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교단이 형성된 것은 개교회를 돌보기 위한 것이다. 개교회를 돌본다는 것은 개교회 신도들이 신앙적으로 잘 성숙하고 그리스도의 정신대로 살아가기 위하여 배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교단의 형태들은 교단이 개교회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개교회로부터 상회금만 요구하여 개교회가 교단을 돌보는 식이 되어 버렸다. 교단이 개교회 교인들의 영적인 면을 관심하고 신앙성숙을 위하고 하나님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재정과 정치에만 관심을 가진 나머지 총회장선거에 수십억씩 뿌려대는 정치집단으로 전락하고, 자신들의 의지에 맞지 않으면 약한 자들은 면직출교함으로 정치적인 살인을 하는 비신앙적인 집단으로 되어 버렸다.
더군다나 한국의 대형교단은 대형교단의 힘을 이용하여 군소교단의 목사들의 교리문제에까지 관심하여 자신들과 약간만이라도 차이가 나는 교리만 전파하더라도 소명기회도 주지않고 이단으로 낙인찍는다.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비본질적인 차이로 인해 이단으로 정죄한다. 교단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정신이 있어야 하는데 제도적 권위가 중심이 되다 보니 이에 미치지 못하는 주변인들은 피해를 당하기 일쑤이다. 교권과 교리, 제도, 교회숫자가 중심이 되다 보니 대형교단이 주변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대형교단이 소수교단으로 점점 전락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성서가 중심이 아니라 세속적인 사고가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를 인정하게 되니 교회가 교인들로부터 등 돌림을 당해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
한국의 교단 역시 대형화되면서 영적 중심이 아니라 일부 당회원과 정치목사들에 의해 현실적인 중심이 되면서 타락과 부패의 소리가 끊임이 없다. 그러나 중심교단이 주변교단으로 향하고 주변교단이 중심교단을 향할 때 건전한 교단이 형성된다. 중심교단은 주변교단을 배려하고 주변교단은 중심교단이 원하는 것을 수용하여 더불어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리
한국교계는 개혁신학에 입각한 장로교 교리를 중심교리로 하고 있다. 대형 장로교단의 교리에 미치지 못하거나 부합하지 못하고 실천지향적인 독특한 목회를 하거나 신비주의적 성향, 영적인 은사, 오순절 성향이 지나치면 이단으로 치부하는 습관이 있다. 한국에서 2/3를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단의 교리에 미치지 못하는 군소교단의 목회자들은 이단으로 낙인찍히기 십상 이다. 아무리 대형교회라 할지라도 대형교단에서 찍어 누르면 이단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조용기목사, 윤석전목사, 김기동목사, 박윤식목사는 대표적인 예이다. 소명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 지금까지 대형교단의 횡포였다. 한번 이단으로 찍히면 영원히 이단이 되는 것이고, 대형언론들도 ‘묻지마 이단’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했다. 군소언론들은 대형교단의 잘못된 점들을 비판하지 못하고 앵무새의 노래만 불렀던 것이다. 이단감별사들은 대형언론과 대형교단이라는 조직을 최대한 이용하여 군소교단 목회자들을 이단으로 만드는데 앞장 서 왔다.
이단사역이라는 것이 비기독교적이고 비성서적인 사람들을 이단으로 해야 하는데 비본질적인 기준을 갖고서 허술한 교리적 약점을 지적하여 이단으로 만들곤 하였다. 그들은 대형교단을 이용하여 침례교나 성결교, 군소교단목회자들의 설교나 독특한 목회방법론의 약점을 잡고 교단에서 소명기회 한번 주지 않고 이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특히 이단감별사들은 대부분이 근본주의 교리의 편승자로서 교단의 제도와 언론의 힘을 갖고 주변교단목회자들에 대해 힘을 갖고서 이단으로 만드는 역할을 상습적으로 하여왔다. 각 교단의 헌법적 기준과 사실, 재판절차를 통하여 정죄해야 하는데 교리적 내용 없이 제도의 형식적 권위만 갖고서 이단정죄를 해온 것이다. 이는 주변교단이 중심교단으로부터 당하는 교리적인 슬픔이기도 하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도 유대인의 교리에 비하여 주변교리였기 때문이다. 예수가 안식일에 일을 하거나 정결례나 할례, 절기, 이방인, 세리, 간음한 여인에 대해 당시의 율법적 기준을 초월하여 처세하였기 때문에 교리적 중심인들로부터 핍박을 당한 것이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이단으로 명명되어 유대인으로부터 핍박을 당했다. 예수와 바울의 공통점은 당시 교리적 주변인으로서 이단으로 낙인 찍힌 것이다.
다메섹 사건이후 바울이 율법의 교리를 완전히 벗은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인 당시의 주변교리를 전하는데 앞장서자, 중심교리에 서 있던 유대인들이 계속 따라다니면서 폭행을 하고 핍박을 하였다. 그러자 바울은 “더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할 정도였다. 결국 주변교리에 편승한 사도바울은 중심사상을 가진 자들에 의해 죽었다. 역사적으로도 본질적인 교리에 하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변교단에 있는 사람들은 중심교단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핍박을 당하거나 이단으로 낙인찍혔다.
주변교단이나 주변교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중심교단이 먼저 자각을 하거나 족쇄를 풀지 않는 이상, 주변교단이 할 수 있는 것은 포교활동을 강화하여 힘을 키우거나 자신들의 신학을 포기하고 중심교단의 신학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중심교단과 타협하여 교리적 수정을 가하거나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정받는 길이다. 요악하면 교리적 중심과 교리적 주변의 구도를 극복하는 길은 중심교리를 가진 교단은 주변교단의 교리를 향하여 교정을 요구하고, 주변교단은 이에 응하여 중심교단과 함께 가는 것이다.
