관)과 다산이 태어나고 무덤이 있는 마재에 이르기까지 다산이 다닌 곳이라면 어디라도 찾아다니며 다산의 후반 36년을 글과 사진으로 남긴 것이다. 그러나 자연히 지난날의 과거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한양대 환경대학원 환경정책과를 수료한 경력과 도자기 사진 전시회 두 번 가진 적이 있다.
다산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신동이었다. 강산 이서구 대감이 책을 지고 가는 다산을 만났을 때 주자가 지은 59권의 ‘자치통감강목’을 열흘 만에 다 읽고 그 내용을 다 외우는 것에 매우 놀랐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기억이 뛰어난 인물이다.
다산이 7살에 지었다는 시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거리의 멂과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다.)을 보아 그의 천재성을 알 수가 있다. 다산은 1762년 6월 16일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에서 아버지 정재원과 해남 윤씨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은 8대 연속 홍문관 학사를 배출한 적이 있는 집안이었고, 외가는 학문과 예술의 집안이었다.
다산은 15세에 풍산 홍씨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22세에 큰형(약현), 작은형(약전)과 함께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의 글을 접하고서 학문의 뜻을 굳게 했다. 처음으로 천주교를 접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쟁이 극에 달했던 때라 당파싸움에 희생되었다. 다산의 큰형 약전은 집안을 지키고, 신해사옥(1791년 최초 가톨릭 박해 사건) 셋째 형 약종(아우구스티노)은 한국 최초의 신학자로 순교를 당하고, 둘째 형 약전과 다산은 목숨은 건졌지만, 유배를 당하게 된 것이다. ‘다산문화 유적지’을 가톨릭에서는 ‘마대성지’라고 부른다.
다산은 18년간의 긴 유배생활에서도 목민심서 등 저술에 힘을 쏟았다. 그의 저술은 당시 조선사회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고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대표적인 저서가 [목민심서]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 목민관(牧民官, 수령)이 지녀야 할 정신 자세와 치국안민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치민(治民)에 관한 요령과 마음가짐과 태도 등을 기록한 48권의 책이다. [흠흠신서]는 곡산부사로 재직할 때 실제 수사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판결과 형벌에 대한 공평성과 규범에 관한 30권의 책으로 사람의 생명을 신중하게 하여야 할 점을 적었다.
[경제유표]란 국가 제도 개혁안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분량은 모두 40권이나 되어 있다.
동문(東門) 매반가(賣飯家 술과 밥을 팔기도 하고 때로는 여관의 기능도 하던 집)의 주모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누구라도 중죄인인 다산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사람은 동네 사람들이 몰려가셔 박살을 내겠다는 험악한 분위기인데다가 관가의 철저한 단속이 예상되는 데도 불구하고 다산을 받아 들인 것이다.
또 그에게 호구지책으로 아전의 자녀를 가르치도록 마련해 주었다. 가끔 주모가 던지는 비판의 말 한마디가 이 다산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다산에는 주모가 존경스럽고 고마운 존재였다. 다산이 채소를 가구는 일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면서도 그것도 6년 후에나 겨우 마련이 되었다고 한다. 다산의 행동반경이 점점 넓어져 아침 경치와 저녁 경치가 다르다는 조석루(朝夕樓)에서 하루를 묵기도 하였다고 한다.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삼근계/ 三勤戒)
다산이 매반가에 자리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 즈음에 황 상이 다산을 찾아와 배움을 청했다. 양반 자제가 아니라 늦게 공부하게 된 황 상은 당시 장가갈 나이인 15살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황 상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제자로 인정하고 황 상을 자식처럼 사랑하였다. 그리고 배우는 사람의 세 가지 잘못하기 쉬운 유의점을 알려 준다.
(1) 기억하고 외우는 것은 민첩하지만, 그 폐단은 소홀함이고,
(2) 옛사람이나 자신의 학설을 저술하는 것이 왕성하지만, 그 폐단은 가볍게 날림으로 하는 것이요.
