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목사 찾지말고, 진실된 목사찾아야
강북제일교회가 청빙위원회를 구성하여 후임목사를 청빙하고자 한다. 대형교회 대다수의 교회들은 오바댜보다는 엘리야를 청빙하는데 열중이다. 미국박사학위, 대형교회 출신, 총회장 내지는 노회장이상 백그라운드가 좋은 엘리야를 선호한다. 아무도 오바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면 엘리야가 참선지인지, 오바댜가 첨선지인지 점검해보자.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에 대해 남 다른 열심이 있는 자
엘리야는 누구보다도 야훼 하나님에 대해 열심인 사람이었다. 이방인들이나 설사 왕이라도 야훼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멸시한다면 그는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엘리야는 그러던 아합을 만나면 비를 지면에 내릴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시의 음성을 듣고, 아합을 만나러 가게 되었다.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왕상 18:1)
마침 엘리야는 오바댜를 만나 아합에게 자기를 소개할 것을 촉구했다. 엘리야의 청을 들은 아합이 궁내대신 오바댜는 극구 거절한다. 자신이 소개를 잘못했다가 죽을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저가 나를 죽이리이다" (왕상 18:14)
그러나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아합을 만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모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날 아합에게 보이리라" (15)
엘리야의 청에 못이긴 오바댜가 아합을 만나 엘리야의 청을 고하자,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하고 길을 가던 중 엘리야를 만나게 된다.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왕상 18:16~18)
엘리야는 선지자로서 아합에게 할 말을 다 했다. 이제 하나님의 명령을 다 이행했으니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갔다. 즉 직성이 풀리지 않아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무언가 하나님께 더욱 특출한 충성심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갈멜산에서의 전투신청을 한 것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분명히 아합에게 보이라고만 했지, 갈멜산으로 모이라고 하진 않았다(왕상 18:1). 어쩌면 하나님은 엘리야가 아합에게 잘 권면해서 아합이 들으면, 바로 비를 내리게 하시려는 의도였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성경에는 하나님이 갈멜산에서 누가 참신임을 가리자는 의도로 모이라고 지시한 적이 분명 없다. 하나님의 뜻은 단지 아합에게 보이는 것이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당신(아합)이 속히 이방신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비를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엘리야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아합한테 갈멜산으로 모이자고 일방적으로 요청한 것이다. 아마 성경에는 기록돼 있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내밀하게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의 문자적인 표현과 갈멜산의 결과를 보았을 때 엘리야의 과도한 열심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선지자의 열정과 나름대로의 뜻을 위해서라도 불이 내리는 기적을 허락하셨지만 말이다. 그러나 갈멜산 기적의 결과가 생각보다 후유증이 강한 것을 보았을 때, 야훼에 대한 엘리야의 과도한 열심에서 우러나온 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야훼에 대한 열심을 가진 엘리야는 이방신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가시적인 결과로 보여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갈멜산에서 전투를 신청한 것이었다. 아합은 결투에 응하고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을 갈멜산으로 모았다.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으니라" (왕상18:19~20)
하나님에 대한 과도한 열심이 살육을 불러 일으켜
전투를 신청한 엘리야는 참신임을 보여주어 당당하게 승리함으로써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죽이게 된다. 비록 엘리야의 맹목적인 열심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참신임을 보여주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은 피를 보는 단회적 사건으로 귀결된다. 엘리야는 능력과 참하나님을 많은 사람 앞에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야훼에 대한 그의 열심은 여기서 그치지를 않고 이방선지자들을 살육하는데도 앞장을 서게 된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18:38~40)
