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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우박사, 중세 교회법에 저항한 마틴 루터

  • 법과 교회
  • 입력 2015.11.12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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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재판은 오늘날 개신교재판처럼 부패온상

루터의 종교개혁과 로마 가톨릭 교회법 비판에 관한 소고

                                                                            김 정 우 

   

목차


Ⅰ. 서언

Ⅱ. 로마 가톨릭 교회법의 위상과 폐해

1. 정치적․법적 실체로서의 교회법의 존재 및 위상

2. 교회법의 폐해

Ⅲ. 로마 가톨릭 교회법에 대한 비판

1. 평등의 가치를 침해하는 교회법에 대한 비판

2. 재산권적 가치를 침해하는 교회법에 대한 비판

3. 교회법상의 파문의 오용 및 남용에 대한 비판

4. 교회법 전반에 대한 루터의 비판과 이유

5. 교회법에 대한 종교개혁가들의 비판

Ⅳ. 로마 가톨릭 교회법에 대한 비판의 영향과 결과

1. 루터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종교재판

2. 성직자의 세속법적 의무 이행 및 세속법에 의한 처벌

3.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재정적 수탈 행위의 감소

4. 교회법적 관할 영역이 세속법적 관할로 이전됨

5. 종교개혁 신학의 법제화를 통한 루터주의 교회법의 제정

Ⅴ. 맺음말

1. 요약

2. 한국 개신교계의 교회법 문화에 던지는 도전과 함의


Ⅰ. 서언

독일의 교회사학자 아돌프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은 종교개혁의 혁명적인 본질을 신적인 교회법이 절하되었다는 사실로 평가했고, 독일의 기독교 역사철학자인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 1865-1923)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교회법의 영역에서 중요한 혁신들이 도입되었다고 평가했다.

한국 개신교의 주류는 장로교이고 장로교 교회법은 신학적으로 개혁주의 유산에 기초한 칼빈주의 교회법의 영향을 받았다. 올바른 개신교 교회법 제정을 위해 참고할 비교법적 자료는 1차적으로는 외국의 장로교 교회법이겠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개신교 교회법의 원리의 기초를 알기 위해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법에서 개신교 교회법의 초기 형태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루터주의 종교개혁가들이 어떠한 투쟁과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시기를 지나면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루터주의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비판이 되었던 로마 가톨릭 교회법과 교권 구조의 폐해의 잔재를 한국 개신교계나 교회법이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점검으로서의 가치와 향후 한국 개신교 교회법전의 제정에도 중요한 통찰을 주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Ⅱ. 로마 가톨릭 교회법의 위상과 폐해


1. 정치적⋅법적 실체로서의 교회법의 존재 및 위상

중세 세계에서 정신적 구심점의 역할을 했던 교회법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서유럽에서 교회의 권위가 강화되고 교회의 조직이 체계화되어가면서 교회법은 단순한 영적 규율의 범위를 넘어 현실 세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법으로 작용하였다. 혼인과 상속 등 현세적인 문제조차 영적인 것으로 연관 지어 규정하고 있던 교회법은 중세의 사람들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종교개혁 이전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독일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엄청난 법적․정치적 실체였다. 교회는 독일에서 광범위한 영적인 재판 관할권을 주장했다. 교회는 성직자, 순례자, 학생, 이단자, 유대인, 이슬람교도들에 대해 관할권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교리, 예배의식, 교회재산, 교육, 자선, 상속, 구두 약속, 선서, 도덕적 범죄와 혼인 등에 걸친 문제들에도 관할권을 행사하였다. 또한 교회는 보다 세속적 권력에 속하거나 혹은 세속 권력과 동시 재판관할권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재판관할권을 요구하였다. 교회 법원은 교회법상의 실체법적, 절차법적 규정에 의하여 사건을 판결하였고 사건들은 교회 법원의 심급에 따라서 상소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교황의 법원에까지 갔다.

1200년과 1500년 사이의 서양 세계에서 교회는 단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예배를 위해 모이는 자발적인 모임이 아니었고, 교회법도 신앙인들을 지도하기 위한 영적 훈련의 법전이 아니었다.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들을 통치하는 서양의 하나밖에 없는 보편적 주권자였다. 교회법은 서양의 유일한 보편적 법으로서 유럽 전체를 통해 재판관할권을 행사했다. 이 기간에 가톨릭 교회는 교회법을 가지고 최고의 권위를 행사했다. 이 당시 교회는 법을 선포하고 집행하는 힘, 문자 그대로 “법을 말하는”(jus dicere) 엄청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권한 행사는 교회를 그리스도교 제국의 입법자인 동시에 재판관으로 만들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 제국 전체에 걸쳐 통용될 수 있는 일련의 교황의 교령, 교서, 공의회의 법령과 칙령들을 공포하였다.

2. 교회법의 폐해

교회법은 성례(sacrament)를 통해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는 인간 생활의 모든 국면들을 상세하게 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교회법상의 성례는 교회를 모든 도덕적 행위에 대한 사법권을 지닌 권위 있는 기관으로 만들었고 성직자 계급의 특권적 신분과 세속 권력 대하여 우위권을 내세우는 교회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데 다른 어떤 것보다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법은 처음에는 정의와 인간애의 원리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마치 바리새인들이 유대인들의 삶을 세세하게 규제하려고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개별적 행위들을 상세하게 규제하려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교회법 제정자들은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도덕 원리들을 도외시한 채, 많은 법규들을 끊임없이 제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사고의 발전을 크게 저해했으며, 사람들에게 너무나 무거운 멍에를 씌웠다. 교회법은 다가올 저 세상을 돈과 결부시키고 교회법학자들은 죽음의 문제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공포심을 조장하였다. 중세의 교회법은 교황 제도가 지니는 장단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이 점에서 교황제도에 대한 비판은 곧 그 제도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었던 교회법에 대한 비판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교황은 교회의 법 제정자였다. 절대적 권력을 통해서 그는 기존의 교회법을 발전시키거나 특권과 사면을 허락함으로써 임의적으로 파기해 버렸다.

가능한 한 많은 청구권들을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교황은 조직적으로 교회법적 장애들을 증가시켰다. 교회법은 성직자들이 무슨 죄를 범하든 교회 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함으로써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교회법은 교황의 권리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막강한 근거가 되었다. 교회법의 독재성이 마침내 유럽의 지식인들이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신앙 문제에서 인간 입법자의 감내할 수 없는 오만을 드러냈고, 개인의 자유를 크게 침해했으며 교황은 자신의 공식적인 무오류성에 힘입어 어느 때고 자신의 판결로 교회법을 대체할 수 있었다. 이하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 폐해의 유형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성직자의 세속적 사법권으로부터의 면제

성직자들은 그들의 직업이 지닌 성스러운 성격으로 인해 모든 세속적 사법권으로부터 면제되었다. 그들 계급의 가장 중요한 특권 가운데 하나는 교회법에 따라 교회 법원에서만 재판받을 권리였다.

성직자가 세속 법원의 사법권으로부터 면제될 권리를 지니는가 하는 문제가 세속 권력에 의해 제기되었을 때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유일한 거룩󰡑(Unam Sanctam)이라는 교령을 공포하였다. 중세 교황의 교령 중 세속적 권위에 대한 영적인 권위의 우위를 가장 강력하게 표명한 이 교령은 영적인 문제와 세속적 문제 모두에 대한 교황의 우위권을 뒷받침하는 기존의 논의들을 재확인하였다. 이 교령은 로마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모든 인간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단호하게 선언하였다. 이는 법적 처벌에 있어서 불평등을 초래하였고 이러한 교황권의 남용으로 인해 중세 말기의 교황권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2) 교회법상의 유보제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는 교황들 가운데 처음으로 ‘교황의 성직 임명 유보’(reservation) 혹은 교황의 직권적 성직 임명을 대규모로 시행했다. 특히 교황 클레멘트 4세는 성직 유보가 교황청을 방문하는 동안 공석이 된 모든 성직과 성직록을 교황이 임명하고 수여할 권한을 지니도록 법제화했다.