법
가이사법정에서의 소송
한국교회가 서로 교회 안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반대파들을 주변으로 몰기위하여 사회법정에 고소 고발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천문학적인 재정이 변호사비로 탕감된다. 변호사들도 개혁을 추구하면서 결국은 법을 도구로 하여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우는데 익숙해 있다. 그것이 그들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변호사들은 신앙양심과 재정축적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상적인 기독교인 변호사들이라면 소송건수를 수임하는데 앞장 설 것이 아니라 양측의 변호사들이 만나서 소송건수를 취하하게끔 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가이사 나라의 법을 좋아하는 교인들은 법적 중심이 되기 위해서 성서의 정신을 상실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면은 영적 중심이 아니라 모두 현실적 중심사상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도들은 자신들이 재산적 중심에 서기 위해서라면 개신교가 주변으로 밀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분쟁교회들의 빈번한 소송은 개신교를 주변으로 떨어뜨려 버렸다. 소송의 늪에 한번 빠지면 중독되기 때문에 좀처럼 헤어나기 어렵다. 감리교는 수년 동안 소송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6:1에서 “여러분 중에서 누가 다른 교우와 분쟁을 일으켰을 때에 어찌하여 성도들 앞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이교도의 법정에 고소합니까?”라며 세상법정에서 판단받는 것을 꾸짖는다.
최근 한국교회는 교회재산분쟁으로 인해 소송을 남용하고 변호사들만 좋은 일을 시킨다. 변호사들도 겉으로는 개혁이지만 속으로는 탐욕을 부채질하고 있다. 신도들이 하나님나라 법정의 힘이 아니라 가이사나라 법정의 힘 갖고 중심에 서려고 하는 것은 세속적 중심은 될지 모르지만 영적 주변으로 몰락하는 것이다.
문자적 해석
바리새인들은 항시 율법의 중심인 이었다. 그들은 외형적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 무진 노력했고 문자대로 법을 해석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법정신의 실종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3:3에서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심비에 한 것이라”며 율법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바울은 골로새서 2: 20-21절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라고 하여 문자에 순종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문자적인 법만 의존하려는 사람들은 법정신을 상실하고 법의 주체자의 의도를 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인간이 법에 대한 문자를 강조하면 법 주체자의 의지를 져버리게 된다. 인간의 법은 질서를 위해 필요 불가결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법이 기득권자들의 권력을 유지하거나 문자대로만 해석하면 법이 수단이 되거나 약자들을 법으로 구속하는 폭력적 도구로 된다. 이는 법의 폭력성이다. 몽테스키외는 “권력을 잡은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남용하여 그 극한까지 가고야 만다는 것은 오랜 경험이 가르치는 바이다“고 했다. 법의 중심을 떠난 인간은 법적 주변인으로 전락하여 가이사 나라의 법까지 끌어들여 법을 질서의 도구라기보다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 것이다. 그리고 법의 정신보다 법의 형식성을 강조하여 법을 통하여 상대방의 인권을 유린하는데 사용한다. 나찌정권이나 독재정권, 공산주의 정권, 군주정권은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질서의 실현과 약자의 권리를 중시하는 법 원래의 정신이 소멸되면 법은 가진 자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법적 주변인으로 머물게 된다. 인간의 타락은 법의 타락이기도 하다.
인간은 본래 유한하고 그래서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기에 자신이 만든 법이나 신의 법들에서 끊임없이 일탈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탈 경향을 저지하기 위해서 몽테스키외는 두 가지 해결책을 그려보기도 한다. 첫째는 자연법 즉 실정법 이전의 정의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고, 둘째는 절도의 정신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법보다 정신을 중요시한 것이다. 몽테스키외가 말하는 법의 정신이다. 그러나 결국 권력의 배분과 대의 정치와 경제에 기초한 헌정 체제를 발견함으로써 몽테스키외는 인간의 자유를 역사의 타락 경향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입법 체계를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하여여 어쩔 수 없이 성문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법적 중심인이라는 것은 법의 주체자자인 신의 의도에 입각하여 인간의 법적 권력의 남용을 제한하고, 원래 창조자가 요구했던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법을 권력화 하고 도구화하고, 양심과 자유, 성서의 정신보다 가이사 법정을 의존하는 것은 법적 주변인들이나 하는 일이다. 법을 갖고 장사를 하고, 법을 갖고 약자를 핍박하고, 전관예우나 이면거래를 통해 법의 왜곡된 재판을 하는 자들은 법의 현실적 중심인들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법주체자인 신의 원래의 의도를 떠난 법적 주변인들이다. 우리는 법적 중심인들의 권력을 제한할 제도적 장치는 삼권분립과 양심이외에 거의 없다시피 하다. 우리가 그들에게 법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위임했기 때문이다.
특히 교단에 있어서 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자들은 신의 법을 의존해야 하는데 인간의 법을 의존하는데 습성화 되어 있다. 신의 법정신을 떠나 세상 법을 의존하여 고소고발을 남용하는 자들이나 문자대로만 해석하는 자들은 모두 법의 주변인이다. 신의 힘이 아니라 가이사 법정의 힘을 통하여 중심이 되려고 하는 자들은 소송에 이겨서 중심이 될지는 모르지만 신앙적으로는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게 된다. 자신들이 믿는 교단법정 대신 세속 법정이 중심이 되고, 성경의 기준보다 세속법이 기준이 되고, 양심이나 신앙보다 가이사법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법을 우상으로 하는 이교도들이다. 그리고 심비에 쓰여진 계명보다 돌비에 쓰여진 계명을 중시하는 자도 성문법중독에 걸린 현대판 바리새인들이다.
이들은 이교도나 현대판 바리새인들로서 이면적 율법보다는 표면적 율법을 중시하고 양심과 자연법보다는 성문법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보면 법주변인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교회나 사회에서도 고소나 고발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신앙, 양심, 성경의 정신을 떠난 사람들로서 문언, 형식, 문자를 중심하는 바리새인들의 후예로서 법주변인들이다. 법주변인들은 고소고발, 소제기를 밥먹듯이 한다. 고소고발이 난무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고 영적인 주변인들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고소고발이 일본에 비해서 3배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법정신이 결여된 사회로서 진정한 법정신을 모르는 법주변인이 많은 것이다. 법의 형식적 권위, 법의 문언적 의미, 법의 강제성과 구속력을 의존하다보면 그 힘 갖고서 그리스도를 죽이거나 그리스도의 정신을 배반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예장통합교단에서 100주년 기념으로 이단정죄와 권징재판으로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을 사면하려고 하여 총회로부터 결의를 받았는데 사면법이 없어서 사면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법정신이 결여된 사람들이다. 법이라는 것은 정신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법이나 교회결의는 그리스도의 정신의 실현이다.
