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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설교

  • 강 희 창
  • 입력 2016.08.05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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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동의 신앙전통과 표준이 개혁의 목표가 되어야
I. 영향력을 잃어버린 교회

서구 기독교 역사에서 계몽주의 시대는 전통적 신앙과 사상이 도전을 받던 시기이며 사회 문화에 대한 교회의 영향과 지배가 종말을 고하던 시기였다. 그런 맥락에서 제반 사상이 재형성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시대에는 두 유형의 종교를 말했는데, 성경과 계시와 교리를 믿는 입장에 대해서는 계시종교 그리고 인간 이성으로 해명 가능한 영역에 대해서는 자연종교라 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나 보편 윤리와 관련된, 믿음이나 거듭남이 없어도 받아들일 만한 영역이 자연종교였다. 인간이 이성적 능력으로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종교적 진리가 자연종교의 진리인 것이다.

‘오직 성경으로’나 ‘오직 믿음으로’라는 종교개혁의 구호는 중세의 스콜라 신학으로 불분명해진 계시종교 영역을 되살리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런 종교개혁이 교파절대주의(정통주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 계시종교는 다시 자연종교에게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계시종교가 물러서면서 계시의 담지자인 교회의 영향력도 쇠퇴해갔다. 사회 문화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이나 지배력이 종말을 고하던 시기가 계몽주의 시기였던 것이다.

그런 시대적 변화의 결정적인 원인은 유럽의 30년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루터가 면죄부를 비판하는 95개 항목을 내걸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이 1517년인데, 30년 종교전쟁이 시작된 것은 1618년이요 전쟁이 끝난 것은 1648년이다. 성경과 계시를 살려내려 했던 종교개혁의 시작인 1517년으로부터 100년 후 1618년에 30년 전쟁이 일어난 것이요.  유럽 대륙을 황폐하게 만든 그 30년간의 전쟁과 함께 계몽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성경적인 구원의 계시를 다시 살려낸 1517년 종교개혁으로부터 130년 후에 계몽주의의 자연종교가 서구사회를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요 교회의 영향력은 쇠퇴일로에 있었다.

1884년이 한국 개신교 선교의 시작이요 지금은 그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시기이다. 선교초기의 복음과 교회의 역동적 상황을 생각할 때, 한국교회는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을 논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130년이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긴 어렵지만, 대략 세 번의 세대가 지났다고 생각하면 나름대로 의미부여가 가능하리라 판단된다.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극히 약화되고 성경의 초자연적 계시가 뒷걸음치는 이 시대에, 교회와 설교 강단은 어떤 개혁의 과제를 우선적으로 인식해야 하는지? 성경해석과 관련하여 그 길을 찾으려 한다. 이 글의 II 항목에서는 자연종교에 자리를 내어주는 역사신학적 흐름에 대하여 서술하려 한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하려는 것이다. 이어서 III 항목에 가서는, II 항목에 대한 응답으로서 한국 교회의 신학과 설교가 추구할 ‘올바른 성경해석’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글을 마치려 한다.

II.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계몽주의 시대에 전통적인 입장들이 도전을 받고 사회 문화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이 쇠퇴하면서, 계시종교는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공격이 지속되는 동안 자연종교가 진정한 종교의 고지를 점령했고 계몽주의적 이성이 법정의 보좌를 차지했다. 보좌에 앉은 이성의 판단을 통과하지 못하는 초자연적 계시와 기적은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거부되었다. 계시종교로부터 자연종교로 이행하는 어느 지점에 영국의 경험론자 존 로크가 자리잡고 있다. 자연종교가 강력해진 이후에도 성경의 초자연적 계시를 유지할 길을 찾다가 오히려 자연종교에 더 넓은 자리를 내어주는 그 지점에 로크가 위치하는 것이다.