(3) 깨닫고 해석함을 빠르지만, 그 폐단은 거칠다는 것이다.
대체로 무디어도 구멍을 뚫으면 그 구멍은 넓게 커지고, 막혔어도 통하게 하면 그 흐름이 빨라지고, 답답해도 꾸준히 문지르면 그 빛이 윤기가 나게 된다. 세 번의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하기(三勤) 위해서는 마음에 간직함이 확고(병심확/ 秉心確)해야 한다. 황 상은 이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황상은 신분의 벽과 주어진 환경 때문에 은둔을 택했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며 농사짓고 글을 쓰면서 살았다.
다산은 나중에 대둔사 12대 강사가 된 혜장이란 학식이 높은 스님과도 주역을 논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혜장에게도 다산은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혜장의 소개로 만난 초의선사에게 다산은 아들처럼 6년간 다산초당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혜(慧)와 근(勤)과 적(寂) 세 가지를 갖추어야만 성취함이 있다. 즉 지혜롭지 않으면 굳센 것을 뚫지 못하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힘을 쌓을 수가 없으며 고요하
지 않으면 정밀하지 못한다.”라고 가르쳤다.”
가을 산 쓸쓸하고 저녁 여울 처량도 하구나 강가에 홀로 서서 심란한 맘 다잡지 못하네
다산의 외가 해남 윤씨 즉 당대의 대표적인 남인 학자인 윤선도의 후손이라 학문적 보고가 인 녹우당 서고가 있었다. 다산의 저술 활동에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됨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다산이 있던 매반가와 윤씨의 서고가 있던 녹우당까지 책 운반이나 또 우이도에 유배된 둘째 형 약전과의 편지를 심부름해준 표 씨가 있었다. 호남으로 생긴 형 약전은 정조로부터 약용보다도 낫다는 칭찬을 들은 바가 있는 인물로 유배 중에 바닷속 어족을 집대성한 [현산어보]를 지었다. (최근 김훈의 ‘흑산’에서 약전을 높이 평가하는 소설이 발간되었다고 한다.)
표 씨에게는 사서삼경을 읽고 글을 지을 수 있는 재색이 겸비한 과부가 된 딸이 있었는데 고모인 주모를 가끔 도와주기도 하였다.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다산이 매반가에 온 지 6년 후에 다산초당으로 옮기면서 함께 지내기 되어 딸 홍임을 낳아 행복하게 살았다. 제자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났을 때 홍임의 나이가 8,9세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사랑스러운 때였을는지 모른다. 1년 후에 약속대로 마재로 데려오기는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온갖 푸대접을 받다가 1년 만에 다시 강진으로 쫓겨가고 말았다고 한다.
다산의 하나밖에 없는 아우 약횡도 양반이 아닌 중인 출신의 어머니에게 태어나, 다산이 유배 중에 선영을 돌보며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였지만, 세상의 불공평하게도 서자의 설움을 평생을 앉고 살았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묘지명을 자신이 씀)을 지어 자신의 삶을 정리했다.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18년(1836년 별세)을 살았다. 저술한 책을 수정하고 보완했다. 1822년 회갑을 맞이 하면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신의 삶을 정리했다. (다산이 죽은 지 52년이 지난 1888년에 공개되었다고 한다. 생애를 정리하고 사상을 적은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신유사옥 관련 인물 등이 소상히 기록 되어 있다.) 자기의 사상과 학문을 훗날 인정해주길 기대했다.
(참고: http://blog.daum.net/surot1027/15808686)
네가 너의 착함을 기록했음이 여러 장이 되는구려.
너의 감추어진 사실을 기록했기에 더 이상의 죄악은 없겠도다.
네가 말하기를 ' 나는 사서육경을 안다.' 고 했으나
그 행할 것을 생각해 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너야 널리 널리 명예를 날리고 싶겠지만 찬양이야 할 게 없다.