진정한 법은 율법과 같은 문언적 법이 아니라 법의 주체자인 신의 정신이다. 따라서 문언적, 형식적, 가이사법을 의존하는 사람들은 법적 주변인에 불과하다. 법적 중심인은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 양심을 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로서 법의 주체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사람이다. 법적 중심인은 남을 죽이려거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문언을 중시하기보다는 남의 입장에서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기심보다는 이타심, 조항보다는 정신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빌라도 법에 의해 희생당한 예수야 말로 사랑과 용서를 통하여 인간의 법을 극복한 사람이다. 그는 법의 주체자이기 때문에 진정한 법중심이었다. 문자적 의미의 법보다는 사랑과 용서의 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법중심인 이다.
III. 중심과 주변의 변주곡
이 장은 기독교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장으로서 중심과 주변의 구도는 신앙적인 중심구도로서 극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서술하려고 한다. 성서에서 중심과 주변구도는 어떤 인간적인 중심과 주변의 구도라기보다는 신앙적인 중심과 주변의 구도로 명확해진다. 땅과 빵의 문제는 에덴동산의 상실로부터 오고, 언어의 저주는 바벨탑의 사건으로 오고, 인종의 저주는 노아가족의 태도에서 온다. 결국 성서는 이 모든 중심과 주변구도에 대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찾아가는 것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신이 거주하는 공간이고, 모든 인간이 앞으로 거주해야 할 종말론적인 공간이었다. 예수의 사역은 현실적 하나님나라의 임재와 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의 실현에 있었다.
공간(지역)
창세기의 이야기도 하나님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가는 주변이야기와 사람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가는 중심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특히 신이 정해준 에덴동산이라는 중심적 공간(지역)안에 있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신과 늘 중심적인 관계 속에서 활동하지만 신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되면 인간은 에덴동산 밖으로 벗어나게 된다.
아담과 하와는 신이 마지막 날에 만든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만든 세계에 가장 중심에 있었던 피조물 이다. 신은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했고,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담에게 동물의 이름을 짓게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2:19)
아담이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을 정도로 모든 동물들이 그에게 복종했고, 식물들 역시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열매를 제공하고 그들을 위해서 존재했다. 아담은 전적으로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으로서 신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신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였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더라도 하나님중심으로 살아가는 민족은 결국 땅을 정복하고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단의 유혹이 오기까지 아담과 하와는 사람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느 날 찾아온 사단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 아담과 하와는 그만 사람중심으로 살아가게 된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3:1)고 말하자, 하와는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답한다.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거짓으로 유혹을 하였다. 이 유혹 앞에 인간은 그만 무릎을 꿇고 하나님중심에서 사람중심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역사의 비극은 신중심에서 사람중심으로 가게 되니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최상의 공간에서 엉겅퀴와 가시를 내고, 땀과 피를 흘려야 살아갈 수 있는 공간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창세기나 출애굽기, 성서의 역사는 신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가면 저주를 받는 주변이야기와 사람 중심에서 신 중심으로 가면 복을 받는 중심이야기로 되어 있다. 특히 사람이 중심되는 곳에서의 공간은 저주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신이 없는 에덴동산 밖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저주의 땅이었고, 소돔과 고모라 땅은 멸망해 가는 공간이었다. 바벨 역시 잠실의 롯데 빌딩처럼 거대한 탑이 있는 외형적 중심지였지만 신에게는 철두철미 주변지 였다.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신은 인간이 아무리 중심지라고 선포를 하여도 신에게는 주변위치에 불과하였다.
인간은 신이 지정한 거룩한 공간에서 쫏겨나거나 죄를 지으면 타락의 공간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공간적 주변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소돔과 고모라 땅이라 할지라도 신이 중심되지 않는 공간이라면 세속적인 공간으로 전락하게 되고 그 땅은 영적 불모지로 된다. 애굽도 아무리 큰 영토를 가졌고 나일강 삼각주의 영향으로 비옥한 옥토를 가졌고, 건축술과 수학이 발달하고 물자가 발달한 풍요로운 곳이라고 할지라도 신이 없는 공간은 주변적 공간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신이 없는 공간은 저주와 타락의 공간으로 영적으로는 주변공간에 불과하게 된다.
아무리 베드로 대성당이 웅장하고 솔로몬의 성전이 금으로 도배가 되었다할지라도 신이 계시지 않는 공간이라면 주변공간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요셉이나 바울처럼 어두운 주변의 감옥에 신이 임하면 그 공간은 거룩한 중심 공간으로 변하게 된다. 야곱이 돌베게를 베고 잔 벧엘이라는 공간이나 얍복강이라는 공간도 신이 임하였기에 거룩한 공간이 된다.
야곱에 있어서 거룩한 공간은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집이거나 소나 양떼를 많이 얻은 외삼촌 라반의 집이 아니라 신이 임하는 돌단을 쌓은 벧엘과 천사와 씨름하는 얍복강가 였다. 일시적인 에덴동산의 회복이었다. 오늘날 노사, 정치, 사회, 동성애, 이슬람, 북핵, 통일의 문제는 거룩한 신의 공간이 회복 됐을 때 회복이 가능하다. 사도바울의 감옥이라는 공간도 신의 영이 임한 곳으로 거룩한 중심공간이다.
다윗에게 있어서 거룩한 공간은 골리앗을 이긴 광야였고, 밧세다를 간음한 궁전이 아니었다. 다니엘에게 거룩한 공간은 왕의 음식이 있는 곳이 아니라 신이 함께 한 사자굴이었고, 사드락, 메세가, 아벳느고의 거룩한 공간은 타는 풀무불이었다. 모세에게 있어서도 거룩한 공간은 애굽의 궁정이 아니라 신의 영이 임한 호렙산이었다. 요나에게 거룩한 공간은 신의 영이 임한 바닷 속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공간은 신의 저주가 임한 물자가 풍요로운 애굽이 아니라 목마르고 배고프지만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 메추라기로 신이 임한 광야였다.