1295년에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이 법을 다시 확대하여서, 교황청 방문에 나선 성직자가 이틀 이내에 죽으면 어느 지점에서 죽든지 상관없이 그의 모든 성직록이 교황에게 귀속되도록 했다. 14세기 동안에 교황권은 교회법상의 유보(Reservation)라는 제도를 통해서 교권의 임명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노력했고, 종교개혁 1세기 이전부터 교황은 각종 구실을 제시하며 어느 특정한 성직 수혜자에게 공석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 교회의 권한임을 선포했다. 교황 요한 22세는 교황의 비호 아래, 어떠한 특권이 유보되어있는가를 밝히는 일련의 규율을 제정하였는데 교황청의 법률제정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요한 헌장(Constitutiones Johanninae)은 교회의 모든 특권을 교황에게만 묶어두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유보제도는 교황 요한 22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점차적으로 확대되었다. 계속적으로 증대되는 교황청의 성직 유보권은 교회법과 유럽 국가의 세속법 사이에서 끊임없는 마찰을 빚곤 하였다.

이 과정의 가장 중요한 측면들 가운데 하나는, 교황이 자리가 빈 성직에 후임자를 직접 지명하는 것을 통해 성직을 임명하는 권한을 점점 더 많이 차지해 간 것이었다. 교황은 그의 완전한 권세에 입각하여 모든 성직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다는 원칙을 선언함으로써 교황 인노센트 3세가 시작했던 관행, 즉 교황이 직접 임명하는 성직을 유보하는 관행은 13세기 동안 점점 더 늘어났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아비뇽 교황들은 유보된 성직의 범위를 크게 넓혀, 결국 그러한 성직에는 대부분의 선출직(대주교, 주교, 그리고 수도원장의 직책들)과 아주 많은 수의 하위직(임명직으로 통상 성·속의 후원자가 마음대로 임면하는 참사회원이나 교구 사제)이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성직 임명권은 교황이 교황청 관리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교황의 수입을 증대시켜 주었다. 성직들이 교황의 임명분으로 유보되는 기간 동안, 그리고 성직 수임자가 교회법상의 자격을 구비하지 못한 채 성직을 보유하고 있는 동안 그 성직들에서 발생한 수입은 교황청 재정으로 귀속되었다.

아비뇽 시대에 교황들은 유보된 성직으로부터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기간, 즉 전임자가 죽은 때부터 그의 후임자가 지명될 때까지의 기간에 나오는 수입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들이 아비뇽 교황들에 의해 줄곧 크게 확대되고 더 체계적으로 부과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개 유보된 성직에 부과되었으므로, 유보의 관행이 확산됨에 따라 함께 확대되었고, 사실상 유보의 관행을 확산시킨 주된 이유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 이들은 교황의 수입에서 큰 몫을 차지했고, 따라서 교황청의 재정 관리들에게 중대한 관심사가 되었다. 교황에 의한 성직 임명제의 결과 가운데 하나는, 충격을 받을 정도로 많은 지역에서 교구민들이 목자가 없이 방치되어 있거나 또는 성직 대리인에게 내맡겨져 있게 된 것이었다.

(3) 교회법상의 특별면제 제도

한편 교회법을 위반하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특별면제(dispensation)가 부여되었다. 즉 금지된 촌수 내의 혼인을 허가해 주고, 2개 이상의 성직을 보유할 수 있도록 교회법의 제한을 없애주며, 무역이나 혹은 여타의 부당한 이익확보에 대해 허가를 해주고, 고리 대금업자를 사면하고, 사생아를 적자로 인정하며, 그 밖에 비슷하게 교황의 완전한 권세에 입각해 특별히 허락해 주는 사안들에 대한 대가로 온갖 사례금을 받아들였다. 교황은 항상 자신이 만드는 법보다 더 우위에 있는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교황은 법 위에 있는 법 혹은 절대법이었으므로 교회법상의 특별면제 제도는 목적에 부합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교황 자신이 교회법보다 우위권을 가질 수 있었다. 평신도와 사제에게 하사되는 모든 종류의 특허와 특별면제에 대해서도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다. 적법한 혼인 밖에서 태어난 사제, 자신의 성직록에서 떠나 있기를 바라는 사제, 법정 연령 이전에 임명받고자 하는 사제가 모두 특별면제를 받아야 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돈을 내야 했다. 비교적 큰 액수는 교황청 재정과 추기경의 재정으로 곧장 들어갔다.

작은 수수료들은 공증인들과 문지기들과 추기경 개인들과 그 밖의 관리들에게 건네졌다. 이런 중개인들이 손을 벌린 채 긴 줄로 서 있었다. 오늘날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한 마디로 정교한 뇌물 체계였다. 특별면제라는 교회법상의 제도는 비록 형평이라는 취지를 가지고 제정된 제도였지만 이는 재량권의 남용의 여지가 있는 제도였다. 특히 이러한 특별면제제도는 금전으로 권리를 사는 것이었기 때문에 법질서의 안정성과 구체적 타당성을 심하게 훼손하는 법제도였다고 볼 수 있다.

(4) 부패한 교권중심의 사법제도

교황청 최고 법원(Roman rota)은 일상적인 사법 업무를 수행하였다. 교황청 조직 가운데 어느 분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발달한 분야는 각종 법률 소송을 다루던 분야였다. 교황청에는 각종 청원과 불평을 들어주고, 판결을 기록하고, 판결을 집행하는데 필요한 문서를 작성하고, 발송된 서신들의 사본을 보관하는 복잡한 조직이 있었다. 로마 교황청은 전 서방교회에서 가장 높은 항소법원이었다. 이것은 법률사업에 관련된 막대한 금액의 돈거래를 의미했으며, 필연적인 법률적 경비지출을 뜻했다.

교황청은 주교나 대주교 법원에서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각종 재판까지도 기필코 이곳까지 끌어 오곤 하였다. 이러한 재판과정은 교권적이고 재정적인 목적에서 수행되었다. 재판 업무가 대부분 로마에서 진행됨에 따라 막대한 돈이 로마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고, 교황은 가난한 소송 당사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막대한 이자가 부과되었다. 교황청은 서유럽의 최고 재판소가 되면서 과거에는 꿈도 꿔보지 못했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무수히 많은 항소 건이 교황청에 도달했다. 항소자들은 돈과 시간만 있으면 아무리 하찮은 사건이라도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을 수 있었다. 제후들과 왕들, 참사회들과 주교들, 수도원들과 대수도원장들로부터 항소가 쏟아졌다. 교황청은 항소 건을 가지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사람들에게서 마르지 않는 수입원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해서 유럽 전역으로부터 거대한 양의 소송 업무가 교황청 대법원으로 몰려들어오자, 교황청은 일단의 사무직원들을 필요로 했으며, 이들에 대한 월급은 유럽 전역에서 거두어들인 유보된 성직록에서 일부를 충당하고, 나머지 부분은 소송 당사자들이 내는 소송비용이나 뇌물로 충당하였다. 교황청의 법원은 악명 높은 느림보, 강탈자, 금전만능의 세상이었다. 모든 서류는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손을 거쳐야 했으며, 각 단계마다 이에 상응하는 수수료를 지불했으며, 소송비용도 교황청 대법원이 정하는 액수에 따르더라도 이미 과도한데, 공식적인 조견표 이외의 비정규적인 수수료가 수없이 가산되어서 산처럼 높았다. 로마교회는 특권, 특별면제, 성직록 구매 등의 업무가 수행되는 곳이었으며, 소송 당사자들이 여러 부서에 간청하고 다녀야 하는 비정한 곳이 되어 버렸다.

Ⅲ. 로마 가톨릭 교회법에 대한 비판

루터는「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논문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법에 대한 반감을 다음과 같이 극단적으로 표현하였다.