몸소 행하여 증명시켜 주어야만 널리 퍼지고 이름이 나게 된다.
너의 분운(紛紜)함을 거두어 들여서 힘써 밝게 하늘을 섬긴다면 마침내 경사가 있으리라.
우리나라 5천 년 역사에 문(文)에는 다산, 무(武)에는 충무공이다. 흔히 다산을 6백여 권의 책을 저술한 유학자나 사상가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과학과 의학, 천문학, 지리학에 능통한 실학자이다. 배다리와 수원 화성을 설계하고 거중기를 발명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뛰어난 예술가이다. 시와 산문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다산 가족은 1827년(65세)부터 곤궁한 생활에서 겨우 벗어났다. 그동안 마재에서 강 건너편 백아곡에서 재배한 인삼이 수확되어 수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매달려 인삼밭을 일구고 정자를 짓고 도둑을 지키면서 힘을 기울인 덕분이다. 마재에서 누에를 길렀다. 뽕나무는 번식력이 강해서 어디서나 잘 자란다. 뽕나무는 잎과 열매 등에는 노화와 고혈압 억제 물질이 을 비롯하여 건강식품으로 활용할 수 있다.
다산 부부가 장수한 비결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마늘도 재배하였다. 당시 선비들이 굶어도 앉아서 글만 읽었는데, 다산 가족은 선비 무리에게 끼지 못하는 걸 겁내지 않고 직접 검푸른 흙을 손수 체질하고 인삼 밭을 가꾸었다. 실학자 집안이라 가풍이 다른 것이다. 손자들까지 나서서 들일을 했을 것이다. 회혼식 사흘 앞두고 부인의 손을 잡은 체 1836년 2월 19일 75세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60년 풍상의 바퀴 눈 깜짝할 새 굴러 왔지만
복사꽃 화사한 봄빛은 신혼 때와 같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이 늙음을 재촉하나
슬픔 짧고 즐거움 길었으니 임금님 은혜겠지
오늘 밤 뜻 맞는 대화가 새삼 즐겁고
그 옛날 붉은 치마엔 먹 흔적이 남아 있네
나뉘었다 다시 합해진 내 모습 같은
술잔 두 개 남겨 두었다. 자손에게 물려주려네
한 글자는 부지런할 근(勤) 자요 또 한 글자는 검소할 검(儉)자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논밭보다 훨씬 나아서 평생토록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성실함이니, 모든 일에 속임이 없어야 한다. (가훈)
다산초당(600권의 저서를 제작한 곳, 다산의 유배생활 기념관)과 다산이 태어나고 무덤이 있는 마재에 이르기까지 다산이 다닌 곳이라면 어디라도 찾아다니며 다산의 후반 36년을 글과 사진으로 남긴 것이다. 그러나 자연히 지난날의 과거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한양대 환경대학원 환경정책과를 수료한 경력과 도자기 사진 전시회 두 번 가진 적이 있다.
다산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신동이었다. 강산 이서구 대감이 책을 지고 가는 다산을 만났을 때 주자가 지은 59권의 ‘자치통감강목’을 열흘 만에 다 읽고 그 내용을 다 외우는 것에 매우 놀랐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기억이 뛰어난 인물이다.
다산이 7살에 지었다는 시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거리의 멂과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다.)을 보아 그의 천재성을 알 수가 있다. 다산은 1762년 6월 16일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에서 아버지 정재원과 해남 윤씨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은 8대 연속 홍문관 학사를 배출한 적이 있는 집안이었고, 외가는 학문과 예술의 집안이었다.
다산은 15세에 풍산 홍씨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22세에 큰형(약현), 작은형(약전)과 함께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의 글을 접하고서 학문의 뜻을 굳게 했다. 처음으로 천주교를 접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쟁이 극에 달했던 때라 당파싸움에 희생되었다. 다산의 큰형 약전은 집안을 지키고, 신해사옥(1791년 최초 가톨릭 박해 사건) 셋째 형 약종(아우구스티노)은 한국 최초의 신학자로 순교를 당하고, 둘째 형 약전과 다산은 목숨은 건졌지만, 유배를 당하게 된 것이다. ‘다산문화 유적지’을 가톨릭에서는 ‘마대성지’라고 부른다.