예수의 거룩한 공간은 마굿간, 십자가, 동굴, 산상수훈을 가르치고 오병이어를 만들어준 산이었다. 풍랑이 있는 갈릴리 바다에 예수가 오시니 고요한 거룩한 공간으로 변하게 된다. 포도주가 떨어진 가나 혼인잔치 집에 예수가 계시니 포도주가 넘쳐 거룩한 공간으로 변한다. 풀뿌리 나무 하나 없는 광야에 예수가 계시니 떡과 고기가 풍성한 거룩한 공간으로 변하였다. 캄캄한 감옥에 성령이 임하니 거룩한 공간이 되어 거기에서 성경이 완성되었다. 골방 마가다락방에 성령이 임하니 사람들이 소명을 얻고, 물건을 나누고, 입으로는 방언을 말하는 역사가 나타나고, 손을 얹으면 질병이 치유되는 거룩한 공간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이것이 에덴동산의 회복이자 신앙적 중심 공간의 회복이다.
이처럼 성서는 외형적인 공간이 아니라 신이 임하는 공간만이 거룩한 공간이고 신비한 역사가 타나나는 공간이 중심적인 공간이라고 언급을 한다. 실락원에 있는 사람들은 늘 질병과 전쟁, 가난, 차별, 폭행과 투쟁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지만 신이 임하는 공간은 일시적이나마 에덴동산의 회복이 이루어진다. 예수가 임하는 공간이야 말로 주변인이 중심인이 되고, 중심인이 주변인과 함께 하는 에덴동산의 회복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 거룩한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중심인들 이다. 아무리 대형교회 다닌다 한들, 신의 영을 경험하지 못하면 주변공간이 되고, 개척교회나 산이라 할지라도 신의 영을 경험하면 중심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에서의 거룩한 공간은 기름지고 풍요로운 궁전이나 대형성전이 아니라 광야, 산, 바다, 감옥 같은 후미진 곳이었다. 신이 임한 공간이야말로 중심공간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살기 좋고, 보기 좋고, 풍요로워 보이는 공간을 중심공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시골보다는 서울이, 서울에서도 강남, 한국보다는 미국이 중심적인 공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처럼 풍요롭거나 외형적으로 중심공간에 있으면 마치 자신이 중심인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기도원을 자주 찾는 이유는 영적 중심이 그 곳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늘 세파에 시달려 살아가다 보면 신앙인들은 영적 주변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신도들이 새벽 기도, 금요 철야 기도, 주일 예배 등을 자주 찾는 것도 그곳이 영적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울처럼 가슴안에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 못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아담이 에덴동산을 떠난 이후 모든 것들이 영적 주변으로 전락했다. 에덴동산을 잃은 우리가 중심인으로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그곳이 현대판 에덴동산일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 곳에는 저는 자가 일어서고,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고, 속박과 포로된 자에게 해방이 임하고, 사자굴에 어린양이 뛰놀고 자본가와 노동자가 손을 잡고, 대립과 갈등에선 사람들이 화해와 기쁨의 시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영적 중심이 되었을 때 현실적인 매듭이 풀리게 된다.
성경은 에덴동산으로 들어가기 위한 몸부림의 역사이다. 이것은 첫 사람 아담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죄로부터 자유롭고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고 대립과 갈등 전쟁으로부터 해방되어 궁극적으로 진정한 에덴동산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공간적 주변인으로 전락했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통해서 공간적 중심인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공간적 중심인으로 될 때만이 인간은 이방인이나 주변인이라는 차별 구도에서 벗어나 평등과 평화, 자유, 하나 됨을 맛보는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것은 신의 나라의 중심에 들어가기 위한 영적 몸부림이다. 에덴동산을 떠난 인간들은 끊임없이 에덴동산을 다시 추구하고자하는 잠재적 속성이 있다. 그래서 다시 주변에서 중심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즉 세속적 공간에서 거룩한 공간으로 이동 할 때 인간은 일시적이나마 인간의 고통과 신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오늘날 영적인 주변인들은 신의 능력과 임재를 체험할 공간이 없는 사람들이다. 풍요와 부, 쾌락, 명예, 호화주택, 회장, 고위직을 경험하지만 신의 능력이 임하는 거룩한 공간이 없다. 로마의 대성당이나 애굽과 같은 거대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성직자라고 할지라도 공간적 주변인으로 머물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수백억에 해당하는 주택에 거주하는 이건희 회장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집이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라 탐욕의 영이 머문 곳이라면 주변적 공간에 불과하다. 이는 비단 이건희 회장의 집만 주변공간이 아니라 성총회가 이루어지는 종단도 마찬가지 이다. 겉으로는 성총회라는 중심공간인데 이면은 동성애자를 목사로 안수받게 하거나 가스총이 대두되고, 선거자금을 뿌리거나 하면 신이 원하지 않는 주변적 공간이 되는 것이다.
수십억의 총회장 선거비용이 낭비되고, 빈번한 소송과 용역, 재산분쟁으로 얼룩진 교회의 공간도 신이 없는 주변공간에 불과했다. 에덴동산 밖의 공간은 죄악과 질병, 차별, 부패, 전쟁, 경쟁, 죽음이 판을 치는 저주의 공간에 불과하지만 신의 아들이 임한 공간은 거룩한 공간이었다. 신의 아들은 저주받은 공간을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신이 중심 되는 거룩한 공간으로 만들려고 노력을 하였다. 그래서 누구든지 신을 찾는 사람에게 신은 임재하여 우리를 신의 공간속에서 활동하는 공간적 중심인으로 만들려고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로운 공간의 에덴동산이 회복될 때까지 신은 일시적이나마 신을 찾는 사람에게 임재하여 거룩한 공간을 경험하게끔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에덴동산을 상실한 주변인이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에덴동산을 경험하게 될 때 영적 중심인이 되고 거룩한 공간을 경험하게 된다. 즉 신의 중심이 주변인에게로 가고, 주변인이 신의 공간으로 들어설 때 모든 문제는 극복되는 것이다.
시간
고대 그리이스 사람들은 우리가 단순히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두 가지로 분리해서 이해했다. 하나는 크로노스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이다. 크로노스는 1초, 1분씩 흘러가는 수평적이면서 양적인 시간개념을 말하는 반면, 카이로스는 어떤 탄생, 죽음, 신비로운 일 등이 갑자기 임하는 수직적이면서 질적인 시간개념을 말한다. 신의 시간개념은 우리의 시간개념과 다른 일종의 카이로스 시간개념이다. 예수의 탄생, 죽으심, 기적, 부활, 재림 등은 모두 카이로스 시간에 해당한다. 오병이어의 역사, 병고침, 가나혼인잔치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도 일상적인 시간개념을 벗어나는 것으로 일종이 카이로스 시간개념이다.