“교황이라는 직책과 그의 법령에서는 좋은 것이 나와 본 일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교황의 영적 법령에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에게 교훈이 될 만한 것이 단 두 줄도 없고 더구나 그릇되고 위험한 법령이 너무 많아서 한꺼번에 없애버리는 것이 좋겠다.”

이 표현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루터의 비판은 교회법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반감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하에서는 루터가 비판했던 교회법상의 제도들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평등의 가치를 침해하는 교회법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고, 이어서 재산권적 가치를 침해하는 교회법에 대한 비판, 그리고 교회법상의 제재였던 파문의 남용에 대한 비판의 내용들을 검토한 후 루터주의 종교개혁가들이 왜 로마 가톨릭 교회법을 그토록 강하게 비판했는지에 대해 종합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1. 평등의 가치를 침해하는 교회법에 대한 비판

교회법의 내용은 철저하게 성직자 우위중심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성직자와 관련된 문제는 교회에 재판관할권이 있음에 따라 세속법적 처벌에서 성직자가 면제됨으로 인해 법적 처벌에 있어서의 평등의 가치가 실현되지 않고 있었다. 이하에서는 영적 권위를 세속 권위보다 우위에 두는 교회법적 현실에 대한 루터의 비판과 루터가 제시하는 ‘법 앞에서의 평등사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영적 권위를 세속 권위보다 우위에 두는 교회법

로마의 교황주의자들은 세속 권위가 그들을 억누를 때, 세속 권위는 그들을 제압할 어떤 권리도 없으며 반대로 성직자의 권위가 세속 권위 위에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들은 교황, 주교들, 사제들, 수도사들을 영적 계층이라고 부르고 영주들, 군주들, 직공들, 농부들을 세속적 계층이라고 불렀다. 교회법은 성직자들의 자유와 생명, 재산에 대해서는 너무 높게 관심을 두었던 반면에 평신도는 그들만큼 영적이고 선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또는 교회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해왔다.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렇게 차별하는 것은 근거가 없고 이는 단지 인간의 법과 조작으로부터 나온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교회법은 “설령 교황이 큰 무리의 영혼들을 악마에게 넘겨줄 만큼 사악하기 그지없다고 할지라도, 그를 파면시킬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는데 루터는 로마 교회가 이 가증스럽고 사악한 근거에 따라 모든 체계를 세웠다고 비판하였다. 

(2) 평등에 관한 신학사상의 법적 적용: 차별 없는 법적 처벌의 요구

루터에 의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 계층에 속하며, 그들 사이에 직무상의 차이 이외에는 아무 차이도 없었다. 세상 정부가 성직자를 제압하지 못하며, 그들을 벌해서는 안 된다는 교회법적 주장은 옳지 않고 세상 정부는 악한 자를 벌하고 선한 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칼과 채찍’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세상 권력은 악한 자들을 징벌하고 경건한 사람들을 보호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것이므로, 해당자가 교황이든 주교들이든 사제들, 수도사, 수녀들, 그 밖의 누구든 그 신분에 관계없이 그리스도교의 전체를 통하여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교황이든 주교이든 사제들이든 고려치 말고 벌을 받아 마땅하거나 필요할 때에는 처벌하고 죄과를 물어야 했다. 만일 누군가가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가 벌을 면할 충분한 이유는 없고 죄가 있는 곳에서 벌로부터 도피할 길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만인제사장’이라는 신학사상을 세속법의 영역, 특히 법적 처벌에 있어서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법적용에 있어서의 평등’이라는 영역에 적용하였다.

2. 재산권적 가치를 침해하는 교회법에 대한 비판

(1) 교회법적 탈법행위를 통한 재산권 수탈에 대한 비판

루터는 교황청이 교회법에 위반되지 않으면서도 교묘하게 영지들을 보유할 수 있는 탈법적 수단들을 고안해냈다고 비판하였다. 교회법에 따르면 두 교구나 두 주교구 등이 있을 때 두 개를 동시에 보유할 수 없는 인콤파티빌리아(incompatibilia)라고 불리는 몇 개의 영지들이 있었다. 이런 경우에 로마 교황청과 교황은 거기에 연합(unio)과 합병(incorporatio)이라는 주석을 달아 교회법을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즉 많은 인콤파티빌리아들을 통합함으로써 마치 하나의 성직록만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해서 교회법에 저촉되지 않게 하였다. 따라서 그런 주해를 교황과 그의 서기관에게서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교회법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는 교황청과 교황 자신이 교회법 자체를 교묘하게 빠져나가 법을 위반하는 사례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교황은 또한 이러한 거래를 처리하기 위한 부서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 교황청 안에 있는 다타리우스(Datarius)의 집이었다. 영지와 성직록을 거래하려는 사람은 이곳을 통해 교회법의 법망을 교묘하게 합법적으로 피해갈 수 있는 권리를 얻었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취득한 모든 재산들도 합법화 되었다. 따라서 루터에게 있어서는 모든 교회법이 금전을 갈취하기 위해 제정된 것처럼 보였다. 

(2) 교회법상의 유보 제도에 대한 비판

교황은 또한 ‘심정의 유보와 전권에 의한 자기규정’이라는 교회법적 권한을 행사하였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로마에서 공식적으로 성직록을 얻게 되었을 경우라도 다른 사람이 돈을 가지고 나타나 이미 제공된 성직록을 원하는 경우, 교황은 그 성직록을 처음 사람에게서 빼앗아 그에게 주었다. 만일 사람들이 이를 부당하다고 말하면, 교황은 '자신이 이제까지 그런 영지에 관해 생각하거나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것을 가슴과 심정으로 자기 자신과 절대권능에 의거하여 유보했다'는 교묘한 답변으로 합리화하였다. 또한‘허위적인 심중 유보’(reservatio pectoralis)라는 조항을 통해서도 교황은 재정적 수탈을 단행하였다.

루터에 의하면 '유보 제도'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돈을 갈취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불쌍한 양심의 소유자들을 함정과 혼란에 빠지게 하는 수단이 되었다. 교황은 모든 교회법을 그 자신의 마음 속에 두고 있어서, 법적 현실에 있어서 교회법은 책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황과 그에게 아첨하는 자들의 자의적인 선택에 달려 있었다. 어떤 사안이 간혹 교회법에 철저히 기초해 있을지라도, 교황은 항상 자신의 뜻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법이 교황의 마음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오늘날의 교회법적 현실에 적용해 본다면 사안에 적용될 교회법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그것을 유권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주체가 주관적 의도를 많이 개입시킬 경우 올바른 법적 판단이 이루어지지 못할 여지가 많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3) 교회법상의 특별면제 제도에 대한 비판

로마 가톨릭 교회는 혼인에 관한 교회법상의 장애사유들을 관대하게 처리해 주는 공식적 관행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이러한 관행은 당사자들이나 그 자녀들에게 불공평하게 작용하였다. 당사자들은 금전을 제공하면 교회법상의 장애사유들부터 특별면제를 받을 수 있었다. 부패한 성직자들은 면제의 대가를 충분히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 자신들의 재정적인 이득을 위해 어떠한 장애사유이든 상관없이 관대하게 해제시켜 주었다.