다산은 18년간의 긴 유배생활에서도 목민심서 등 저술에 힘을 쏟았다. 그의 저술은 당시 조선사회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고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대표적인 저서가 [목민심서]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 목민관(牧民官, 수령)이 지녀야 할 정신 자세와 치국안민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치민(治民)에 관한 요령과 마음가짐과 태도 등을 기록한 48권의 책이다. [흠흠신서]는 곡산부사로 재직할 때 실제 수사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판결과 형벌에 대한 공평성과 규범에 관한 30권의 책으로 사람의 생명을 신중하게 하여야 할 점을 적었다.
[경제유표]란 국가 제도 개혁안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분량은 모두 40권이나 되어 있다.
동문(東門) 매반가(賣飯家 술과 밥을 팔기도 하고 때로는 여관의 기능도 하던 집)의 주모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누구라도 중죄인인 다산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사람은 동네 사람들이 몰려가셔 박살을 내겠다는 험악한 분위기인데다가 관가의 철저한 단속이 예상되는 데도 불구하고 다산을 받아 들인 것이다.
또 그에게 호구지책으로 아전의 자녀를 가르치도록 마련해 주었다. 가끔 주모가 던지는 비판의 말 한마디가 이 다산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다산에는 주모가 존경스럽고 고마운 존재였다. 다산이 채소를 가구는 일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면서도 그것도 6년 후에나 겨우 마련이 되었다고 한다. 다산의 행동반경이 점점 넓어져 아침 경치와 저녁 경치가 다르다는 조석루(朝夕樓)에서 하루를 묵기도 하였다고 한다.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삼근계/ 三勤戒)
다산이 매반가에 자리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 즈음에 황 상이 다산을 찾아와 배움을 청했다. 양반 자제가 아니라 늦게 공부하게 된 황 상은 당시 장가갈 나이인 15살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황 상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제자로 인정하고 황 상을 자식처럼 사랑하였다. 그리고 배우는 사람의 세 가지 잘못하기 쉬운 유의점을 알려 준다.
(1) 기억하고 외우는 것은 민첩하지만, 그 폐단은 소홀함이고,
(2) 옛사람이나 자신의 학설을 저술하는 것이 왕성하지만, 그 폐단은 가볍게 날림으로 하는 것이요.
(3) 깨닫고 해석함을 빠르지만, 그 폐단은 거칠다는 것이다.
대체로 무디어도 구멍을 뚫으면 그 구멍은 넓게 커지고, 막혔어도 통하게 하면 그 흐름이 빨라지고, 답답해도 꾸준히 문지르면 그 빛이 윤기가 나게 된다. 세 번의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하기(三勤) 위해서는 마음에 간직함이 확고(병심확/ 秉心確)해야 한다. 황 상은 이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황상은 신분의 벽과 주어진 환경 때문에 은둔을 택했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며 농사짓고 글을 쓰면서 살았다.
다산은 나중에 대둔사 12대 강사가 된 혜장이란 학식이 높은 스님과도 주역을 논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혜장에게도 다산은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혜장의 소개로 만난 초의선사에게 다산은 아들처럼 6년간 다산초당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혜(慧)와 근(勤)과 적(寂) 세 가지를 갖추어야만 성취함이 있다. 즉 지혜롭지 않으면 굳센 것을 뚫지 못하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힘을 쌓을 수가 없으며 고요하
지 않으면 정밀하지 못한다.”라고 가르쳤다.”
