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로그인을 하시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받으실 수 있습니다.

십자군 이야기

  • 홍 영 일 (전 염광고등학교장)
  • 입력 2011.12.18 00:21
  • 댓글 0
  • 글자크기설정

  • 현대판 십자군 군병에 대한 잘못이 거듭되어서는 안 된다
로마 교회가 성지 탈환을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라는 기치를 내걸고 십자군 원정을 독려한다. “십자군에 참가하는 것만으로 모든 죄가 용서된다.”라고 로마교황이 약속한 것이다. 이슬람교도를 상대로 한 싸움은 모두가 ‘성전’이고 전사자는 ‘순교자’가 되는 것이다. 성스런 전쟁에 참가하는 자는 가슴이나 등에 붉은 천으로 만든 십자가를 붙이게 하였다.
 
저자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 1937.7 도쿄출생)가 쓴 세 권으로 된 십자군 이야기는 등장인물이 많고, 이야기가 복잡하여 줄거리를 따라 잡기가 힘들었다. 저자의 말처럼 막이 오르기 전 서곡으로 간략하게 만들었다는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줄거리를 간추렸다. <그림>은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도레(1832-1883)가 프랑수아 미쇼(1767-1839)의 『십자군 역사』에 그린 삽화라고 한다.
 
세계 양대 종교가 격돌한 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키우는 데 골몰하고 있던 로마 교회는 은자(隱者/깊은 산 속이나 사막 한가운데 동굴에서 혼자 수행하는 사람) 피에로를 충분히 활용하였다. 예루살렘에 9개월간 성지 순례를 한 외골수 피에르는 이슬람 측이 그리스도교 성지순례 단에 대한 푸대접과 횡포에 분개하여 교황청에 어떤 조치를 해 줄 것을 호소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의 이슬람 세력에 대항할 구원요청이 있었다.
 
1096년 은자 피에르를 선봉으로 출발한 민중 십자군 원정단은 10만 명에 달했지만, 제대로 군비나 식량을 준비하지 않은 오합지졸이라 가는 곳마다 많은 민폐를 끼쳤다.
 
교황(우르바누스 2세)에 말로 천국에 갈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거나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출정한 농민들이 주축이었다. 이들보다 몇 달 늦게 출발한 프랑스의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중심이 된 기사단에 흡수되어 제1차 십자군이 형성된다.
 
그들은 오리엔트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모습에 놀랐다. 11세기 말엽만 해도 유럽은 오리엔트에 비하면 시골이나 마찬가지였다. 8개월간에 전투로 안티오키아 (Antioch 안디옥)를 점령한 십자군은 주민을 닥치는 대로 ‘신이 바라시는 일’이라고 하면서 안심하고 죽였다.
이때,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도였다. 그들에게도 예루살렘은 예언자 마호메트가 승천한 곳으로 성도이기 때문이다.
 
제1차 십자군의 희생자 중에는 이슬람교도와 싸우다 죽은 사람보다는 굶주림과 갈증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더 많았다. 어쨌든 3차 공격에 간신히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은 주민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학살하였다.
 
십자군의 실패는 이슬람을 단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에데사(현재 터키 우르파)를 다시 이슬람에 빼앗긴 일을 만회하려고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독일 황제가 이끄는 제2차 십자군이 결성된다. 십자군이 소아시아를 통과하다가 투르크군의 게릴라 작전에 농락당하여 엄청난 희생을 치른다. 제2차 십자군의 실패는 그리스도교도들이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이슬람 측의 살라딘을 중심으로 단결을 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예루살렘이 88년 만에 다시 이슬람 측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예루살렘이 다시 적에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성지탈환을 목표로 제3차 십자군이 결성된다. 독일 황제 ‘붉은 수염’ 프리들리 1세, 프랑스 왕 ‘존엄 왕’ 필리프, 영국의 ‘사자심(사자의 심장을 가진 남자)왕’ 리처드 1세가 출전하였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전투에 열중하던 리처드 왕은 본국에서 동생 존(로빈 후드 이야기에 등장)이 불온한 음모 소식에 살라딘과 강화 조약을 맺고 귀국하고 만다.
 