성직자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장애사유들에 대한 특별면제를 하면서 받은 뇌물에 대해 종교개혁가들은 신랄한 공격을 하였다. 루터는 그 당시에 ‘돈으로 합법화할 수 없는 혼인의 장애사유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했고, 인간이 만들어낸 이러한 규칙들은 돈을 긁어모으고 인간의 영혼들을 올가미에 잡아들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남용은 신성한 목회자의 직무를 더럽힐 뿐 아니라, 부자들에게만 장애사유들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위축시키는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법이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특별면제에 대한 비판이 갖는 법적 의미는 무엇보다 법규정이 원칙에 따라 집행되지 않을 때 초래되는 법적 결과들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법집행의 주체가 법원칙을 설정해 놓고 이에 대해서 금전으로 예외를 허용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과 구체적 타당성이라는 법적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과가 초래하는 것은 법에 대한 신뢰의 대량 상실이다. 법이 이렇게 운용될 경우 어느 누구도 법을 지키려 하지 않을 것이고 오직 법규정을 탈피하려는 생각만 하게 될 것이다. 이럴 경우 사회 속에서 인간의 외적 행위를 규제하려는 법을 계속 만들어낼지라도 법을 집행하는 주체가 그 법을 부당하게 적용하고 법적용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그 법으로부터 탈법의 여지가 가능하도록 운용한다면 그 법은 본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3. 교회법상의 파문의 오용 및 남용에 대한 비판

(1) 문제 상황

당시 독일에서 흔히 남용되던 성직자의 권한이 파문권의 행사였다. 원래 만성적인 부도덕을 교정하기 위한 종교적 징계였던 파문은 이제 전혀 대수롭지 않은 빚, 법정 비용 또는 행정 비용의 미지불에 대해서도 독일인을 괴롭히는 수단이 되었다. 일부 성직자는 가난한 교구민들에게 파문으로 위협하여 매주 교구의 제분업자, 숙박업자, 제빵공, 제화공, 대장장이, 재단공, 목양업자, 목축업자 그리고 그 밖의 수공업자들로부터도 세금을 징수하였다.

이는 파문을 심각하게 두려워했던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평신도로부터 생명의 피를 빨아 먹고 있다고 제후회의 참석자들은 불평하였다. 교황들이 파문의 위협을 통해 강화시킨 수입원들의 종류는 모든 성직자들에게 부과되는 십일세인 직접 소득세, 일정한 촌수 내에서는 혼인을 금지했던 교회법의 조항들에서 면제시켜 주는 대가로 받는 수수료, 무자격 성직자가 성직록을 받는 일에 대한 교회법적 제한들을 제거해 주거나, 교회법이 허용한 범위를 초과해서 재산을 축적한 것을 묵인해 주는 대가로 받는 수수료, 고리대금의 죄에 대한 사면의 대가로 받는 수수료 등이 있었다. 교회법상의 파문 제도는 그 본래의 법적 취지와는 다르게 재정적 착취의 수단으로 오용 및 남용되고 있었다.

(2) 루터의 비판 내용

루터는 영적 고위층이 행사하는 파문에 세속적 권력을 사용하는 것을 비판했다. 루터에게 있어 파문에 세속적 권력을 사용하는 것은 성서의 진정한 의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파문이 부당하게 부과될 때 그것은 시정되어야 하며 이러한 것은 교회법에 의해서도 금지되고 있었다. 당시의 교회법은 “파문은 독약이라기보다 치료약이므로 그것은 그것에 예속되는 사람이 그것을 멸시하지 않는 한, 개선을 위해서만 처벌하고 파멸을 위하여 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영적인 재판자는 파문을 개선하고 치료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교회법의 본문에 따르면 파문은 매우 조심스럽게 파문을 당하는 사람의 개선과 치유를 구해야 하는데 그들은 오직 겁을 먹은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방식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파문으로 두려움을 일으키고 그것에 위엄을 부여하였다. 영적 권위자들은 파문을 행사하며 그것이 정당하든 부당하든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해야 하고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 특히 영적인 고위층에 속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고, 이러한 행위는 무력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려 하는 동시에 교회를 두려움의 포로로 만들려는 자신들의 맹목적이고 신성 모독적인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폭군들은 그들이 백성들에게 파문의 선함과 유익을 숨기고 또 그것을 악용하였기 때문에, 파문에 대한 두려움은 평민들을 죄에 대한 두려움보다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몰아가는 영적 재판자들의 압제적인 위압과 위협들을 통하여 너무나 거대하게 되었다. 고위 성직자들, 주교들, 그들의 관리들은 파문을 조급하게 사용하지 말아야 했다. 루터가 볼 때 파문을 자주 사용한다는 것은 많은 법과 많은 명령들을 제정한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루터에게 있어 많은 법들을 제정한다는 것은 가련한 영혼들에 대하여 많은 올가미를 놓는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당시에 파문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죄인들이 특히 거물들일 때, 그들을 처벌하지 않고 방치함에 대해 비판하였다.

루터는 파문은 성서가 그것을 사용하도록 지정하고 있는 곳 외에는 결코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파문은 올바른 신앙을 가지지 않은 자나 공적인 죄를 짓고 사는 자들에 대해서만 사용되어야 하며, 현세적인 재산을 위하여 사용되어서는 안되지만, 현재의 사태는 전도되어 있다고 보았다. 대부분의 파문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모독하는데 이용되고 있으며, 모든 파문은 현세적인 재산을 위해서만 행해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영적 불법이야말로 재산 축적의 근원지라고 비판하였다. 파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인권이 제재의 성격 및 목적과 관계없이 침해당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법의 제재가 본래의 제정 목적이나 취지와 무관하게 실행되고 있는 현상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4. 교회법 전반에 대한 루터의 비판과 이유

이상에서 루터가 교회법에 대해 비판한 개별적인 영역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내용들을 비판의 이유라는 측면에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루터는 교회법이 교황의 폭정을 조장한다고 비판하였다. 교회법학자들은 교황을 세상의 주인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여겼다. 따라서 교황은 무제한의 입법, 사법, 행정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심지어 보편 공의회조차 교황권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없었다. 교황과 그의 사절단은 성서, 전통, 공의회의 교리에 따라 살지 않고 법의 규칙들을 그들이 적합하다고 보는 대로 파괴하고 변화시키고 제거하였다.

그는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도 교회법을 폐기하고 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독일 민족들도 교회법관련 서적들을 거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루터는 특별히 불의를 야기시키는 사건에 있어서 교황과 그의 사절단이 형평이라는 명목 하에 특별면제를 허용하면서 자의적인 권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중세 교회법을 형평의 모체라고 불리우게 했던 이 특별면제라는 제도가 루터에게는 교황을 폭군의 아버지로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둘째, 루터에게 있어서 교회법은 남용적이고 자기 숭배적이었다. 수 세기 동안 교회법학자들은 성직자들에 관한 일련의 특권과 면제들을 만들어 왔고 세속권력에까지 그러한 관념들을 주입하였다. 따라서 지역 성직자들은 그러한 특권들을 이용해 수많은 재단과 기부로 유지되는 면세 재산을 거대하게 축적했다. 이렇게 축적된 재산을 가지고 교회는 성직자의 사치스런 삶을 조장하였다. 세속 권력이 이런 관행들에 도전하면 지역 성직자들은 그들의 특권을 이용하여 그 사건을 교회 법원으로 보내고 지역 교회 법원은 다시 파문과 성사금지령의 위협으로 세속 재판관할권을 강탈하여 그들의 영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사람과 문제에 대하여 교회법을 적용하였다.
 
셋째, 루터에게 교회법은 탐욕과 착취의 도구였다. 교회는 사치스러움과 서열제를 유지하기 위해 무거운 성직 취임세와 십일세, 종교적 세금을 독일 민족들에 부과하였고 성인들의 유물과 장례의식, 성지순례 등을 고안해 사람들의 재산을 사취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루터가 보기에는 뻔뻔스러운 강탈과 사기행각이었다.