여기서 야훼 하나님에 대한 과도한 열심이 나온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람은 모두 죽여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심에는 엘리야의 맹목성과 인위성도 포함되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아합의 아내인 이방여인 이세벨의 불호령에 그만 주눅이 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하지 않은 맹목적이고도 인위적인 열심은 언젠가 바닥이 드러나고 마는 법이다.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없고 이방여자 신도의 한마디에 벌벌 떨게 되는 것이다. 영국의 메리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 존낙스를 보고 벌벌 떨었다고 하는데, 엘리야는 낙스만도 못했던 것이다.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왕상19:1~2)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기로 각오하니 엘리야는 그만 두려워 떨게 되어 광야로 들어가고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명을 취하게 해달라고 한다. 황제 선지자의 고백이 황제답지 않게 너무 비참한 것이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19:3~4)
엘리야가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한 순수한 신앙의 열심을 가지고 했더라면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늘에서 불을 내린 선지자의 행위가 한낱 이방신을 믿는 왕비의 말에 너무 쉽게 무릎을 꿇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한 열심은 죽음앞에서도 초연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한 선지자, 이사야나 예레미야, 바울은 죽음 앞에 초연했던 사람들이다. 예레미야처럼 착고에 매여도, 이사야처럼 톱 앞에 놓여도, 베드로처럼 감옥에 갇혀도, 예수처럼 십자가에 달려도, 바울처럼 단두대 앞에 서도, 주기철 목사처럼 못 판앞에서도, 김익두 목사처럼 공산군 앞에서도, 고영근, 문익환 목사처럼 독재정권 앞에서도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해서 행동한 사람들은 죽음 앞에 너무나도 의연했다. 특별한 열심과 사익을 위한 맹목적인 열심의 한계는 결정적인 순간에 로뎀나무 그늘 아래로 가게 되는 경향이 있다. 엘리야도 자신의 열심을 특별한 열심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한 열심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열왕기상에 19:10절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이 말은 14절에서 똑같이 반복된다. 그만큼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남다른 특별한 열심히 있었던 것이다.
황제 선지자의 착각, 나만 참 선지자
엘리야의 특심은 자신의 놀라운 업적으로 인해 자신만 참 리더자요, 황제 선지자라고 착각을 하게 만든다. 야훼에 대한 과도한 열심은 판단능력을 상실케 했던 것이다. 어제 신화가 있다고 해서 내일까지 있으라는 법은 없다. 전날에 갈멜산에서의 기적이 일어났지만 다음 날은 로뎀나무 그늘아래서 신세 한탄하는 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만이 참선지자요,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리더자라고 오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황제 선지자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18절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 참선지자를 남겼다고 말씀하신다. 결국 맹목적 열심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만을 생각한 나머지 상황 판단 능력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갈멜산의 전투는 득보다 실이 커
엘리야의 '특심'으로 인한 갈멜산의 사건은 결국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의 죽음으로 끝났지만 그로 인한 후유증이 더 컸다. 엘리야는 겁쟁이로 돌아서서 비겁하게 죽기를 구하게 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아합의 아들 아하시아 왕은 다시 바알을 섬기고 이스라엘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고, 아합의 아들로 인해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의 진노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누가 참선지자인가? 엘리야(?) 오바댜(?)
선지자 중의 선지자였던 황제 선지자 엘리야는 과도한 야훼 신앙의 열정으로 다른 선지자들이 흉내낼 수 없는 놀라운 업적을 행했지만, 결국 로뎀나무 그늘 밑으로 피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황제 선지자는 자존심도 신앙심도, 오기도 없었다. 오히려 겁장이 궁내대신 오바댜가 아합한테 죽을 각오를 하면서 동굴에 있는 선지자 100인을 떡과 고기를 주며 보살폈던 것이다.
엘리야는 동굴에서 죽기를 기도하고 있었고 오바댜는 목숨을 걸고 동굴에서 선지자를 살피고 있었다. 과연 누가 참선지자인가? 기적을 베풀어 업적을 세웠지만 동굴 속에서 비굴하게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비겁한 황제 선지자 엘리야가 참선지자인가? 아니면 궁내대신이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선지자 100여 명을 동굴에 숨기고 떡과 고기를 먹인(왕상 18:4) 오바댜가 참선지자인가?
동굴속에서 한 사람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죽음에 초연해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 점검해보자. 대형교회 목사가 참선지자인가? 남모르게 개척교회나 시골에서, 가난한 사람들, 농부들, 어부들을 섬기면서 지역과 사회를 변화시키고, 평생 약자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참선지인가?
