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픔보다는 버려진 기분을 느꼈다.”
저자 자크 랑(Jake Lang/1939년생)은 프랑스에서 10년간 최장수 문화장관(1981-1993, 2년 공백)을 하면서 길거리 음악축제를 육성하고 지방 중심의 문화 정책을 펴나갔다. 우리나라 외규장각 반환에도 공로가 컸던 인물이다.
넬슨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넬슨 롤리훌라훌라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남아프리카 움타타에서 뎀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만델라의 아버지는 주민의 소 한 마리가 도망간 촌락 내부 문제를 예전처럼 자체 해결하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백인 집정관의 소환에 불응하였다고 재산과 지위를 잃게 되고 그 결과로 결국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이때 만델라는 백인의 지나친 처사에 대하여 “슬픔보다는 버려진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마을을 대신 다스리는 백인 섭정의 배려로 중고등학교를 나와 포트헤어대학에 입학하였다. 기독교 학교를 다니면서 “신에게 복종하고 정치적 권위를 존중하며 우리에게 교육의 기회를 베풀어준 정부와 교회에 감사하도록” 배웠다.
백인 사회에서 카피르인(원주민)이란 인식을 하게 된 만델라는 매일 같이 가해지는 치사한 모욕을 감수해서는 안 되겠다고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백인과 같이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원주민은 점심을 화장실에서 먹어야 하는 시대였다. 백인 친구가 앉은 도서관의 테이블에도 같이 앉을 수도 없었다. 백인 친구와 카페에 가면 만델라 때문에 입장이 거부당했다. 열차 탑승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만델라는 인도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였다. 1954년 백인지역으로 선포된 지역에 거주하는 흑인들을 이주시키는 것을 합법화했으며, 백인들이 가까이 살기를 꺼리는 흑인들은 20km 이상 떨어진 곳으로 내 보내졌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을 1948년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1913년에 만들어진 토지령에 의하면 아프리카인은 백인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하여서만 도시에 머무를 수 있으며 그 일을 끝나는 즉시 도시를 떠나야 한다고 되어있었다. (1980년 신문에 의하면 흑인들을 통제하고 다스리기 위한 목적만으로 만들어진 법규가 거의 1,200페이지에 이른다고 보도하였다.) 1958년 네덜랜드계 목사의 아들인 핸드릭 페르부르트가 총리가 되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완성하는데, 그는 나치에 동조하여 이름을 날린 한 신문사의 편집인이었다.
분리정책의 닻은 종교적인 신념 속에서 내려졌다. 네덜란드 개신교에 의하면 개개인의 인종은 각자의 재능에 따라 발전해야 하는 신의 창조물이라고 했다. 혼혈은 어떠한 형태이건 신의 눈에 범죄로 비친다는 것이다.
만델라는 강제로 결혼시켜 붙들어 놓으려는 섭정의 의도를 알고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쳤다. 백인의 도시에서 그는 법과 법률을 수호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1943년부터 1949년까지 유색인을 위한 대학 비트바테르란트 대학을 다녔다. 1950년대 초에 만델라는 드디어 정식 변호사가 된다.
1952년 요하네스버그에 정식 법률상담소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을 반대하는 등 본격적인 흑인인권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시민 불복종운동, 자유헌장 작성 등에 관련하여 반역죄로 아프리카 국민회의(ANC)의 의장인 모로카 박사, 서기장 월터 시술루, 그리고 만델라와 인도지도자들이 체포 당하였다. 흑인 인권단체가 분열하면서 범아프리카 회의가 1960년 국민회의가 결의한 통행증 반납 운동을 먼저 벌이기 위해 샤프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만 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가 경찰서로 몰려 들자 75명의 지역 경찰이 공포에 휩싸여 총기를 난사하는 바람에 67명이 사망하고 400명이 부상을 당했다. 샤프빌 학살은 남아프리카 현대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몰고 온 사건이 되었다.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애도와 항의의 날로 1960년 3월 케이프에 5만 명이 모여 통행증을 불살랐다. 이에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지고,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만델라는 두 번째 체포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적성과 폭력성을 증빙하지 못하여 석방되었다.