루터에게 있어 교회가 법을 집행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교회의 본래 목적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의 법적 권위를 교황이 아니라 제후들에게 맡겼고, 제후들은 세속권력이 사회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법을 적용하기 위해 적절하게 사용되도록 부름을 받은 신적 대리자였다. 따라서 교회법을 공포하고 강화함에 따라 교황과 주교들은 제후들의 권위를 강탈한 것이었다. 1520년 초기에 루터는 모든 법적 권위들은 성직자들이 아닌 세속 권력에 맡겨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5. 교회법에 대한 종교개혁가들의 비판

교회법의 폐해는 루터뿐만 아니라 많은 종교개혁가들에 의해서도 비판을 받았다. 멜란히톤은 1521년에 성직자들은 교회의 특권, 그들 자신의 수입에 관해서 그들 자신들을 위해 법을 통과시켰는데 이것은 불경건하고 놀라울 정도로 폭군적인 것이라고 했고 그들은 마치 어느 누구에 대한 관할권에 대해서도 세상의 지배자인양 행세하고 있다고 했다.

유사한 반응이 멜란히톤의 동료 신학자이자 법학자인 유스타스 요나스(Justas Jonas)로부터도 흘러나왔다. 그는 1521년 비텐베르크대학 교회법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임명 직후에 그는 교회법이 자기 숭배적인 악취를 풍기고 있고 성서적 진리를 배반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교회법 교수직을 포기했는데, 루터와 멜란히톤이 개입하여 신학부 교수직으로 임명되었고, 거기서 교회법에 저항하는 강의와 설교들을 꾸준히 행하였다.

몇몇 종교개혁가들도 심각한 불의를 야기하는 개별적인 교회법 규정들의 축출을 촉구하였다. 뉘른베르크의 개혁가 벤체스라우스 링크(Wenzeslaus Linck), 스트라스부르크의 개혁가 볼트강 카피토(Wolfgang Capito)는 성직자의 세속법상의 소추로부터의 면책 특권의 폐지와 과세 및 부역, 다른 시민적 의무로부터의 면제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들은 그러한 특권들을 하나님과 이웃 사랑과 인간의 본성과 이성에 반하고 공동체에게 광범위하게 손해를 끼친다고 보았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성직자 또한 세속공동체 내에서 모든 사람들처럼 세속적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란시스코 수도원으로부터 나온 요한 에벌린 폰 귄츠부르크(Johann Eberlin von Günzburg)는 황제가 교회법의 남용들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비판의 주요 내용으로는 지역적 사안이 항상 로마로 상소되는 것, 교회법 규정으로부터의 용이한 특별면제, 성사 금지령과 파문의 과도한 사용, 교회의 직책 및 교황청 법원의 인원과 재정의 과도한 증대, 교황에게 성직 취임세를 내는 것, 면벌부, 수도원이나 자선기관의 재산 축적 등이었다.

Ⅳ. 로마 가톨릭 교회법에 대한 비판의 영향과 결과

루터의 로마 가톨릭 교회법에 대한 비판의 영향을 몇 가지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루터의 교회법에 대한 비판이 로마 가톨릭 측의 종교재판을 야기시켰던 점을 고찰하고, 두 번째는 루터 및 종교개혁가들의 교회법에 대한 비판의 내용들이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가시적으로 어떤 긍정적 변화들을 가져왔는가의 측면을 살펴본다. 세 번째로 종교개혁가들이 종교개혁 이전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법적 관할에 속해 있었던 영역들에 자신들의 신학을 적용하면서 법제화 시켜나갔던 루터주의 교회법을 중심으로 검토한다.

1. 루터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종교재판

종교개혁이라는 사건은 단순히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사건이 아니라 교회법과 관련된 법적인 사건이었다. 여기서는 루터의 로마 가톨릭 교회법에 대한 비판과 이로 인한 로마 교황청의 기소, 루터에 대한 심문과 보름스 제국회의에서의 재판의 사건을 법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어서 루터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종교재판 사건과 루터의 대응이 갖는 헌법적인 의미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카예탄 추기경의 심문과 루터의 공의회 항소

로마 교황청에서는 1518년 5월 혹은 6월에 루터에 대한 소송이 시작되었는데 교황청 주교인 히에로니무스 지누치가 교황 측 판사로서 사전심사를 담당했다. 루터 문제에 대한 로마의 사전심사는 그의 로마 소환 요구로 이어졌는데 이단성과 교회 직권에 대한 반항이 그 이유였다. 루터는 통지를 받은 후 60일 이내에 응해야 하는 소환장을 1518년 8월 7일에 받았고 즉시 자신의 영주에게 그의 문제가 독일에서 처리되도록 요청하였다. 이는 로마 교회 내에서 소송이 진행될 경우 법적인 중립성이 보장되지 않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제후 측은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황제에게 로마로의 루터의 소환을 중지시키고 독일인 조사위원이 임명되도록 힘써줄 것을 청원했다.

당시 아우구스부르크에 있던 교황청 대사인 카예탄(Cajetan) 추기경은 8월 23일자 교황의 교서를 통해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라는 교황청의 강력한 지시를 받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세속 권력의 협조를 얻어 이단자를 사로잡을 임무가 부여되었다. 카예탄 추기경은 10월 12일에서 14일까지 아우구스부르크 심문에서 루터에게 그의 오류를 철회하고 잘못된 교리를 더 이상 대변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요구했으나, 루터는 끝내 철회하지 않고 심문은 끝났다.

이에 대해 루터는 10월 16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항소장을 작성했다. 교황에게 낸 항소라는 법적 수단은 논란이 되고 있는 교리 문제를 정식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법적 형식을 띤 시도였다. 이 항소장은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한편 교황에 의한 파문이 기정사실처럼 예견되었기에 루터는 11월 28일 만일을 대비하여 교황에 관해 공의회에 항소를 제기해 두었다. 

(2) 교황청의 파문 위협 교서가 공포됨

1519년 말 로마 교황청은 교황청 산하 네 개의 추기경 회의에서 최종적인 회의를 했고, 1520년 6월 15일 교서인󰡐주여 분기하소서󰡑(Exsurge Domine)를 공포하였다.

파문 교서는 본문의 첫 부분에서 루터의 여러 저서에서 41개의 문장을 뽑아 열거했고 문장들은 반론의 과정 없이 폐기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그것을 확산시키는 사람은 파문이나 교회가 정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정죄할 내용을 담고 있는 루터의 글들을 비난하였다. 교회의 주무기관은 이 글들을 즉시 압류해서 공개적으로 소각해야만 했다. 만일 루터의 글을 소지하거나 그것을 확산시키면 처벌을 받게 되었다. 루터 개인에 대해서는 본문 세 번째 부분에서 다루었다. 로마에서 진행된 소송에 대해 루터는 허락받지 않고 공의회에 호소했기 때문에 이미 기정사실이 된 이단으로 정죄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그의 추종자에게 철회할 수 있는 60일간의 기간이 주어졌다. 이제부터 당장 설교도 할 수 없는 루터는 글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거나 혹은 로마에 직접 출두해야 했다. 60일간의 유예기간은 관할 감독교회에 파문교서가 공식적으로 고지되면서 시작되었다. 철회를 거부할 경우,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완고한 이단으로 그에 준하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또한 모든 교회와 세속 권력은 60일이 경과하면 루터를 사로잡아 로마로 압송하여 형을 받게 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단을 보호하는 자는 교회의 관례에 따라 그 자신과 지역이 중형을 감수해야 했다.

루터에게 개인적으로 철회할 수 있는 기간이 주어졌다는 것은 다시 한 번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고자 노력한 교회법학자들의 의견을 따른 결과였다. 비록 교서가 루터와 그의 추종자에 대한 최종적인 파문을 아직은 언급하지 않았고, 그래서 하나의 파문 위협교서였다고 할지라도 그의 교리에 대해서는 최종적인 판단을 내렸으며, 이단적인 저서의 폐기를 명령했다. 법적인 교회의 심의기관이 지닌 권력 대신에, 성서와 객관적인 논지로 반박해 달라는 루터의 요구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루터가 철회를 거부할 경우, 그의 교리에 대해 명백한 판결을 내림에 따라 이제 루터라는 인물에 대한 파문만이 남게 될 것이었다. 1520년 5월 말 파문위협 교서의 윤곽이 드러나고 추기경 회의에서 최종심의가 임박해지자, 루터에게 철회를 종용하도록 프리드리히 선제후에게 최후 통첩을 했다. 1520년 가을에 파문위협 교서가 공포되었다. 레오 10세는 히에로니무스 알레안더(Hieronymus Aleander)와 교황청 대사인 요하네스 에크에게 제국 전체에 파문 위협교서를 포고하라고 명했다.