십자군의 비잔틴 제국 침공으로 교회의 분열이 고착화 되었다.
 
제4차 십자군은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비잔틴 제국을 향하였다.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은 기독교 국가이지만, 이들은 라틴 인이라고 불리는 서 유럽인을 야만인이라고 싫어한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함으로 라틴 제국으로 바뀌었다.
 
1054년 가톨릭 교회가 로마 교회(Roman Catholic Church)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 정교회(Orthodox Catholic Church)로 갈라지게 되었던 교회가 1204년 4차 십자군의 비잔틴 점령으로 완전히 굳어졌다.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소년소녀들의 십자군의 소년소녀들은 도중에 쓰러지거나 속아서 팔려가는 등 뿔뿔이 흩어져 끝나고 만다.
 
제5차 십자군은 유럽인과 오리엔트에 사는 그리스도교도로 이루어진 혼성 군이다.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이집트의 술탄에게 타격을 가한다고 이집트로 향하였다. 그러나 나일강 하류 델타지역의 늪지에서 허둥지둥하다가 간신이 술탄과 휴전 협정을 맺고 철수하고 말았다.
 
제6차 십자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한 십자군이다.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내란 상태에 놓였던 이집트의 술탄과 직접 교섭하여 예루살렘과 나사렛과 베들레헴이라는 그리스도교의 3대 성지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협정 10년이 지나자 이전 상태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의 도움으로 독일 황제로 인정을 받았지만, 십자군 원정에 미온적이라 파문을 당한 상태인데다가 이슬람교도들을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1230년까지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하였었다.
 
제7차 십자군은 결국 군사적으로 제압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이끄는 십자군이 카이로로 진격하였지만, 왕까지 포로로 잡혀 몸값을 지불하게 된다. 십자군은 반드시 성직자가 동행했는데, 이들이 하던 일은 출전을 앞둔 전사들을 격려하거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신의 용서를 베푸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는 불안에 시달리는 포로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갖도록 설교하는 일을 하였다.
 
제8차 십자군은 팔레스타인의 곤궁한 상황을 전해 듣고 신앙심이 깊은 루이 9세가 다시 출정하지만, 튀니지에서 왕이 죽는 바람에 싱겁게 끝나고 만다.
 
더는 서유럽에서의 원군을 기대할 수 없게 된 후에도 성지를 지킬 목적으로 창설된 템플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튜턴 기사단 단원들은 돌아가려도 해도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에 계속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1096년 시작한 십자군 전쟁은 1291년에 모든 것이 종말을 고했다.
 
오리엔트의 그리스도교들이 마지막으로 농성하던 아코(돌레마이, 두로와 가이샤라 중간 지점)가 함락된 것이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전투가 있었지만 1571년 레판토(고린도 만) 해전은 최후의 십자군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도 연합함대가 이 해전에서 완승함으로써 이슬람 세력의 서진을 저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십자군의 200년에 이르는 긴 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었고, 전쟁에 참여했던 영주와 기사계급이 몰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상인계급은 성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누적된 사건들과 면죄부로 구원을 거래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타락에 분노한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항이 담긴 서신을 작성하여 종교 개혁에 앞장서게 되었다. 전쟁은 인간이 여러 난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할 때 떠올리는 아이디어다.
 
 
 
 

 
ⓒ 통합기독공보 & www.lawnchurch.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BEST 뉴스

전체댓글 0

추천뉴스

  • 예장합동 목회자 수급 불균형 우려… 평신도 신학 교육 대안 주목
  • 종교개혁의 정신, 오늘의 한국교회는 개혁되고 있는가
  • GMS 2027 세계선교대회 슬로건, ‘교회여 다시 열방으로’
  • K팝 성공에서 한국교회 다음세대 사역의 길 찾는다
  • 예장합동 서울강남노회 제102회 정기회 개최…21당회서 23당회로 확대
  • 선교의 주체를 넓혀라…교회는 모두 선교사다
  • 조승호 GMS 신임 이사장 “모든 성도가 선교에 참여하는 시대 열겠다”

포토뉴스

more +

해당 기사 메일 보내기

십자군 이야기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