강북제일교회는 화려한 엘리야보다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오바댜를 찾기를 바란다. 겉은 이방여왕을 섬기는 대신에 불과했지만 속은 순교의 각오로 하나님을 섬기는 예언자였다. 엘리야는 겉은 화려했지만 속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장이에 불과했지만 오바댜는 겉은 궁의 신하에 불과하여 이세벨을 섬기는 것 같았지만 속은 선지자 100명을 살려낸 선지자중의 선지자였다.
이제 강북제일교회는 명문대, 대형교회, 미국 박사, 연줄, 서울, 강남 출신의 화려한 목사를 찾지말고, 겉으로는 별볼일 없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 진실로 교인을 섬기는 사람, 교인중에서도 약자와 장애인, 병자를 섬기는 사람, 설교는 조금 못해도 설교와 삶이 일치가 되는 사람, 대중들의 인기와 교단정치에 별관심이 없는 오바댜와 같은 선지자를 찾기바란다.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에 대해 남 다른 열심이 있는 자
엘리야는 누구보다도 야훼 하나님에 대해 열심인 사람이었다. 이방인들이나 설사 왕이라도 야훼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멸시한다면 그는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엘리야는 그러던 아합을 만나면 비를 지면에 내릴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시의 음성을 듣고, 아합을 만나러 가게 되었다.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왕상 18:1)
마침 엘리야는 오바댜를 만나 아합에게 자기를 소개할 것을 촉구했다. 엘리야의 청을 들은 아합이 궁내대신 오바댜는 극구 거절한다. 자신이 소개를 잘못했다가 죽을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고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저가 나를 죽이리이다" (왕상 18:14)
그러나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아합을 만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모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날 아합에게 보이리라" (15)
엘리야의 청에 못이긴 오바댜가 아합을 만나 엘리야의 청을 고하자,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하고 길을 가던 중 엘리야를 만나게 된다.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왕상 18:16~18)
엘리야는 선지자로서 아합에게 할 말을 다 했다. 이제 하나님의 명령을 다 이행했으니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갔다. 즉 직성이 풀리지 않아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무언가 하나님께 더욱 특출한 충성심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갈멜산에서의 전투신청을 한 것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분명히 아합에게 보이라고만 했지, 갈멜산으로 모이라고 하진 않았다(왕상 18:1). 어쩌면 하나님은 엘리야가 아합에게 잘 권면해서 아합이 들으면, 바로 비를 내리게 하시려는 의도였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성경에는 하나님이 갈멜산에서 누가 참신임을 가리자는 의도로 모이라고 지시한 적이 분명 없다. 하나님의 뜻은 단지 아합에게 보이는 것이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당신(아합)이 속히 이방신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비를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엘리야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아합한테 갈멜산으로 모이자고 일방적으로 요청한 것이다. 아마 성경에는 기록돼 있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내밀하게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의 문자적인 표현과 갈멜산의 결과를 보았을 때 엘리야의 과도한 열심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선지자의 열정과 나름대로의 뜻을 위해서라도 불이 내리는 기적을 허락하셨지만 말이다. 그러나 갈멜산 기적의 결과가 생각보다 후유증이 강한 것을 보았을 때, 야훼에 대한 엘리야의 과도한 열심에서 우러나온 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야훼에 대한 열심을 가진 엘리야는 이방신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가시적인 결과로 보여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갈멜산에서 전투를 신청한 것이었다. 아합은 결투에 응하고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을 갈멜산으로 모았다.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으니라" (왕상18:19~20)
하나님에 대한 과도한 열심이 살육을 불러 일으켜
전투를 신청한 엘리야는 참신임을 보여주어 당당하게 승리함으로써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죽이게 된다. 비록 엘리야의 맹목적인 열심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참신임을 보여주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은 피를 보는 단회적 사건으로 귀결된다. 엘리야는 능력과 참하나님을 많은 사람 앞에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야훼에 대한 그의 열심은 여기서 그치지를 않고 이방선지자들을 살육하는데도 앞장을 서게 된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18:38~40)