1961년 무장투쟁을 선언하고 ‘국민의 창’의 사령관으로 선임된다. 총을 만져 보지도 못하고 가느다란 투창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백인들의 맞설 용기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었다. 게릴라 전을 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사보타주(怠業)가 인명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국가를 괴롭힐 방법임이 분명하다.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것은 외국자본의 철수를 가져오기 쉽다고 보아 삼가기로 하였다.
종신형으로 가혹하기로 유명한 로벤 아일랜드의 악명 높은 섬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1962년 거주지 이탈과 사보타주(怠業) 혐의로 다시 체포된다. 1964년 만델라를 포함한 아프리카인 6명, 인도인 1명, 백인 1명이 종신형을 받았다. 로벤 아일랜드 섬 감옥은 정치범들에게는 6개월에 단 한 번의 방문만이 허용되며, 한 통의 편지만 허락된다.
채석장에서 돌아 올 때 죄수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가게 한다. 총으로 무장한 간수들이 앞장서고 행렬의 맨 뒤에는 독일산 감시 견이 따른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따라 넘어지게 되어 있다. 개들에게 물어 뜯겨 피를 흘리게 했다. 그러고 나서 키득거리면서 죄수의 얼굴에 오줌을 눈다. “목마르지 검둥아, 네가 마시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위스키야” 라며 가학 취미를 발휘하였다.
감옥에서도 만델라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항소를 포기하려는 죄수들에게 법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감옥에서건 재판정에서건 만델라는 영원한 변호사였다. 밖에서는 학생들과 학교에 다니지 않는 젊은이까지 시위에 참가하였다. 경찰의 발포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끈질긴 항의와 저항으로 감옥의 생활도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다. 폭력적인 감시와 지시보다는 자치적으로 하는 노작으로 변해 갔다. 수감자들에게 채석장의 힘든 일보다는 모래사장에서 해조류를 모아 말려서 압축하여 일본에 비료로 수출하는 일을 하게 하였다. 해조류 채취자들은 굴과 전복을 따 와서 형무소의 식생활도 향상되었다. 해산물로 탕을 끓여 간수들도 죄수들과 함께 나누어 먹기까지 하였다.
1985년 사프빌 학살 25주년 기념식에서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사람들에게 또 다시 발포하여 20여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긴급사태가 선포되었고, 상업회의소 연합회의에서 정부가 만델라를 포함한 흑인지도자들과 협상을 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전 세계가 만델라를 화제의 중심으로 삼았다. 마이클 타이슨 세계 챔피언은 세계 챔피언 타이틀 획득할 때 착용한 장갑을 만델라에게 보내 주었다. (만델라는 1950년 아마추어 권투 선수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1988년 7월 만델라의 70회 생일에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예수님의 탄생 이후로 최대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화젯거리가 되었다. 런던에서 BBC방송이 만델라를 위한 대규모 록 콘서트를 벌려 강철 총리 대처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1990년 2월 2일 데 클레르크 대통령이 남아프리카 국민회의(ANC), 범아프리카 회의, 아프리카 공산당을 비롯한 31개 불법단체에 대한 금지령을 철회하고 사상범의 석방과 사형 중지를 선포하면서 마침내 2월 11일, 만델라도 27개년의 수감생활에서 석방되었다. (아래는 석방되면서 한 연설의 일부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자유를 갈망해왔습니다.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지금은 모든 전선에서 투쟁을 강화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투쟁을 느슨하게 한다면 미래의 젊은 세대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과오가 될 것입니다.” “ 나는 백인의 지배에 맞서 투쟁했을 뿐만 아니라, 흑인의 지배에 대해서도 맞서 싸웠습니다. 나는 모든 인간이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라는 이상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살고 싶은,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나는 그 이상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자유를 향한 행보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1991년 7월 더번에서 30년 만에 아프리카 전국회의에서 만델라를 만장일치로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그 회의에서 350여 년에 걸친 인종분규가 종식되고,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다. 1994년 4월 27일 최초로 1인 1표 제의 투표로 만델라가 65%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5월 10일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며 드디어 국민이 모두 주권자가 되었다. ‘자유를 향한 오랜 여정’이 종언을 고하였다. “크나큰 재앙으로부터 인류 전체가 자랑스러워할 사회가 탄생했습니다.”
새로운 대통령은 선거에서 5%이상을 득표한 정당은 약속대로 모두 국정에 참여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나서 할 일은 ‘민주주의’와 ‘화해’하는 일이었다. 민주주의는 언론의 자유이다. 만델라는 언론을 조금도 속박하려 들지 않았다.