로크의 시기를 전후하여 이신론(Deism)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데, 이신론자들은 이신론(理神論)이라는 말 그대로 ‘이성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의 신’을 생각하려 했다. 중세 교회가 위압적으로 가르치던 초자연적 계시들이 이신론자들에게는 합리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에 비할 때 자연종교와 이신론의 합리적 성격은 어떤 가르침보다 진실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가장 진실한 종교의 본문은 인간의 완전한 이성이다. 성경은 비합리적인 내용이 섞여있는 지나간 시대의 본문일 뿐이라 판단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대법관인 이성의 판단을 통과하지 못하는 교리들은 미신이나 비합리의 유배지로 추방되고 말았다. 성경의 초자연적 계시와 교리들은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점잖은 이신론자들은 “신은 존재한다.” “신이 우주만물을 창조했다.” “인간 사후(死後)에 심판이 있다.” 등과 같은 보편적 교리들을 전면에 높은 곳에 위치시켰다. 그런 가르침이야말로 보편타당한 합리적 가르침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성경의 많고 다양한 계시와 교리들은 그 몇 가지 보편적인 교리들로 축소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축소된 이후에, 어쩌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성경과 계시와 교리들이 위치했던 자리에, ‘자연종교의 보편적 교리들’을 넘어서 이제는 ‘보편 윤리’ 같은 실천적 교리가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흄의 회의론을 넘어서 칸트의 실천이성은 바로 그 보편윤리를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보편윤리의 가치 판단을 통과하지 못하는 종교적 가르침은 사회 문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설자리를 얻기도 어렵게 되어간다. 그런데도 초자연적인 계시와 교리를 고집하는 교회는 무지와 미신으로 혹세무민하는 종교사업체라고 비판받게 될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 언론이 전하는 기독교에 대한 뉴스들이 바로 그 지점 가까이 온 듯하다. ‘보편 윤리의 실천적 기여도’에 따라 교회와 목회자들이 판단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분위기이다. 

이렇게 변해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분명히 깨닫고 설명하기는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도 시대와 보편을 강조하기에 여념이 없다. 성경의 초자연적 계시를 말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요. 타(他) 분야의 다양한 학문들과 어울리기 어려운 일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성경이라는 본문은 과학과 이성(異性)의 본문 앞에서 무슨 말을 하기가 어렵다.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들의 위세에 밀려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눈치를 보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유롭게 하나님을 떠나 멀어져 갈 수 있는 정신적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신학과 설교의 강단은 힘을 잃었고, 성도들은 반드시 교회에 남아있을 이유를 잃어버렸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성경과 계시와 구원에 필수적인 교리들을 살려낼 것인가? 종교개혁 시대의 그들처럼,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교회의 설교 강단은 바로 그 점을 변화와 개혁의 초점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III. 종교개혁 설교가 먼저 되찾을 것은?

성경을 읽되 어떤 교파는 성령의 은사와 체험에 대한 근거자료 내지는 보충자료의 의미에서 성경을 읽으려 한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려는 자세인 것이다. 인간의 필요를 앞세우는 성경 읽기는 이미 오래된 한국교회적 문제이다. 한국적인 아이스게제(Eisgese)가 별 부담없이 행해져온 것이다.

어떤 교파는 법률책을 대하듯이 성경을 대한다. 성서 문자주의(Biblical literalism)가 그것이다. 법률책의 법조문이 그러하듯 성경의 말씀 구절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어느 구절이 예수님의 언행을 판단할 수도 있을 듯하다.

어떤 교파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성경을 대하려고 한다. 그들의 민족적 사회적 열정에 맞게 성경을 읽고 해석한다. 그러다가 그들의 신학과 신학교는 초자연을 분실한 사회적 실천 공동체에 가까워지고 말았다. 다른 목회자들은 성경 해석을 목회자 개인의 신앙과 경건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모든 입장들이 허용 가능한 다양성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 말씀하실 때, 그 길은 우리에게 죄사함과 구원을 주는 길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가는 길로서 예수님 자신을 일컫는다.
그 길은 나의 뜻대로 뛰어가거나 날아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길가는 나그네 개인의 신앙 체험과 은사가 가장 중요한 것인가? 나그네의 눈에 들어오는 길가의 교통 법규와 이정표가 가장 중요한 것인가? 길가는 나그네의 건강과 감정 상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길가는 동안 먹고 마시고 일과 잠자는 장막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

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요소는 이런 것이다. 성경과 계시와 교리와 설교와 교회의 가르침을 통하여, 길 되신 예수님과 나의 마음이 연결되어서 믿음 소망 사람을 품고 계속 열심히 길을 걸어가야 한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과 살아있는 관계 속에 인생 광야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 광야 길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구약성경에서나 신약성경의 예수님에게서나 가장 중요한 계명이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무엇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사도들로부터 초대교회를 거쳐 우리에게 전해져온 성경해석의 길을 선명하게 밝혀내는 일이 우선 시급하다.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이 여러 가지 공격을 받지만, 그런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많은 교파들로 갈라지기 이전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지녔던 신앙의 공동 유산을 살려내야 하는 것이다.

많은 교파들은 자신을 절대화하던 입장에서 조금 물러설 필요가 있다. 자신의 올바른 위치와 방향을 찾으려는 연구와 대화가 필요하다. 사도들과 초대교회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공동의 신앙 전통을 한국교회 설교 강단이 추구할 개혁의 표준이요 목표로 삼자는 것이다. 그 표준과 목표에 근거하여 성경과 초자연적 계시와 구원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살려내려는 설교가 종교개혁의 후손들을 통하여 다시 울려 퍼지기를 기원하면서 글을 마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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