여기서 야훼 하나님에 대한 과도한 열심이 나온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람은 모두 죽여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심에는 엘리야의 맹목성과 인위성도 포함되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아합의 아내인 이방여인 이세벨의 불호령에 그만 주눅이 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하지 않은 맹목적이고도 인위적인 열심은 언젠가 바닥이 드러나고 마는 법이다.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없고 이방여자 신도의 한마디에 벌벌 떨게 되는 것이다. 영국의 메리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 존낙스를 보고 벌벌 떨었다고 하는데, 엘리야는 낙스만도 못했던 것이다.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왕상19:1~2)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기로 각오하니 엘리야는 그만 두려워 떨게 되어 광야로 들어가고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명을 취하게 해달라고 한다. 황제 선지자의 고백이 황제답지 않게 너무 비참한 것이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19:3~4)
엘리야가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한 순수한 신앙의 열심을 가지고 했더라면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늘에서 불을 내린 선지자의 행위가 한낱 이방신을 믿는 왕비의 말에 너무 쉽게 무릎을 꿇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한 열심은 죽음앞에서도 초연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한 선지자, 이사야나 예레미야, 바울은 죽음 앞에 초연했던 사람들이다. 예레미야처럼 착고에 매여도, 이사야처럼 톱 앞에 놓여도, 베드로처럼 감옥에 갇혀도, 예수처럼 십자가에 달려도, 바울처럼 단두대 앞에 서도, 주기철 목사처럼 못 판앞에서도, 김익두 목사처럼 공산군 앞에서도, 고영근, 문익환 목사처럼 독재정권 앞에서도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해서 행동한 사람들은 죽음 앞에 너무나도 의연했다. 특별한 열심과 사익을 위한 맹목적인 열심의 한계는 결정적인 순간에 로뎀나무 그늘 아래로 가게 되는 경향이 있다. 엘리야도 자신의 열심을 특별한 열심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한 열심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열왕기상에 19:10절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이 말은 14절에서 똑같이 반복된다. 그만큼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남다른 특별한 열심히 있었던 것이다.
황제 선지자의 착각, 나만 참 선지자
엘리야의 특심은 자신의 놀라운 업적으로 인해 자신만 참 리더자요, 황제 선지자라고 착각을 하게 만든다. 야훼에 대한 과도한 열심은 판단능력을 상실케 했던 것이다. 어제 신화가 있다고 해서 내일까지 있으라는 법은 없다. 전날에 갈멜산에서의 기적이 일어났지만 다음 날은 로뎀나무 그늘아래서 신세 한탄하는 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만이 참선지자요,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리더자라고 오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황제 선지자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18절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 참선지자를 남겼다고 말씀하신다. 결국 맹목적 열심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만을 생각한 나머지 상황 판단 능력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갈멜산의 전투는 득보다 실이 커
엘리야의 '특심'으로 인한 갈멜산의 사건은 결국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의 죽음으로 끝났지만 그로 인한 후유증이 더 컸다. 엘리야는 겁쟁이로 돌아서서 비겁하게 죽기를 구하게 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아합의 아들 아하시아 왕은 다시 바알을 섬기고 이스라엘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고, 아합의 아들로 인해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의 진노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누가 참선지자인가? 엘리야(?) 오바댜(?)
선지자 중의 선지자였던 황제 선지자 엘리야는 과도한 야훼 신앙의 열정으로 다른 선지자들이 흉내낼 수 없는 놀라운 업적을 행했지만, 결국 로뎀나무 그늘 밑으로 피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황제 선지자는 자존심도 신앙심도, 오기도 없었다. 오히려 겁장이 궁내대신 오바댜가 아합한테 죽을 각오를 하면서 동굴에 있는 선지자 100인을 떡과 고기를 주며 보살폈던 것이다.
엘리야는 동굴에서 죽기를 기도하고 있었고 오바댜는 목숨을 걸고 동굴에서 선지자를 살피고 있었다. 과연 누가 참선지자인가? 기적을 베풀어 업적을 세웠지만 동굴 속에서 비굴하게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비겁한 황제 선지자 엘리야가 참선지자인가? 아니면 궁내대신이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선지자 100여 명을 동굴에 숨기고 떡과 고기를 먹인(왕상 18:4) 오바댜가 참선지자인가?
