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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은 동족이 동족을 살상한 최대 학살사건

  • 통합기독공보
  • 입력 2018.04.03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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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익의 이름으로 '묻지마 군민 학살'

역사적으로 삼별초항쟁, 동학혁명, 제주 4.3 사건, 광주사태는 동족이 동족을 학살한 사건이다. 특히 1947년부터 7년 동안 자행된 제주 4.3사건은 미군정과 한국군경, 서북청년단이 연대해 제주군민들을 대규모로 죽인 사건이다. 불행하게도 보수 기독교인들도 연대했다.

 

 

 

▲     © 기독공보

 

제주 4.3 운동은 이승만 대통령이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서북청년의 단원들을 군경에 편입시켜 가혹하게 동족을 잔학한 사건이다. 

 

▲     © 기독공보

 

특히 서북청년단원들이 닥치는 대로 무고한 군민들을 좌익으로 몰아 약 2만 5천명이나 죽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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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청년단은 빨갱이 사냥을 구실로 테러를 한 것이다.  

 

▲     © 기독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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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공보

 

그들은 동굴에 갇혀있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     © 기독공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하에 서북청년단들을 군경에 편입시켜 미군경과 연합하여 9만명 제주도민 중, 1/4 이상인 2만 5천명의 군민들을 살상하는데 혁혁한 과를 세웠다.     

 

제주 4.3을 추념하기 위해 문 대통령은 4·3사건 제70주년을 맞아 이날 오전 제주 평화공원에서 열린 추념식에 참석했다.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참석한 이후 12년 만이다.

 

▲     © 기독공보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4년 제주 4·3이 국가추념일로 지정된 뒤 현직 대통령의 첫 참석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     © 기독공보

 

문 대통령은 추념사를 통해 "70년 전 이곳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다"며 제주 4·3을 '무고한 양민이 국가에 의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4· 3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2000년 김대중 정부는 4·3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고, 4·3위원회를 만들었고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4·3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위령제에 참석해 희생자와 유족, 제주도민께 사과했다"고 상기시키면서 "저는 오늘 그 토대 위에서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한다. 더 이상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다. 이를 위해 유해 발굴 사업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끝까지 계속해 나가겠다"며 "유족들과 생존희생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배·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동족학살의 잔혹사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에 총칼을 겨눈 유일한 민족이기도 하다.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쳤고, 고려는 몽고군을 끌여들여 삼별초난을 제압했고, 고종은 청.일을 끌어들여 동학혁명군을 제압했다. 이승만은 미군을 끌어들여 제주도민을 학살했고, 전두환은 같은 민족으로 하여금 광주시민을 살육했다.

 

▲     © 기독공보

 

▲    동학난

 

제주 4. 3.

 

▲    광주항쟁

 

광주항쟁

 

왕들이나 권력자들은 자신의 안일함을 보존하기 위해 타국을 끌어들여 무참하게 동족으로 하여금 동족을ㅇ 할삭하게 했다. 친몽파, 친청파, 친일파, 친미파들은 오랑캐를 끌어들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동족을 무참하게 학살하게 했다. 

 

이단감별사, 동기독교인을 영적으로 학살 

 

기독교안에서의 이단감별사들 역시 동료 기독교인들을 죽이기 위해 교단관계자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학살하게 했다. 어떤 사람은 자살했고, 어떤 사람은 가정이 깨졌고, 어떤 사람은 이빨이 모두 빠졌다. 국가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을 학살하고, 이단감별사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동료기독교인들을 이단이라고 영적 학살을 자행했다. 사회에서는 '빨갱이'라는 이념으로 정신적 학살을 감행했고, 기독교안에서는 '이단'이라는 개념으로 영적 학살을 감행했다.  

 

국가는 국가대로, 교단은 교단대로, 감별사들은 감별사대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동족을  육적, 정신적으로 학살했다. 이는 우리 민족만이 갖고 있는 정적 죽이기의 원죄적 특성의 하나가 아닐까?   

 

제주노회 김인주 목사, 4.3 당시 기독교인들의 처지에 대한 연구

 

예장통합교단 제주노회에 소속한 김인주목사가 제주 4.3에 대해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김인주목사(교회사가)는 다음과 같이 글을 쓰기도 하였다.