(3) 교황청의 파문 위협에 대한 루터의 대응

루터에게 있어 파문교서는 교황청 사법부의 권력의 표현이었으며, 진리에 대한 아무런 교훈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진리를 가리는 것이요, 억압하는 것이었다. 주어진 철회 시한이 다 경과되기 전인 11월 17일 루터는 공증의 형식으로 이미 2년 전에 시작한 공의회 소집을 다시 호소했다. 왜냐하면 파문교서는 법원에서 적법하게 공정한 판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고, 성서를 통해 반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11월 말과 12월 초 라틴어로 이단이라고 정죄한 41개 사항에 대한 입증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독일어로「로마의 교서가 부당하게 정죄한 모든 사항의 근거와 이유」라는 글을 집필했다. 1520년 여름 로마의 소송이 종결되자, 루터는 교황이 만든 모든 교회법을 공개적으로 정죄하고 주요 서적들을 불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루터는 12월 10일 비텐베르크 시 동편에 있는 엘스터 문에서 교황서적들을 불태웠다. 루터는 이 후에 이 사건을 설명한 책「무엇 때문에 교황과 그의 측근들의 책이 마틴 루터 박사에 의해 소각되었는가」에서 로마의 교회법에서 뽑아 온 30개의 항목으로 교황의 권위가 지나치게 고조되었음을 설명하며 교황이 만든 교회법의 거부를 전면으로 다루었다.

루터가 비판한 30가지의 항목을 검토해 보면 법조문의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교황권 중심의 사상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되어 있다.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 왕국에서 교황은 태양이고, 세속 권력은 달을 상징한다. 교황은 모든 법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있다. 교황은 모든 공의회와 교령들을 없애고, 바꾸고, 확립할 수 있다. 교황이 사람들을 악마에게 인도할 만큼 사악할지라도 어느 누구도 교황을 처벌할 수 없다. 구원은 하나님 다음으로 교황에게 달려 있다. 이 세상의 누구도 교황이나 그의 결정을 판단 할 수 없고 오히려 교황이 이 세상의 사람들을 판단하게 되어 있다. 교황은 그리스도교 교회를 위해 법을 제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교황은 쓸모없는 법을 복음 및 성서와 대등한 위치에 놓았다.” 

 이처럼 몇 가지 경우만 보더라도 교황은 자신이 만든 법보다도 우위에 있었고, 어떤 권력도 교황권에 견줄 수 없었기 때문에 루터는 교황권을 무제한하게 남용될 여지가 있는 위험한 존재로 보았다.
       
(4) 보름스 제국회의 심리 및 루터의 답변

보름스 제국회의에서의 심문이 시작되었을 때 트리어 대주교의 법률 고문인 요하네스(Johannes) 박사가 황제 측 심문을 맡았다. 요하네스 박사는 라틴어와 그리고 독일어로 황제가 두 가지를 알고 싶어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질문의 내용은 루터 앞에 제시된 20여 종류의 서적들을 그가 자신의 저작으로 인정하는가 하는 점과 이 책들에 담겨 있는 내용에 대해서 철회하고자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루터는 그 책들이 자신의 것임을 인정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황제에게 생각할 시간적 여유를 요청했고 황제는 그에게 생각할 시간 하루를 주었다.

다음 날, 루터는 자신의 글을 세 가지 장르로 구분했고 첫 번째 장르인 순수하게 신앙적인 글들은 논적들조차도 읽을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철회하지 않았다.

두 번째 장르인 교황권을 반박하는 글들에 대해서는 로마 교회가 성직자의 권한을 이용해 신자의 양심을 고통스럽게 해왔고, 특히 독일에서 재물을 부당한 방법으로 수탈하고 있음을 반대한 것이며, 복음 또는 교부들의 생각과 상반된 교회법과 그것에 근거한 교황청의 법과 교리는 부당하고 잘못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세 번째 장르인 로마 교회의 몇몇 논적자들에 대한 글들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연관되어 있기에 철회할 수 없으며, 복음을 적대하는 폭군들이 신자들을 더 괴롭게 한다는 이유로 철회를 거부했다.

그는 황제와 모든 참석자들에게 성서를 인용하여 자신의 오류를 밝혀 줄 것을 요청했고, 만일 분명히 잘못되어 있다면 모든 오류를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저는 성서의 증거나 명백한 이성에 의해 납득되기를 원합니다. 여러 번 오류를 범했고, 자체로 모순되는 말을 한 교황이나 공의회를 저는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제가 인용한 성서의 말씀에 따라 행동할 것입니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한 철회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고 올바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심문은 루터에게 그의 정당성을 입증할 기회를 주지 않고, 단지 그의 의견을 철회할 기회만 주었다. 루터는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의한 설복을 요구했고, 성서에 사로잡힌 양심을 기초로 로마 교회의 인간적인 교리가 양심을 억압한 것에 대해 반대했다.

(5) 심문의 결과

루터가 철회를 거부하자, 그 결과는 자명했다. 루터는 정해진 기간 내에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기 때문에 1520년 11월 말 이후로 이단자로 확정되어 파문이 결정되었고, 법적인 집행만이 남아 있었다. 칼(Karl) 5세는 다음 날 교황청 대사가 참석한 가운데 직접 프랑스어로 쓴 성명서를 제국의원들에게 배부했다. 황제는 단호했고, 악독한 이단자를 대처하듯이 지체 없이 루터를 대처하라고 명했다. 4월 25일 저녁, 루터는 최고 법관을 통해 공식적인 결정을 통보받았다. 황제는 이제 가톨릭 신앙의 수호자로서 루터를 처벌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황제는 5월 26일 칙령 공고에 서명했다. 칙령은 첫째, 파문된 이단인 루터에 대해 법률적 보호를 박탈하고, 그를 체포하여 황제에게 이송할 것을 명령하였다. 파문당한 자를 지원하거나 숨겨주는 행위도 금지했다. 루터의 추종자와 보호자 역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둘째는 루터의 모든 저서와 그의 추종자들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제국 내 모든 종교적 출판물은 감독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황청의 공판 결정 이후에는 오직 행정상의 조치만이 남게 되었다. 루터는 세속 권력에 넘겨진 후에 처형될 것이었다.

(6) 종교재판 사건에 대한 평가

루터에 대한 종교재판의 평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재판의 성격과 절차상의 하자의 문제이고, 둘째는 재판에서 루터의 증언이 갖는 근대적인 함의와 관련되어 있다.

루터에 대한 로마 소송에서 교회가 사용한 방법은 교황의 교리결정권에 대한 교회법적 규정에 기인한 것이었다. 루터는 논적의 글들을 통해 그리고 교회법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를 통해 당시 교권에 대한 교황청 전체의 이해가 얼마나 교회법적 전통에 얽매여 있는지 알게 되었다. 교회법, 특히 교황의 교령은 루터에게 왜곡된 교회 권력 이해의 한 표현이었고, 루터에 대한 로마의 판결은 결함으로 얼룩진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로마의 판결은 공정한 판사에 의한 심문도 없었고, 고소한 오류들도 성서를 근거로 그 진위 여부가 입증되지 않았다.