화해를 위해서는 복수심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옛 대통령 피터르 보타를 만나기 위해 은퇴한 그의 거처까지 찾아 갔다. 상징적인 인물로 아파르트헤이트의 창안자인 헨그릭 페르부르트 미망인이 사는 저택에 가서 차를 함께 마셨다.
만델라에게 교수형을 구형한 검사 퍼시 유타를 식사에 초대하였다. 화해는 분명 만델라의 정치적 전략적 핵심의 요소였다. 2007년 은퇴한 세계지도자들의 모임인 세계원로회의(The Elders)를 출범시킨다. 지미 카터 대통령을 비롯한 지구촌에 큰 영향을 끼친 전직 지도자들이 총 망라하고 있다.
1993년 만델라와 데 클레르크 대통령이 함께 아파르트헤이트 폐지에 대한 공로로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아래는 노벨 상 수상 소감 일부이다.)
“나는 전쟁, 폭력, 인종주의, 억압과 탄압, 그리고 전 국민의 빈곤을 유발하는 사회체제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들고 일어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대신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제부터 서로 갈라놓은 비인간적인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투쟁했던 이 땅의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기준으로 측정될 것이고 측정되어야만 합니다.”
“흑인과 백인을 차별하지 않는 세상에서 인류 모두가 천국의 아이들처럼 살아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모두다 평등하게 태어났고, 우리들 각자가 삶, 자유, 번영, 인간의 존엄성을 가질 수 있는 사회, 그리고 공정한 정부에 대한 정당한 몫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창조 할 것입니다.”
에이즈는 어떤 자연재앙보다도 많은 희생자들을 냈습니다. (결혼, 자녀 이야기)
1944년 요하네스버그에서 흑인 여성으로 오를 수 있는 제일 훌륭한 직업인 간호사 공부를 하던 에블린 메이츠(Evelyn Mase)와 만나 결혼하여 ‘뎀비’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에블린과는 1956년에 정치를 최우선시하는 만데라와 성격 차이로 어려운 시련을 겪다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딸을 잃게 되자 부인은 ‘여호와의 증인’에 빠지게 되어 이혼하게 된다. (아들 뎀비는 1969년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2년 후 1958년 만델라는 지나가다가 큰 병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았는데, 그녀가 흑인으로 최초의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놈자노 위니프레드였다. 그녀와 재혼을 하였다. 그다음 해 2월에 딸 제나니를 낳았다. 만델라의 이름의 뜻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인데다가, 놈자노의 이름의 뜻이 ‘싸우는 여인’ 이라 그런지 죽이 잘 맞았다고 한다. 만델라가 교도소에 있을 때 뒷바라지와 저항 운동에도 열심이었다.
위니가 국내 안전법 위반으로 체포되었고, 혐의도 없이 투옥되더니 역시나 아무런 설명도 없이 석방되었다. 위니는 어린이집을 차렸고 병원 개설을 위한 기금도 모았다. 어머니를 닮은 제나니는 17세에 소망이란 시를 써서 미국에서 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배신자는 처형 받아야 마땅하다고 하는 과격분자들과 어울리면서 위니는 이성을 잃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96년 3월 3년간의 별거생활 끝에 위니 만델라와 이혼을 하고, 1998년 그사라 마셀 여사와 외국 저명 인사 등 하객 2천 명을 초청하여 결혼식을 거행한다. 마셀 여사는 모잠비크 사모라 마셀 대통령의 미망인이다. 1990년 만델라가 아프리카, 인도, 유럽 등을 순방하다가 만나게 되었다.
2005년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인 마카토 만델라가 에이즈로 사망한다.
만델라는 에이즈 퇴치 운동에 앞장 선다. “이것은 전쟁입니다. 에이즈는 우리 나라 역사상 그 어떤 전쟁보다도, 우리가 겪었던, 그 어떤 자연재앙보다도 많은 희생자들을 냈습니다.”