가을 산 쓸쓸하고 저녁 여울 처량도 하구나 강가에 홀로 서서 심란한 맘 다잡지 못하네
다산의 외가 해남 윤씨 즉 당대의 대표적인 남인 학자인 윤선도의 후손이라 학문적 보고가 인 녹우당 서고가 있었다. 다산의 저술 활동에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됨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다산이 있던 매반가와 윤씨의 서고가 있던 녹우당까지 책 운반이나 또 우이도에 유배된 둘째 형 약전과의 편지를 심부름해준 표 씨가 있었다. 호남으로 생긴 형 약전은 정조로부터 약용보다도 낫다는 칭찬을 들은 바가 있는 인물로 유배 중에 바닷속 어족을 집대성한 [현산어보]를 지었다. (최근 김훈의 ‘흑산’에서 약전을 높이 평가하는 소설이 발간되었다고 한다.)
표 씨에게는 사서삼경을 읽고 글을 지을 수 있는 재색이 겸비한 과부가 된 딸이 있었는데 고모인 주모를 가끔 도와주기도 하였다.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다산이 매반가에 온 지 6년 후에 다산초당으로 옮기면서 함께 지내기 되어 딸 홍임을 낳아 행복하게 살았다. 제자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났을 때 홍임의 나이가 8,9세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사랑스러운 때였을는지 모른다. 1년 후에 약속대로 마재로 데려오기는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온갖 푸대접을 받다가 1년 만에 다시 강진으로 쫓겨가고 말았다고 한다.
다산의 하나밖에 없는 아우 약횡도 양반이 아닌 중인 출신의 어머니에게 태어나, 다산이 유배 중에 선영을 돌보며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였지만, 세상의 불공평하게도 서자의 설움을 평생을 앉고 살았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묘지명을 자신이 씀)을 지어 자신의 삶을 정리했다.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18년(1836년 별세)을 살았다. 저술한 책을 수정하고 보완했다. 1822년 회갑을 맞이 하면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신의 삶을 정리했다. (다산이 죽은 지 52년이 지난 1888년에 공개되었다고 한다. 생애를 정리하고 사상을 적은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신유사옥 관련 인물 등이 소상히 기록 되어 있다.) 자기의 사상과 학문을 훗날 인정해주길 기대했다.
(참고: http://blog.daum.net/surot1027/15808686)
네가 너의 착함을 기록했음이 여러 장이 되는구려.
너의 감추어진 사실을 기록했기에 더 이상의 죄악은 없겠도다.
네가 말하기를 ' 나는 사서육경을 안다.' 고 했으나
그 행할 것을 생각해 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너야 널리 널리 명예를 날리고 싶겠지만 찬양이야 할 게 없다.
몸소 행하여 증명시켜 주어야만 널리 퍼지고 이름이 나게 된다.
너의 분운(紛紜)함을 거두어 들여서 힘써 밝게 하늘을 섬긴다면 마침내 경사가 있으리라.
우리나라 5천 년 역사에 문(文)에는 다산, 무(武)에는 충무공이다. 흔히 다산을 6백여 권의 책을 저술한 유학자나 사상가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과학과 의학, 천문학, 지리학에 능통한 실학자이다. 배다리와 수원 화성을 설계하고 거중기를 발명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뛰어난 예술가이다. 시와 산문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다산 가족은 1827년(65세)부터 곤궁한 생활에서 겨우 벗어났다. 그동안 마재에서 강 건너편 백아곡에서 재배한 인삼이 수확되어 수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매달려 인삼밭을 일구고 정자를 짓고 도둑을 지키면서 힘을 기울인 덕분이다. 마재에서 누에를 길렀다. 뽕나무는 번식력이 강해서 어디서나 잘 자란다. 뽕나무는 잎과 열매 등에는 노화와 고혈압 억제 물질이 을 비롯하여 건강식품으로 활용할 수 있다.