루터는 철회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이론과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로마의 사법부를 배격하고자 했다. 루터의 답변과 관련하여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후대까지 가장 위대한 장면으로 언급되는 이 사건은 루터가 양심의 자유에 따라 실정법을 위반하는 사건이었다. 루터는 성서에 사로잡힌 양심에 근거해 실정법에 불복종했다. 여기서 성서에 사로잡힌 양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중세를 통하여 타율은 종교의 자리에서 최고의 자리에 군림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양심에 구속되는 신율(theonomy)로 전환되었다. 신율이란, 자기 자신의 가장 심오한 법이면서 동시에 인간 자신의 터전이 되는 신적인 터전에 뿌리 내리고 있다. 신율에 따르면, 삶의 법이 인간 자신의 법이라 하더라도 동시에 그것은 인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는 교권주의적인 타율(heteronomy)이나 세속적인 자율(autonomy)과는 구분된다. 가톨릭 교회는 신율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명백히 타율적인 성격을 지닌 의미를 만들어 냈다. 루터의 이러한 행위는 중세적 타율에 대한 종말의 신호였다고 볼 수 있고, 근대적인 의미에서 양심의 자유의 발전에 초석을 놓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성직자의 세속법적 의무 이행 및 세속법에 의한 처벌

성직자들은 세속법과 관련해서 면제와 특권들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형사 사건과 민사 사건에 있어서 세속 법원의 관할권에 복종하게 되었다. 새롭고 강력한 징계 법안들은 면책특권이란 미명 하에 일반 시민들에게 유해하고 이들의 평화, 이익, 복지를 저해하는 성직자의 악행들을 금지하였다. 성직자에게 동일하게 시민으로서의 의무가 부과되었고, 성직자가 세금을 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졌고 많은 교회 재산들도 세속적 과세의 대상이 되었다. 성직자가 지은 범죄라 하더라도 세속 법원에서 처벌을 받게 되었고, 1524년 레겐스부르그(Regensburg)의 개혁법령은 어떤 성직자든 도시에 의해 유죄가 입증된 자는 세속 법원의 처벌을 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가치를 동등하게 보는 루터의 신학 사상이 법적용 및 법적 처벌에 있어서의 평등에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3.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재정적 수탈 행위의 감소

교구 십일세 및 성직록 십일세를 징수하던 교회의 권한은 폐기되었고, 평신도들은 죄사함에 대한 대가로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어졌다. 성직 취임세, 면벌부, 다른 형태의 교회적 과세와 수수료가 줄어들었고, 어떤 공동체에서는 완전히 금지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는 무엇보다 종교개혁가들의 합리성에 기초한 비판적 사고가 기초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종교개혁가들에 있어서 부당한 명목으로 경제적 수탈을 조장하는 교회법에 대한 비판은 일반인들의 자연스런 법 감정과 일치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종교개혁가들의 사고가 법제도의 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교회법적 관할 영역이 세속법적 관할로 이전됨

지역의 교회 법원에 속했던 사건이 세속 법원으로 이전되는 것이 점점 보편화되었다. 분쟁 시 교회법과 교회 법원을 이용한다는 조항들이 계약과 조약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없어졌고, 어떤 지역에서는 단호하게 세속법으로 금지되었다. 도시 및 지역 의회와 법원들은 이전에 교회재판할권에 내에 있었던 문제들에 대해 배타적 재판관할권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종교개혁 볍령은 명시적으로 교회법의 사용을 법적 효력이 없는 것으로 선언하였다. 1526년 헤세(Hesse) 지역에서는 모든 교회법의 조항을 금지하였다. 1536년 하노버(Hannover) 지역의 법령은 교회법이 너무나 많은 것을 금지해왔고, 그 다음에는 돈 때문에 그 제한들에 대해 특별면제하였는데, 세속 권력은 이런 것들을 허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법적 관할의 영역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화는 지금까지 교회법에서 다루었던 문제들이 세속법의 영역으로 이전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 이면에는 교회법이 이러한 영역을 너무 교권 중심적으로 다루거나 비합리적으로 취급했던 점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5. 종교개혁 신학의 법제화를 통한 루터주의 교회법의 제정

종교개혁가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구상들을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지역에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러한 신학을 법제화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하에서는 우선 루터주의 법령 제정이 그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도시 및 영방의 법개혁과 어떤 관련을 맺으면서 추진되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법제화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이어서, 루터주의 법령들이 다루고 있는 주요 분야들에 어떤 영역들이 있었는지를 살펴보고, 종교개혁을 수용한 지역들이 얼마나 종교개혁 신학들을 잘 적용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교구 시찰제도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루터주의 교회법원은 어떠한 구성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간단히 살펴본다.

(1) 추진력의 기초 : 도시 및 영방의 법개혁

15세기와 16세기에 도시와 영방에서 일어났던 지역적인 법개혁은 부분적으로 교회법과 교회 정치제도(polity), 교회 재산권의 남용, 특히 교회재판 관할권의 대담한 확장과 교회의 재산권 보유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초기에 세속 당국은 교회법에 대한 반감을 새로운 세속법과 정책 속으로 옮겨 넣었다. 1530년경, 6개의 영방, 16개의 주요도시, 수많은 작은 마을들이 새로운 루터주의 교회법들을 공포하였고, 1540년까지 그 수는 2배 이상이 되었다. 그 법령들의 지역적 차이가 어떠하든지, 새롭게 종교개혁의 이상을 받아들인 정치 공동체는 교회와 성직자의 재산과 권력을 잠식해가면서 교황과 교회법의 권위에 도전함으로 개혁을 시작하였다. 

15세기의 법개혁은 16세기에 교회에서 국가로 대량의 재판관할권이 이전될 수 있는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주된 가르침 중의 하나는 법은 국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교회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교회의 재판관할권을 통제했던 15세기의 법개혁 위에 견고히 서 있는 것이다. 루터주의 교회법들은 이러한 경향들을 포섭하면서 지역교회의 재산, 성직자에 대한 법적 권위를 지역의 세속 권력으로 옮기면서 가속화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루터 진영의 운동에 가담했던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법률가들이 지역 법원의 판사 혹은 시의회의 비서 혹은 법률 고문이 됨에 따라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루터 진영의 많은 법률가들과 신학자들은 법원, 지역 시의회, 소송에 관해 공식적인 법적 의견들을 내어 놓았다. 이러한 공식적인 의견들은 이후에 수집되어 출판되었고 중요한 법률텍스트가 되었다. 이들은 종교개혁의 새로운 신학사상들을 지역 도시를 위한 새로운 법 속으로 옮겨 넣었다. 

(2) 법제화의 방식

종교개혁가들은 도시 정무관과 제후들의 지원을 통해 조직을 갖추고 제도적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새로운 정치적․도덕적 법령들에 의해서 공식적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법들은 보통 도시, 공작령, 영방에 있는 세속권력자들에 의해 공포되고 위임되었는데 그 기초자들의 대다수가 대부분 법적 훈련을 받은 루터 진영의 신학자들이었다.

법령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선포되었다. 가장 흔한 방법은 제후들이 자신의 권위로 입법해서 공포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제후들이 위원회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입법해서 발표하기까지 전적으로 일임하기도 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자신의 영방 내에 있는 정무관들과 제후 사이에 심의회를 거쳐서 발표되기도 했다. 때로는 이 법령을 적용할 도시의 목회자와 시의회가 직접 입법하기도 했다. 한 다른 예를 보면, 루터주의 진영의 주교가 이 법령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경우에는 한 지역의 목회자가 자신의 교구법으로 정한 법령을 제후 권력이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허용하기도 했다.