1990년 인도 최고 훈장
1991년 베이징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
1994년 노벨 평화상
1995년 영국 오더 오브 메리트
2000년 세계아동인권상
2002년 루즈벨트 자유상
2004년 제8회 만해 대상
권력은 결국 부패하며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들 즉, 용기, 자유에 대한 열정, 용서, 열린 마음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홍영일장로는 록원교회(장창만목사시무)에서 은퇴한 장로로 염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고 현재는 시골 초야에 머물면서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넬슨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넬슨 롤리훌라훌라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남아프리카 움타타에서 뎀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만델라의 아버지는 주민의 소 한 마리가 도망간 촌락 내부 문제를 예전처럼 자체 해결하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백인 집정관의 소환에 불응하였다고 재산과 지위를 잃게 되고 그 결과로 결국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이때 만델라는 백인의 지나친 처사에 대하여 “슬픔보다는 버려진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마을을 대신 다스리는 백인 섭정의 배려로 중고등학교를 나와 포트헤어대학에 입학하였다. 기독교 학교를 다니면서 “신에게 복종하고 정치적 권위를 존중하며 우리에게 교육의 기회를 베풀어준 정부와 교회에 감사하도록” 배웠다.
백인 사회에서 카피르인(원주민)이란 인식을 하게 된 만델라는 매일 같이 가해지는 치사한 모욕을 감수해서는 안 되겠다고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백인과 같이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원주민은 점심을 화장실에서 먹어야 하는 시대였다. 백인 친구가 앉은 도서관의 테이블에도 같이 앉을 수도 없었다. 백인 친구와 카페에 가면 만델라 때문에 입장이 거부당했다. 열차 탑승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만델라는 인도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였다. 1954년 백인지역으로 선포된 지역에 거주하는 흑인들을 이주시키는 것을 합법화했으며, 백인들이 가까이 살기를 꺼리는 흑인들은 20km 이상 떨어진 곳으로 내 보내졌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을 1948년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1913년에 만들어진 토지령에 의하면 아프리카인은 백인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하여서만 도시에 머무를 수 있으며 그 일을 끝나는 즉시 도시를 떠나야 한다고 되어있었다. (1980년 신문에 의하면 흑인들을 통제하고 다스리기 위한 목적만으로 만들어진 법규가 거의 1,200페이지에 이른다고 보도하였다.) 1958년 네덜랜드계 목사의 아들인 핸드릭 페르부르트가 총리가 되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완성하는데, 그는 나치에 동조하여 이름을 날린 한 신문사의 편집인이었다.
분리정책의 닻은 종교적인 신념 속에서 내려졌다. 네덜란드 개신교에 의하면 개개인의 인종은 각자의 재능에 따라 발전해야 하는 신의 창조물이라고 했다. 혼혈은 어떠한 형태이건 신의 눈에 범죄로 비친다는 것이다.
만델라는 강제로 결혼시켜 붙들어 놓으려는 섭정의 의도를 알고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쳤다. 백인의 도시에서 그는 법과 법률을 수호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1943년부터 1949년까지 유색인을 위한 대학 비트바테르란트 대학을 다녔다. 1950년대 초에 만델라는 드디어 정식 변호사가 된다.
1952년 요하네스버그에 정식 법률상담소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을 반대하는 등 본격적인 흑인인권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시민 불복종운동, 자유헌장 작성 등에 관련하여 반역죄로 아프리카 국민회의(ANC)의 의장인 모로카 박사, 서기장 월터 시술루, 그리고 만델라와 인도지도자들이 체포 당하였다. 흑인 인권단체가 분열하면서 범아프리카 회의가 1960년 국민회의가 결의한 통행증 반납 운동을 먼저 벌이기 위해 샤프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만 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가 경찰서로 몰려 들자 75명의 지역 경찰이 공포에 휩싸여 총기를 난사하는 바람에 67명이 사망하고 400명이 부상을 당했다. 샤프빌 학살은 남아프리카 현대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몰고 온 사건이 되었다.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애도와 항의의 날로 1960년 3월 케이프에 5만 명이 모여 통행증을 불살랐다. 이에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지고,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만델라는 두 번째 체포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적성과 폭력성을 증빙하지 못하여 석방되었다.
1961년 무장투쟁을 선언하고 ‘국민의 창’의 사령관으로 선임된다. 총을 만져 보지도 못하고 가느다란 투창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백인들의 맞설 용기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었다. 게릴라 전을 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사보타주(怠業)가 인명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국가를 괴롭힐 방법임이 분명하다.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것은 외국자본의 철수를 가져오기 쉽다고 보아 삼가기로 하였다.