오늘 바쁘게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신의 거룩한 공간은 물론, 신이 우리의 삶속에 임재하는 카이로스 시간개념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신의 카이로스 시간 속에 살지 않으면 시간적 주변인에 머물게 된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탄생하고, 자라고, 죽는 인간의 양적인 시간만 경험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이다. 시편기자는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했다. 시편기자는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했다. 이러한 시간개념은 모두 크로노스 시간이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여기서 때는 카이로스 시간개념이다. 동방박사들 앞에 혜성이 갑자기 나타난 때, 모세에게 호렙산 가시덤불의 불빛이 나타난 때, 엘리야가 불 말과 불 병거를 타고 올라간 때, 다메섹에서 사도 바울에게 빛이 갑자가 나타난 때, 변화산에서 예수의 모습이 변형 된 때, 38년 된 앉은뱅이가 일어선 때,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의거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많이 잡은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때, 예수가 3일 만에 부활한 때, 마가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때,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후 카이로스의 시간은 찾는 사람에게만 주어졌다.
이러한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 머물지 않는 사람들은 시간적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카이로스의 시간개념을 체험하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고백했다. 그가 카이로스의 시간을 체험했기 때문에 크로노스의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잇는 자세로 살아간 것이다. 신앙인들은 신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기도하여 회개하는 것은 신의 시간 속에 머무는 것이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신의 시간 속에 머문 자에게만 가능하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신의 시간 속에 머물면서 살아가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 노예가 되어서 인간의 시간 속에 사는 것이 습관화되다보니 신의 시간을 경험하지 못하는 시간적 주변인이 되었다. 즉 신 없이 살아가는데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시간의 주변인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잘 나간 사람들이 타락하고 대형교회 목사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도 신의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에 사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성공하기 전에는 신의 시간을 많이 체험했는데 성공한 이후 신의 시간보다 인간의 시간 안에 사는데 익숙해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주변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야곱이 살아났던 이유는 얍복강 가에서 신의 시간 안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의 문제 역시 신의 시간의 중심에 머물 때 해결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신의 시간적 중심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즉 카이로스의 시간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말로 시간적 중심인 이다.
신의 시간을 경험하지 못한 본디오 빌라도 바리새인은 모두 시간적 주변인들 이었다. 지금도 신의 카이로스 시간이 아니라 교파나 교리, 직분 , 직위, 건물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간적 주변인들이다. 사두개인이 시간적 주변인으로 전락했다는 것은 그들이 부활의 시간(카이로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진정한 율법이 온 때(카이로스)를 인정하지 않았고, 유대인들은 진정한 왕이 탄생한 때(카이로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본디오 빌라도는 만 왕의 왕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때(카이로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빌라도가 신의 시간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여 예수를 인간의 시간 속으로 영원히 떠밀어 버린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나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의 시간에 불과했다. 그들은 인간적 시간 중심에 머물다 보니 십자가의 사건이 신의 때(카이로스)인지 인간의 때(크로노스)인지 구분 하지 못한 것이다. 모두 시간적 주변인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적 주변인들은 인간의 시간만을 의존하고 신의 시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신의 시간을 체험하는데 관심이 없고 인간의 시간 속에 살아가는데 습성화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매 주마다 주일 예배 참여하는 것은 신의 시간을 경험 하고자 함이다. 예배의 시간과 기도의 시간, 예수의 재림 의식, 종말론적인 의식, 기적경험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시간적 주변인에 불과하다. 시간적 중심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신의 시간을 경험해야 한다. 예배나 기도, 능력, 체험을 통해서 에덴동산의 시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복락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신의 시간이 주변인에게로 가고, 주변인이 신의 시간의 중심에 섰을 때만이 진정한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골리앗을 이길 때 다윗은 신의 시간적 중심에 있었다.
언어
성서에서도 언어적 주변인이 있다. 일단 특정 지역이나 국가에서 중심인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모두 언어적 주변인에 해당한다. 구약에 보면 시날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온 세상에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게끔 하자고 하여 높은 바벨탑을 쌓아나갔다. 그러나 신이 내려와서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온 세상에 인간들을 흩으신다. 신의 언어의 저주가 임하여 인간들까지 서로 하나 되지 못하게 하였다. 상술했지만 인간은 자신이 사는 나라를 떠나서 다른 나라를 가면 언어적 주변인에 전락하게 된다.
한국사람이 미국이나 캐나다 등 영미권에 가면 늘 언어적 주변인으로 시달리게 된다. 영어는 둘째치더라도 한국에서 탈북자나 조선족이 북한사투리나 조선족식의 말투만을 써도 이 땅에서는 언어적 주변인에 해당된다. 우리가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 하더라도 미국에 가면 미국사람들이 보기에는 원어민 발음이 아니기 때문에 언어발음으로 인해 얕보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리이스어로 야만인은 ‘바르바르’이다. 이는 자신들의 언어를 중심언어로 생각해서 이방인이나 야만인들의 발음을 알아듣지 못하니 ‘바르바르’라는 소리로만 들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리이스인들은 자신들의 주변인들을 바르바르인이라고 불렀다. 이는 언어적 중심국에 속한 사람들이 주변국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여 비아냥거리면서 사용했던 용어이다. 캐나다에 있을 때, 퀘벡에 간 적이 있었다. 그들은 영어를 알면서도 불어로 말하곤 하였다. 그나마 영어라도 말할 수 있어야 소통이 되는데 같은 나라에서 소통조차 어려웠다. 캐나다에 있어서 언어적 주변인을 느끼는데 퀘벡에 있으려니 더욱 주변인임을 실감케 했다.