동굴속에서 한 사람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죽음에 초연해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 점검해보자. 대형교회 목사가 참선지자인가? 남모르게 개척교회나 시골에서, 가난한 사람들, 농부들, 어부들을 섬기면서 지역과 사회를 변화시키고, 평생 약자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참선지인가?
강북제일교회는 화려한 엘리야보다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오바댜를 찾기를 바란다. 겉은 이방여왕을 섬기는 대신에 불과했지만 속은 순교의 각오로 하나님을 섬기는 예언자였다. 엘리야는 겉은 화려했지만 속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장이에 불과했지만 오바댜는 겉은 궁의 신하에 불과하여 이세벨을 섬기는 것 같았지만 속은 선지자 100명을 살려낸 선지자중의 선지자였다.
이제 강북제일교회는 명문대, 대형교회, 미국 박사, 연줄, 서울, 강남 출신의 화려한 목사를 찾지말고, 겉으로는 별볼일 없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 진실로 교인을 섬기는 사람, 교인중에서도 약자와 장애인, 병자를 섬기는 사람, 설교는 조금 못해도 설교와 삶이 일치가 되는 사람, 대중들의 인기와 교단정치에 별관심이 없는 오바댜와 같은 선지자를 찾기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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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기쁨의교회 성도들, 합신 제111회 총회 결의에 반대 성명
© 통합기독공보 용인 기쁨의교회(담임 정의호 목사) 성도들이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제111회 총회의 기쁨의교회 관련 이단 규정 결의에 반대하는 성명서 ‘한국교회에 고하는 글’을 발표했다. 교회 측에 따르면 지난 9월 20일 주일 오후 본당에서 총회 결의 내용과 경위를 설명하는 자리가 열... -
[단신]기독문화선교회, 오산리기도원서 ‘신바람힐링성회’ 개최
사단법인 기독문화선교회가 오는 12월 7일부터 12일까지 경기도 파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대성전에서 ‘신바람힐링성회’를 개최한다. 이번 성회는 한국교회의 영적 회복과 성도들의 신앙 회복을 돕기 위한 자리로, 말씀 선포를 비롯해 찬양과 간증, 건강 강의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
조승호 GMS 신임 이사장 “모든 성도가 선교에 참여하는 시대 열겠다”
GMS 제15대 이사장 조승호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세계선교회(GMS) 제15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조승호 목사가 모든 교회와 성도가 함께 참여하는 선교 공동체를 비전으로 제시했다. 선교를 일부 사역자만의 책임으로 한정하지 않고, 청년과 전문인, 은퇴 이후의 성도들... -
예장합동 서울강남노회 제102회 정기회 개최…21당회서 23당회로 확대
예장합동(총회장 정영교 목사) 서울강남노회(노회장 이길찬 목사)가 10월 19일 서울 동작구 대남교회(담임 김창원 목사)에서 제102회 정기노회를 개최했다. 이날 정기노회에는 목사 72명과 장로 12명이 참석했으며, 노회는 당회 수가 기존 21당회에서 23당회로 확대되는 등 교세 변화를 보인 가운데 각종 청원... -
전국호남협의회, 조승호 목사 GMS 이사장 취임 축하
예장합동(총회장 정영교목사) 제27회기 전국호남협의회(대표회장 조승호 목사)는 10월 15일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GMS 선교본부에서 임원회를 열고, GMS 이사장에 취임한 조승호 목사를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임원들은 조 목사의 취임을 축하하며, 차기회장 고광석 목사가 꽃다발과 임원들이 모은 ... -
GMS 2027 세계선교대회 슬로건, ‘교회여 다시 열방으로’
총회세계선교회(이사장 조승호 목사, 이하 GMS)가 2027 세계선교대회의 슬로건을 ‘교회여 다시 열방으로’로 정하고, 교회와 평신도가 함께 선교에 참여하는 대회를 만들기 위한 준비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대회장인 조승호 GMS 이사장은 교회와 평신도 모두가 선교의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