종신형으로 가혹하기로 유명한 로벤 아일랜드의 악명 높은 섬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1962년 거주지 이탈과 사보타주(怠業) 혐의로 다시 체포된다. 1964년 만델라를 포함한 아프리카인 6명, 인도인 1명, 백인 1명이 종신형을 받았다. 로벤 아일랜드 섬 감옥은 정치범들에게는 6개월에 단 한 번의 방문만이 허용되며, 한 통의 편지만 허락된다.
채석장에서 돌아 올 때 죄수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가게 한다. 총으로 무장한 간수들이 앞장서고 행렬의 맨 뒤에는 독일산 감시 견이 따른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따라 넘어지게 되어 있다. 개들에게 물어 뜯겨 피를 흘리게 했다. 그러고 나서 키득거리면서 죄수의 얼굴에 오줌을 눈다. “목마르지 검둥아, 네가 마시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위스키야” 라며 가학 취미를 발휘하였다.
감옥에서도 만델라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항소를 포기하려는 죄수들에게 법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감옥에서건 재판정에서건 만델라는 영원한 변호사였다. 밖에서는 학생들과 학교에 다니지 않는 젊은이까지 시위에 참가하였다. 경찰의 발포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끈질긴 항의와 저항으로 감옥의 생활도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다. 폭력적인 감시와 지시보다는 자치적으로 하는 노작으로 변해 갔다. 수감자들에게 채석장의 힘든 일보다는 모래사장에서 해조류를 모아 말려서 압축하여 일본에 비료로 수출하는 일을 하게 하였다. 해조류 채취자들은 굴과 전복을 따 와서 형무소의 식생활도 향상되었다. 해산물로 탕을 끓여 간수들도 죄수들과 함께 나누어 먹기까지 하였다.
1985년 사프빌 학살 25주년 기념식에서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사람들에게 또 다시 발포하여 20여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긴급사태가 선포되었고, 상업회의소 연합회의에서 정부가 만델라를 포함한 흑인지도자들과 협상을 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전 세계가 만델라를 화제의 중심으로 삼았다. 마이클 타이슨 세계 챔피언은 세계 챔피언 타이틀 획득할 때 착용한 장갑을 만델라에게 보내 주었다. (만델라는 1950년 아마추어 권투 선수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1988년 7월 만델라의 70회 생일에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예수님의 탄생 이후로 최대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화젯거리가 되었다. 런던에서 BBC방송이 만델라를 위한 대규모 록 콘서트를 벌려 강철 총리 대처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1990년 2월 2일 데 클레르크 대통령이 남아프리카 국민회의(ANC), 범아프리카 회의, 아프리카 공산당을 비롯한 31개 불법단체에 대한 금지령을 철회하고 사상범의 석방과 사형 중지를 선포하면서 마침내 2월 11일, 만델라도 27개년의 수감생활에서 석방되었다. (아래는 석방되면서 한 연설의 일부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자유를 갈망해왔습니다.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지금은 모든 전선에서 투쟁을 강화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투쟁을 느슨하게 한다면 미래의 젊은 세대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과오가 될 것입니다.” “ 나는 백인의 지배에 맞서 투쟁했을 뿐만 아니라, 흑인의 지배에 대해서도 맞서 싸웠습니다. 나는 모든 인간이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라는 이상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살고 싶은,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나는 그 이상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자유를 향한 행보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1991년 7월 더번에서 30년 만에 아프리카 전국회의에서 만델라를 만장일치로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그 회의에서 350여 년에 걸친 인종분규가 종식되고,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다. 1994년 4월 27일 최초로 1인 1표 제의 투표로 만델라가 65%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5월 10일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며 드디어 국민이 모두 주권자가 되었다. ‘자유를 향한 오랜 여정’이 종언을 고하였다. “크나큰 재앙으로부터 인류 전체가 자랑스러워할 사회가 탄생했습니다.”
새로운 대통령은 선거에서 5%이상을 득표한 정당은 약속대로 모두 국정에 참여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나서 할 일은 ‘민주주의’와 ‘화해’하는 일이었다. 민주주의는 언론의 자유이다. 만델라는 언론을 조금도 속박하려 들지 않았다.