에덴동산을 떠난 인간들은 어디를 가나 언어적 주변인임을 느껴야 했다. 이러한 언어적 주변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일시적으로 극복이 된다. 오순절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들이 왔을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니 일시적이나마 언어의 통일이 일어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예수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을 하는데 예루살렘에 욌던 16개국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나라언어로 알아듣게 되었다. 언어에 대한 저주가 신의 의해서 일시적으로 풀렸던 것이다. 에덴동산 밖에 땅에 대한 저주가 있을 때 인간은 땀을 흘리는 노동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듯이 언어에 대한 저주 역시 땀을 흘려야만 저주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영어가 세계 공용어이기 때문에 영어만 조금 알아도 어디가든지 쉽게 소통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유럽, 북미, 발틱삼국에 가도 대부분 국민들이 영어를 할 줄 알기 때문에 생활이나 여행을 하는데 그렇게 불편하지 않은 것을 경험했다. 신은 이 땅에서 땀을 흘리면 그마나 땅과 언어의 저주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주셨다. 여기에 신의 사랑이 있는 것이다. 오순절에 다양한 언어를 가졌지만 잠시나마 한 언어로 모두 소통 가능하도록 한 것은 언젠가 신은 인간에게 하나의 언어로만 소통 가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결국 신에게 중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은 언어의 소통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모두 언어적 중심인으로서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이 모두 언어의 저주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다. 마가다락방의 사건은 신이 임하면 언젠가 인간은 언어의 저주에서 벗어나 하나의 언어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현재 정부는 북한과 소통이 되지를 않으니 개성공단까지 폐쇄했다. 북한과는 평화와 화해의 언어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을 통한 화해의 언어소통으로 통일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신의 중심적 공간과 시간에 머물 때 모든 인간은 언어의 소통 속에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남북은 언어는 같지만 신이 중심된 화해와 평화의 언어가 없다보니 서로 이질적인 언어 주변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상술했지만 언어적 주변인들에 대해 국가와 중심인들은 이들에게로 다가가서 이들이 언어 중심인으로 될 수 있도록 언어기관을 세워 최대한 노력을 해야 한다. 남북의 문제 역시 중심은 주변으로, 주변은 중심으로 이동하면 좌우벽을 넘어 하나의 언어로 통일되면서 언어 중심인이 될 때 서로 소통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인종
당시 주변 문화였던 기독교가 중심부에서 로마를 정복하게 되니 여성차별과 인권차별이 없어지게 된다. 기독교가 그만큼 중심 문화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성차별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의 문화가 들어간 나라는 성차별이 약하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는 곳에는 빈부격차 성차별 인종차별이 약화된다. 성서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된다고 했다. 8장에 가면 제자들이 땅 끝에서 온 흑인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전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디오피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당시 제자들이 인종차별을 하였더라면 복음을 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제자들은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인종차별을 극복했던 것이다. 실제로 초대교부시절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는 신학이 열매를 맺었던 곳이기도 했다. 유명한 교부들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은 아프리카 구레넷 사람 시몬이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구레네 시몬의 부인이었던로 루퍼의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라고까지 했다. 로마서 16:13에 바울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라고 말했다. 마가복음 15:21에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라고 하여 구레네시몬이 루포의 아버지인 줄 알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신학이 형성되었고 아프리카 사람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졌다.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는 노예였기 때문에 흑인일 가능성이 있다.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물건을 훔쳐 로마로 도주했다가 당시 옥중에 있던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고 주인에게로 돌아간 자(몬 1:9-10)이다. 바울은 회심한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로 인정했고(골 4:9), 또 그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몬 1:10), ‘내 심복(심장)’(몬 1:12), ‘사랑받는 형제’(몬 1:16)라 부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를 따뜻하게 맞아줄 것을 부탁했다. 여기에는 어떤 인종이나 신분차별이 없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끝까지 사랑한다. 성경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주 안에서 하나라고 말을 한다. 성경은 민족이나 인종차별의 장벽을 극복하는 면을 보여주고 있다. 중심과 주변의 차별을 최소화 하고 있다. 갈라디아 3:28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했다. 로마서 10:12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고 하여 인종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이 임할 때 세상의 모든 차별은 극복되고 만다. 중심인종은 주변인종으로 향하고 주변인종은 중심인종으로 향하여 그들과 더불어 가야 하는 것이다. 로마법에 차별을 없앤 것은 기독교의 영향이었다.
문화
성경의 중심은 유대의 율법문화적 중심이다. 특히 유대는 제정일치사회로서 율법이 곧 종교법이자 실정법이었다.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되고, 간음을 하면 돌로 쳐 죽여야 했다. 할례법과 정결례 법, 음식 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10절에 “너희가 아직도 달과 날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리고 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유대의 율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율법의 문화를 복음의 문화로 극복을 한다. 사도행전 15장에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도 모세의 율법과 할례를 준수해야 한다고 하니, 회의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전파를 효과적으로 하기위해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라로 말하면서 모세의 율법과 이스라엘의 절기문화를 과감하게 포기한다. 이처럼 성경은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하여 유대전통문화인 율법의 문화를 포기하고 있다.
성경은 예수에게 나타났듯이 사람의 생명과 죄를 지은 자에 대해 율법의 문화를 극복하고 복음의 문화로 대신하고 있고, 이방인에 대해서도 당시의 중심문화였던 율법문화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복음문화로 대치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문화가 중심문화로서 자리 잡는다. 이러한 문화는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고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다. 기독교문화가 로마에서 형성된다. 중세의 가톨릭 교황문화에 대해서도 만인 사제들인 중심이 되는 개신교 문화가 싹트게 되고, 영국에서는 개신교도들이 성공회의 국교문화에 대항하여 새로운 청교도문화가 싹트게 되고, 이들이 미국에서 새로운 개신교 문화를 만들어 미국이 세계문화의 중심지로 되게끔 하였다. 공산주의 소련보다 청교도문화를 만든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어 많은 나라들이 공산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좋은 예이다.