(3) 루터주의 교회법들의 명칭 및 주요 분야

독일 영방에서 루터 진영의 지도자들은󰡐Ordnungen󰡑이라 불리는 광범위한 법령들을 제정하였는데 이 법령들은 이전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한에 속해 있던 문제들을 규율하고 있었다. 이 법령은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지역에서 종교 및 교회와 관련된 삶을 규율하는 일련의 성문법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법령들은 Refomationen, Rechtsrefomationen, Refomationenordnungen 등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자주 교회법령들(Kirchenordnungen) 또는 교회법(Kirchenrecht)으로 불려졌다. 루터주의 법령은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 매우 광범위하였지만 전형적으로 (1) 종교적 교리, 전례, 예배, 교회행정 및 감독 (2) 종교적인 공중 도덕의 문제 - 신성모독, 안식일 준수, 거짓맹세, 사치, 만취 등 (3) 빈민구제와 다른 형태의 사회복지 (4) 혼인, 가족관계 (5) 교육과 공립학교 등의 항목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새로운 것은 이런 문제들이 교회법보다는 세속법 아래서 그리고 교회 법원보다는 세속 법원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4) 루터주의 교회법의 정착화 과정 : 교구 시찰제도

종교개혁가들이 초기에 로마 가톨릭에 대한 비판으로 개신교 신학과 교리를 확립했을지라도 이제 이것들이 사람들의 일상생활로 파고들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법제화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러한 법이 있더라도 이 법을 통해 종교개혁가들이 주장한 내용들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준수되고 있는가에 대한 확인 및 감독이 필요하였다. 법제화는 생활방식의 변화에 필요조건이었지만, 그것에 대한 확인과 감독으로 그 목적이 달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문서가 바로 1528년 멜란히톤에 의해 작성된「교구 시찰을 위한 지침서」이다.

이 문서가 작성된 동기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사람들이 영적인 자유를 남용하는 사례가 늘어갔기 때문이다. 이 신학적 문서는 사실상 영방의 법령으로서의 법적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 나아가 이 문서는 루터 진영의 교회를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데에 근간이 되었다. 우선 작센 지역을 네 곳으로 분할하여 신학자들과 법률가들이 1개 조가 되어서 각 순회 구역의 순찰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신학자들은 목회자의 역량을 진단하는 일을 그리고 법률가들은 예측되는 모든 법률적 어려움에 대한 조사나 여러 교구에서 발생하고 있는 수도원의 관할지역의 조정 등의 책임을 맡았다.

(5) 세속 제후들의 권위에 기초한 교회 법원의 설립

중세시대의 혼인에 관한 소송은 거의 모두 교회 법원에서 처리되었기 때문에 종교개혁 이후 교회 법원이 권위를 상실했을 경우에 그러한 사건을 법적 권위를 갖고서 조정해야 될 필요가 생겼다. 이것은 선제후령 작센(Saxony)의 교회 행정의 잠정적인 합의사항이었다가 정규적인 법적 형태로 발전되었다. 종교개혁가들은 목회자를 감독자(Superintendent)로 불렀는데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지역의 순회를 위해 4개의 지역으로 분할한 4개의 순회구역마다 목회자 하나씩을 배치해서 혼인사건에 대한 재판까지 포함한 모든 교회적인 사건을 제후국의 공직자와 함께 해결하게 하였다. 선제후 제후를 그의 영토 내에 있는 교회의 최고 통치자로 간주해 왔으나, 그가 개인적으로 모든 것을 감독할 수 없으므로 선제후의 대표 혹은 기구로서 모든 교회의 소송사건 등을 처리할 수 있는 법원의 설립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제후들은 이전의 가톨릭 교회 법원을 변형시켜 법률가와 신학자로 구성된 모임을 조직하여 제후의 이름으로 혼인사건을 포함한 모든 교회의 소송사건을 처리하는 루터주의 교회 법원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 결과 비텐베르크 교회 법원이 1542년에 설립되었다. 이 법원은 가톨릭 교회 법원을 모델로 해서 법률가와 신학자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전의 교회 법원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교회 법원의 구성원이 세속의 최고 권위에 의해서 임명받았으며 또한 그의 이름으로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다. 교회행정에 관한 모든 구조는 감독의 법(jus episcopale) 혹은 교회적 감독권이 최고의 지역적 세속권력에 속한다는 생각을 기초로 전개되었다.

Ⅴ. 맺음말

1. 요약

(1)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법의 영역에서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2) 중세의 로마가톨릭 교회법은 정치적, 법적 실체를 갖고 있었고, 교황제의 폐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성직자가 세속적 사법권으로부터 면제되도록 규정한 점과 유보제도, 특별면제 제도를 통해 교회법의 해석과 적용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특히 재정적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부패한 교권중심의 사법제도가 금전적 갈취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3) 루터는 평등의 가치를 저해하는 교회법을 비판하고 만인제사장이라는 신학사상을 법앞에서의 평등 사상에 적용하였다. 또한 재정적 착취의 수단이 되었던 유보제도와 특별 면제 제도를 비판하였다.

(4) 교회법적 제재수단이었던 파문은 본래의 교회법적 목적과는 달리 오용 및 남용되고 있는 점을 비판하였다.

(5) 루터에 대한 종교재판은 교권 중심의 재판이었고 루터는 성서에 사로잡힌 양심으로 중세적 타율의 구속에 대항하여 프로테스탄트적 신율로 대항하였다.

(6) 교회법에 대한 비판의 영향으로 성직자가 세속법에 의해 처벌받게 되었고 교회법에 의한 재정적 수탈 행위가 감소했으며, 교회법적 관할 영역이 세속법적 관할로 이전되었다.

(7) 루터주의자들은 종교개혁 신학을 법제화시키면서 루터주의 교회법을 제정하고 법학자와 신학자의 협력으로 정착화시켜나갔고, 법률가와 신학자로 구성된 루터주의 교회법원을 만들었다.

 2. 한국 개신교계의 교회법 문화에 던지는 도전과 함의

(1) 개신교가 권력화 되고 개신교가 어떤 법을 그 종교의 유지를 위해 이용할 때 그 법은 인간의 자연스런 법 감정을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과, 반대로 신학에 내재하는 긍정적인 가치들이 존재하는 교회법의 부정적 측면 혹은 한계를 발전적으로 비판할 수 있고, 그 결과로 법을 보다 성서와 인간 존중의 가치로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된다.

(2) 교회법이 인간의 내적인 양심을 억압하거나 그 자유로운 행사를 침해하게 돨 경우 그 법은 저항을 받게 된다. 오늘날 개신교계의 현실에서 입법이나 법집행 그리고 사법적 판단에서 있어서 법이 양심이라는 본질적인 기능을 침해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보다 비판적인 시각이 필요하다고 본다.

(3) 교회법이 부당하게 재정적 부담을 야기하거나 혹은 부패가 일어날 수 있는 구조를 가진 교회법은 저항을 받게 된다.

(4) 교회법이 평등의 가치를 구현해 내지 않을 때 비판을 받게 된다. 법이 특권적인 집단들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집행될 때, 법적 현실은 평등을 구현하라는 외침, 차별을 없게 하라는 자연법적 원리에 의해 항상 저항을 받게 된다. 존재하는 교회법이 불평등을 야기하 거나 존재하는 불평등의 구조를 방치하고 있는 법현실은 없는 지에 대해 보다 섬세하고 비판적인 관찰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5) 교회법의 내용이 구체적 타당성을 결여할 때 비판과 저항을 받게 된다.

(6) 루터주의자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법을 수정하며 루터주의 교회법을 만들 때, 신학자들과 신학적 소양을 가진 법률가들이 협력하여 작업한 방식은 한국 교계의 개신교 교회법전 제정과 연구 과정에서 법학과 신학을 동시에 전공한 전문 인력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데 개신교적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향후 한국 개신교 교회법의 발전을 위해 독일의 두 학자의 통찰을 제시하며 논의를 맺고자 한다.

1) 헤겔은 “국가의 헌법이나 법률을 진정으로 영원한 인권에 의해 만들어내려고 한다면 안정은 프로테스탄트 안에서만 가능하고 프로테스탄트 원리에 바탕을 두어야만 이성의 주체적 자유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2) 칼 바르트는 “교회가 교회법에 있어서 지혜를 구하고자 한다면 세상이라는 학교를 방문하기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미처 모르고 있는 바를 세상은 알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충고하였다.




김정우박사는 홍익대법대, 백석신학대학원(M.Div), 숭실대법대(Ph.D) 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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