화해를 위해서는 복수심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옛 대통령 피터르 보타를 만나기 위해 은퇴한 그의 거처까지 찾아 갔다. 상징적인 인물로 아파르트헤이트의 창안자인 헨그릭 페르부르트 미망인이 사는 저택에 가서 차를 함께 마셨다.
만델라에게 교수형을 구형한 검사 퍼시 유타를 식사에 초대하였다. 화해는 분명 만델라의 정치적 전략적 핵심의 요소였다. 2007년 은퇴한 세계지도자들의 모임인 세계원로회의(The Elders)를 출범시킨다. 지미 카터 대통령을 비롯한 지구촌에 큰 영향을 끼친 전직 지도자들이 총 망라하고 있다.
1993년 만델라와 데 클레르크 대통령이 함께 아파르트헤이트 폐지에 대한 공로로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아래는 노벨 상 수상 소감 일부이다.)
“나는 전쟁, 폭력, 인종주의, 억압과 탄압, 그리고 전 국민의 빈곤을 유발하는 사회체제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들고 일어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대신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제부터 서로 갈라놓은 비인간적인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투쟁했던 이 땅의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기준으로 측정될 것이고 측정되어야만 합니다.”
“흑인과 백인을 차별하지 않는 세상에서 인류 모두가 천국의 아이들처럼 살아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모두다 평등하게 태어났고, 우리들 각자가 삶, 자유, 번영, 인간의 존엄성을 가질 수 있는 사회, 그리고 공정한 정부에 대한 정당한 몫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창조 할 것입니다.”
에이즈는 어떤 자연재앙보다도 많은 희생자들을 냈습니다. (결혼, 자녀 이야기)
1944년 요하네스버그에서 흑인 여성으로 오를 수 있는 제일 훌륭한 직업인 간호사 공부를 하던 에블린 메이츠(Evelyn Mase)와 만나 결혼하여 ‘뎀비’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에블린과는 1956년에 정치를 최우선시하는 만데라와 성격 차이로 어려운 시련을 겪다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딸을 잃게 되자 부인은 ‘여호와의 증인’에 빠지게 되어 이혼하게 된다. (아들 뎀비는 1969년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2년 후 1958년 만델라는 지나가다가 큰 병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았는데, 그녀가 흑인으로 최초의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놈자노 위니프레드였다. 그녀와 재혼을 하였다. 그다음 해 2월에 딸 제나니를 낳았다. 만델라의 이름의 뜻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인데다가, 놈자노의 이름의 뜻이 ‘싸우는 여인’ 이라 그런지 죽이 잘 맞았다고 한다. 만델라가 교도소에 있을 때 뒷바라지와 저항 운동에도 열심이었다.
위니가 국내 안전법 위반으로 체포되었고, 혐의도 없이 투옥되더니 역시나 아무런 설명도 없이 석방되었다. 위니는 어린이집을 차렸고 병원 개설을 위한 기금도 모았다. 어머니를 닮은 제나니는 17세에 소망이란 시를 써서 미국에서 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배신자는 처형 받아야 마땅하다고 하는 과격분자들과 어울리면서 위니는 이성을 잃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96년 3월 3년간의 별거생활 끝에 위니 만델라와 이혼을 하고, 1998년 그사라 마셀 여사와 외국 저명 인사 등 하객 2천 명을 초청하여 결혼식을 거행한다. 마셀 여사는 모잠비크 사모라 마셀 대통령의 미망인이다. 1990년 만델라가 아프리카, 인도, 유럽 등을 순방하다가 만나게 되었다.
2005년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인 마카토 만델라가 에이즈로 사망한다.
만델라는 에이즈 퇴치 운동에 앞장 선다. “이것은 전쟁입니다. 에이즈는 우리 나라 역사상 그 어떤 전쟁보다도, 우리가 겪었던, 그 어떤 자연재앙보다도 많은 희생자들을 냈습니다.”
1990년 인도 최고 훈장
1991년 베이징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
1994년 노벨 평화상
1995년 영국 오더 오브 메리트
2000년 세계아동인권상
2002년 루즈벨트 자유상
2004년 제8회 만해 대상
권력은 결국 부패하며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들 즉, 용기, 자유에 대한 열정, 용서, 열린 마음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홍영일장로는 록원교회(장창만목사시무)에서 은퇴한 장로로 염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고 현재는 시골 초야에 머물면서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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