그리스도 중심이 있는 곳은 새로운 기독교문화가 싹트게 되어 새로운 중심으로서 자리 잡게 되면서 사회와 국가가 변한다. 로마, 북유럽, 중세, 서부유럽, 미국 등 새로운 개신교문화가 싹트게 되어 사회가 변혁될 정도로 법과 정치사회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친다. 막스베버에 의하면 청교도문화로부터 자본주의 문화가 싹텄다고 한다. 청교도들은 직업을 신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근검절약으로 일을 하여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이처럼 신이 중심 되는 곳에 전통과 비인간적 문화가 극복되고 인간의 권리를 중시하는 기독교문화가 자리 잡게 되었다. 신이 중심이 되다보면 주변문화가 중심문화로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직분
대형 교회 담임목사가 되면 중심 직분자가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지역적 주변에서 목회하는 사람들 역시 주변 목사로 전락한 것으로 착각을 한다. 그러나 성서는 아무리 주변지라도 광야나 감옥, 벧엘처럼 거기에 신이 함께하면 그 곳을 영적 중심지라고 말을 한다. 예루살렘 성전 대제사장에 비하면 예수는 초라한 선지자에 불과하고, 예수는 머리 둘 곳도 없는 주변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전 세계인의 가슴에 중심인으로 남아있는 사람은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아니고 당시 주변인이었던 예수이다. 예수가 중심으로 남아 있는 것은 중심이신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고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목표로 두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을 떠난 주변인들을 위해 공적으로 희생하는 자만이 주변인들의 중심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가 신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의 이기적 삶만을 고집했다면 그는 세상 사람들의 중심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중심인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가장 약자들인 주변인들에게 나갔을 때 그는 온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대제사장으로서 중심적 직분자로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당시 권력을 가진 중심인들이 예수를 주변으로 몰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지금까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를 가장 중심의 한복판에 갔다가 놓았다.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중심적 직분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현실적 중심인 의하여 주변으로 몰리지만 언젠가 역사의 중심에서거나 사람들의 가슴속에 중심적 직분자로서 자리 잡게 된다. 모세. 요셉. 야곱. 다윗. 바울은 좋은 예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우리의 중심가슴에 남아있다.
주변적 직분자들은 주변지역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지역과 상관없이 신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다.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나 중심지역에서의 목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이 중심이 된 곳에서 사역하는 사람이 중심 직분자이다. 섬이든, 감옥이든, 지하이든, 개척교회이든 상관없이 신이 함께 하는 곳이 중심지역이고 거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중심 직분자 이다. 그리고 예수처럼 교회에서 가장 약한 주변인들을 찾아가는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한 중심 직분자 이다.
채영남총회장은 총회장이 되지마자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세월호 분향소였다고 말한다. 그들이 당시 가장 주변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적인 중심인일수록 예수처럼 주변인들에게로 다가가는 것이다. 외형적 중심에 있는 성직자들이 주변으로 가지 않는다면 교황이나 교주로 전락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이들은 주변 직분자들 이다.
예수나 바울처럼 자신들의 직분을 신 중심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중심 직분자들이다. 중심 직분자는 특정 공간이나 고정된 공간에 머물러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주변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고, 순교의 각오를 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다. 중심적 직분의 의식이 부족할 때 외형적 공간이나 외적인 직분에 머무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 연합단체장을 되는 것에 목표로 한다. 외형적 직분을 추구하는 자는 자신의 명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단체장의 권한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라 자신의 영이 중심되는 주변 직분자에 불과하다. 주변적 직분자이기 때문에 총회장이나 연합단체장이 되기 위하여 천문학적인 금액을 낭비하는 것이다. 예수는 대제사장의 직분을, 바울은 사도의 직분을, 제자들은 전도자의 직분을 갖기 위해 지팡이나 두벌 옷, 전대도 요구하지 않고 하늘의 중심적 사명만 필요했다. 자신의 명예가 아니라 신의 명예를 인식하는 직분자야 말로 중심 직분자이다.
예수와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자신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영적 직분자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중심 직분자로서의 의식이 있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세상의 죄짐을 지는 대제사장으로서 중심 직분의 역할을 했고, 바울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중심 직분자의 사명을 다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 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아니하고 주변지역인 아라비아 광야로 갔다. 아라비아 광야에서 수많은 영적 체험을 하고 영적 중심인임을 재확인하고 늦게야 예루살렘에 올라가 기둥같이 여기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악수를 했다. 그러면서 바울은 유명한 이들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까지 했다. 바울은 이미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고,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며 가멜리엘 문하생이라는 외형적인 중심 사상을 버렸던 것이다. 그는 모든 초등학문을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가장 고상한 것이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영적 중심인 예수를 만나고 자신이 가졌던 현실적 중심의 기득권을 다 떨쳐버리고 끊임없이 주변으로 향했다. 오늘 예수이외에 가장 신앙적으로 우리 가슴에 남아있는 사람은 사도바울 이다. 자신이 중심 사도이면서 끊임없이 주변을 향한 사도바울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를 가장 영적인 중심의 위치에 놓게 되었다. 중심직분자일수록 주변인들에게 가야 하고, 그들이 주변인이지만 중심의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늘의 중심의식이 있는 사도 바울은 주변의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 그의 중심 목표였다. 중심 직분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오늘날도 개척교회 목사이든, 주변지역 목사이든, 오지 선교사이든, 부목사이든, 전도사이든 그리스도의 말씀을 주변 땅 끝까지 전파하는 중심 직분자로서의 의식을 가질 때, 그는 진정한 중심 직분자가 되는 것이다.
결론
에덴동산이라는 중심에 살다가 죄를 지음으로서 신의 공간으로부터 멀리 떠난 주변인들은 중심본능을 갖고 끊임없이 중심으로 향했다. 땅을 정복하여 세계 영토의 중심이 되려 했고, 으뜸 문화를 가짐으로서 문화의 중심이 되려고 했고, 많은 재화를 가짐으로서 물질의 중심이 되려고 했고, 심지어는 인종과 언어의 중심국가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인간이 끊임없이 중심본능을 실현하고자 하자, 전쟁과 대립, 갈등이 발생했다. 인위적인 중심을 추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강자들은 강해졌고 약자들은 약해졌다. 중심인들은 왕이 되었지만 주변인들은 노예가 되었다. 경제적, 언어적, 문화적, 종교적, 인종적 중심인과 주변인이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인들은 계급투쟁, 시민혁명, 종교개혁, 흑인폭동을 일으켰다. 경제적 중심과 주변의 구도는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 정치적 구도는 왕과 노예, 종교적 구도는 일인사제와 다수 교인들, 교회의 구도는 대형교회 소형교회, 학벌의 구도는 서울대와 비서울대, 언어의 구도는 영어와 비영어, 인종의 구도는 백인과 유색인종, 지역의 구도는 서구와 아시아, 아프리카, 서울과 호남, 직분자의 구도는 대형교회와 소형교회의 구도로 되었다.