다산 부부가 장수한 비결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마늘도 재배하였다. 당시 선비들이 굶어도 앉아서 글만 읽었는데, 다산 가족은 선비 무리에게 끼지 못하는 걸 겁내지 않고 직접 검푸른 흙을 손수 체질하고 인삼 밭을 가꾸었다. 실학자 집안이라 가풍이 다른 것이다. 손자들까지 나서서 들일을 했을 것이다. 회혼식 사흘 앞두고 부인의 손을 잡은 체 1836년 2월 19일 75세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60년 풍상의 바퀴 눈 깜짝할 새 굴러 왔지만
복사꽃 화사한 봄빛은 신혼 때와 같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이 늙음을 재촉하나
슬픔 짧고 즐거움 길었으니 임금님 은혜겠지
오늘 밤 뜻 맞는 대화가 새삼 즐겁고
그 옛날 붉은 치마엔 먹 흔적이 남아 있네
나뉘었다 다시 합해진 내 모습 같은
술잔 두 개 남겨 두었다. 자손에게 물려주려네
한 글자는 부지런할 근(勤) 자요 또 한 글자는 검소할 검(儉)자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논밭보다 훨씬 나아서 평생토록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성실함이니, 모든 일에 속임이 없어야 한다. (가훈)
ⓒ 통합기독공보 & www.lawnchurch.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BEST 뉴스
-
용인 기쁨의교회 성도들, 합신 제111회 총회 결의에 반대 성명
© 통합기독공보 용인 기쁨의교회(담임 정의호 목사) 성도들이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제111회 총회의 기쁨의교회 관련 이단 규정 결의에 반대하는 성명서 ‘한국교회에 고하는 글’을 발표했다. 교회 측에 따르면 지난 9월 20일 주일 오후 본당에서 총회 결의 내용과 경위를 설명하는 자리가 열... -
[단신]기독문화선교회, 오산리기도원서 ‘신바람힐링성회’ 개최
사단법인 기독문화선교회가 오는 12월 7일부터 12일까지 경기도 파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대성전에서 ‘신바람힐링성회’를 개최한다. 이번 성회는 한국교회의 영적 회복과 성도들의 신앙 회복을 돕기 위한 자리로, 말씀 선포를 비롯해 찬양과 간증, 건강 강의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
조승호 GMS 신임 이사장 “모든 성도가 선교에 참여하는 시대 열겠다”
GMS 제15대 이사장 조승호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세계선교회(GMS) 제15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조승호 목사가 모든 교회와 성도가 함께 참여하는 선교 공동체를 비전으로 제시했다. 선교를 일부 사역자만의 책임으로 한정하지 않고, 청년과 전문인, 은퇴 이후의 성도들... -
예장합동 서울강남노회 제102회 정기회 개최…21당회서 23당회로 확대
예장합동(총회장 정영교 목사) 서울강남노회(노회장 이길찬 목사)가 10월 19일 서울 동작구 대남교회(담임 김창원 목사)에서 제102회 정기노회를 개최했다. 이날 정기노회에는 목사 72명과 장로 12명이 참석했으며, 노회는 당회 수가 기존 21당회에서 23당회로 확대되는 등 교세 변화를 보인 가운데 각종 청원... -
전국호남협의회, 조승호 목사 GMS 이사장 취임 축하
예장합동(총회장 정영교목사) 제27회기 전국호남협의회(대표회장 조승호 목사)는 10월 15일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GMS 선교본부에서 임원회를 열고, GMS 이사장에 취임한 조승호 목사를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임원들은 조 목사의 취임을 축하하며, 차기회장 고광석 목사가 꽃다발과 임원들이 모은 ... -
GMS 2027 세계선교대회 슬로건, ‘교회여 다시 열방으로’
총회세계선교회(이사장 조승호 목사, 이하 GMS)가 2027 세계선교대회의 슬로건을 ‘교회여 다시 열방으로’로 정하고, 교회와 평신도가 함께 선교에 참여하는 대회를 만들기 위한 준비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대회장인 조승호 GMS 이사장은 교회와 평신도 모두가 선교의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