대형교회를 담임하는 자는 중심 직분자, 소형교회를 사역하는 자는 주변 직분자, 대형교회는 중심 공간, 소형교회는 주변 공간, 대형교단은 중심 교단, 군소교단은 주변 교단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미국이나 서울에 있는 목회자는 지역적 중심 목회자, 시골에 있는 목회자는 지역적 주변목회자 였다. 금숟가락을 물고 태어나는 목회자는 신의 아들이었고, 놋숟가락을 물고 태어나는 자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목회지는 서울 강남이 중심지이고, 교회는 대형교회가 중심교회이고,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대형교회 목사가 중심목사였다.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아들도 아버지의 것을 물려받아 자동 중심목사가 된다. 대형교회 목사의 아들치고 후미진 주변으로 가는 예는 거의 없다. 그러기때문에 대형교회목사의 아들은 영적인 중심인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자신들은 외형적인 중심이라고 생각해도 일반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두 영적인, 정신적인 주변인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진정한 신과의 중심의식이 있는 자들은 예수나 바울처럼 주변으로 향하는 자이다. 중심의식이 빈약하기 때문에 외형적 중심을 찾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학생이나 목회자들이 외형적 중심을 추구하는 이유는 신과의 중심의식이 약하기 때문에 인간적 중심을 선택한 것이다. 물질적, 외형적 중심을 추구하는 것이 에덴동산을 떠난 이후 인간의 본성이다. 처음에는 신과 중심이 되었지만 외형적인 것이 중심으로 되면서 점점 영적인 주변인으로 전락해졌다. 불행하게도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여론에 오르내리는 것은 영적인 주변인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대형교회로 성장하면서 담임목사는 어느덧 교황이 되어 신도들은 목사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떨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이나 교주들은 자신의 영역에서는 최고의 중심인이지만 신의 나라에서는 영적인 노예였다. 물질, 명예, 숫자, 탐욕의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예수나 바울처럼 중심 직분자의 의식이 약하기 때문에 교황과 교주들은 하늘을 흉내내지만 실제로는 영적인 주변인이다.
이러한 사회에 예수가 왔다. 무엇이 변하였는가? 혁명이 있었는가? 개혁이 있었는가?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 있었다. 그는 율법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그 자신이 율법이었고, 율법의 잘못된 점을 지적했다. 문자적 율법보다는 율법이면의 정신을 추구 했다. 그의 가르침은 혁명이었다. 예수가 갈릴리로 다니면서 예루살렘과의 지역적 차별을 극복하는 것도 혁명이었고, 귀신을 쫏아내고, 병을 고치고, 빵과 포도주를 만들어주고, 하늘나라를 소개하여 율법을 가르치는 것도 하늘나라의 새로운 혁명이었다. 인간의 시공간에 하늘의 시공간이 임하니 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교리주의자, 율법주의자들은 예수의 시공간적 혁명에 대해 율법적 폭거로 맞섰다. 예수가 가는 곳 마다 신분, 성, 문화의 차별이 극복되었고, 성령이 임하는 곳에 언어와 문화, 물질의 차별이 극복되었다. 그야말로 죄악의 땅에 신의 공간과 거룩한 신의 시간이 임하니 인간적 차별이 극복되는 혁명을 맛보게 되었다.
주변인들은 영원한 중심 그리스도의 시공간안에서 새로운 혁명의 세계를 맛보았다. 중심과 주변의 구도가 극복이 되고 강자와 약자의 차이가 없어지는 혁명이었다. 중심이 주변으로 향하고, 주변이 중심으로 향하였다. 하늘나라의 중심이 이 땅에 오자, 땅의 주변인들이 하늘의 중심인으로 점점 변하여 갔다. 하늘의 영이 임하자, 언어와 문화, 인종, 지역의 차별이 사라졌다. 예수의 오심으로 인해 일시적인 에덴동산이 회복되었다. 그는 진정 대제사장으로서 중심 직분자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사회가 신의 힘으로 일시적인 에덴동산이라도 회복되기 위해서는 중심에 있는 자들은 예수나 바울처럼 한 없이 주변으로 가야하고, 주변에 있는 자들은 중심으로 가야 한다. 그들이 중심으로 가야만 다시 주변으로 가서 주변인들을 중심으로 데려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심과 주변은 끊임없이 순환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사회는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이상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주변인들에게 가야 제 2, 제 3의 백범김구가 탄생되고, 종교인들도 주변인들에게 가야만 제2 한경직, 제2 이태석 신부가 나올 것이다. 가진 자들, 대형교회, 국가, 국회의원, 대통령은 중심에 있는 자들로 주변인에게로 가서 그들이 중심이 될 수 있도록 하고 그들 또한 다시 주변인으로 갈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래야만 한반도에 평화로운 이상사회가 건설되는 것이다. 중심인과 주변인의 격차가 좁아져야만 아름다운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북한과 남한의 격차가 좁아질 때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경제적, 문화적 중심이라면 끊임없이 북한에게 다가가야 하고, 북한 역시 우리에게 계속 다가와야 한다. 중심과 주변의 순환구조가 이룩될 때 통일로 갈 수 있다. 중심되는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이 중심에 머물러 주변으로 가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고착하고 있는 한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고 통일도 요원하다. 독일이 토일을 한 이유도 끊임없이 주변국인 동독으로 갔고, 동독이 이를 수용하여 중심 서독으로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득권자들과 중심인들은 주변으로 향해서 주변인들이 중심으로 갈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이 다시 주변인들에게 갈 수 있도록 중심의식과 주변의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성공한 정치인과 종교인들이 중심이 되면 자신의 주변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중심인 상태에서 머물려고만 한다. 그러다 보면 영적인, 정신적인 주변으로 몰락하고 만다.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초심을 잃지 말고 무엇이 진정한 중심인가 판단해서 성직자와 정치인들은 주변으로 가서 주변인들을 중심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 그러면 중심이 된 주변인들은 다른 주변인에게로 향할 것이다. 그 때 주변인들은 그들을 영원히 가슴에 품어 진정 중심인으로 기억할 것이다. 주변인을 위해 자신의 중심을 버리고 주변으로 간 예수와 바울을 온 세상 사람들이 지금까지 가슴 한복판에 품어서 기억하듯이 말이다. 중심과 주변이 끊임없이 순환해야만 사회 안정, 남북 통일, 세계평화가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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