 

오랜 세월 숨죽이며 말 못하던 세월이 흘러 벌써 70년이 되어간다. 진상이 어느 정도 규명되고 실체가 드러났다고 하지만, 아직도 모호한 점이 많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살아 온 것이 제주의 현대사이다. 불교와 천주교가 4.3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논의된 것에 비하면, 개신교의 처지와 역할에 대해서는 아직도 묻혀 있다. 이러한 한계를 안고서 4.3 당시의 개신교 혹은 교인들의 입장과 방향을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제주노회장(예장) 강문호 목사는 1949년 4월 총회보고에서 참상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제주도는 개벽 이래 처음 보는 민족 항쟁의 처참한 사태에 빠져 사상자가 양민 1,512명, 반도가 수만 명, 가옥 소실은 34,611동, 이재자는 86,757명, 학교 소실은 초등학교 175학교, 중등학교 11개교, 교회 관계 피해는 피살자가 15명인데, 이도종 목사는 작년 6월 16일 교회로 가던 도중에 납치된 후 종적이 없사오며, 허성재 장로는 중학생에게 살해를 당하였고, 서귀포교회 임 씨는 예배당 소재를 하던 중 폭도에게 피해를 당하였고, 교회 건물 피해는 서귀포, 협재, 삼양, 조수 등 4처 예배당이 소실되고, 서귀포, 세화 등 2처의 목사 댁이 소실되었고, 교인 가옥 소실은 서귀포 1, 중문 1, 금성 3, 협재 6, 삼양 15, 제주읍 1, 외도 3, 남원 3동 이상 33호이고, 농작물 형편은 전 경작지의 5분의 1에 불과하오며, 총성이 그칠 사이가 없으므로 민중은 공포에 싸여 실로 생지옥을 이루고 있습니다...” 


강문호 목사의 청원에 따라 총회는 위문단을 보내었고, 희생자의 유족들과 교인들을 위로하였다. 이후 피해자는 17명으로 집계되었다. 희생의 유형별로는 산사람에게 납치되어 살해된 사람이 4명(이도종, 진시규, 진학인, 오대호), 자택에서 피살된 사람이 6명(허성재, 부양은, 오병필 형제, 권찰, 학생), 국군에게 피살된 사람이 4명(허영국, 고창선, 지성익 형제), 차량으로 이동 중 산사람의 습격으로 피살된 사람이 2명(최순임, 김승은), 교회당과 함께 불에 탄 사망자 1명(임명선)이다.


좌익과 교회의 충돌은 이미 1930년 봄 모슬포에서 일어났다. 그해 총회 보고서에 “제주 모실포 지경에서는 반종교운동의 핍박으로 교역자와 직원의 곤난이 있사오며”라고 어려움을 적고 있다. 사회주의에 경도된 모슬포의 청년들이 1929년에 마을의 당을 파괴하였다. 1930년에는 교회에 몰려가 예배를 방해하였다.


주동자는 이운방(1909-2013)과 잠시 고향을 방문한 강문석(1906-1955)이었고 좌익 청년들이 합세하였다. 이를 저지하려던 강흥주와 허생재 등 젊은 장로들과 충돌이 벌어졌다. 강 장로는 갈비뼈가 두 개 부러지는 중상을 당하였다. 가해자들은 고소되었고, 벌금을 물거나 징역을 살았다. 강태국 목사(1904-1988)의 자서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강문석, 이운방은 제주의 좌익들의 지도자였지만, 4.3 거사에는 앞장서지 않고 제주를 떠났기에, 다치거나 옥고를 치르지 않았다.   


서서평 선교사(1880-1934)도 선교보고서에서 이러한 어려움을 호소하며 염려하였다. “죽음의 위협에 처하거나, 심하게 얻어맞은 청년과 목사도 있습니다... 일본에 갔다 온 제주인들 중에 볼셰비키의 치명적 사상에 빠져 돌아오는 사람들이 유행처럼 번져갑니다. 교회를 포위하고 지도자들을 때리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대한 좌익의 반감은 잠복하였다가, 4.3사건에서 다시 분출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도종 목사, 허성재 장로 등 그리스도인들이 무장대에 의해 살해당한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이도종 목사(1892-1948)는 4.3사건 초기인 6월 18일 금요일 실종되었다. 고산에서 대정교회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던 중 무장대에게 잡혔고 죽임당한 것이다. 일 년 지난 다음 잡힌 무장대원이 당시의 일을 실토하였고, 그의 증언에 따라 시신을 찾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비무장 노인을, 더구나 기미년 옥고를 치르며 다리에 장애를 입은 독립투사를 생매장하여 살해한 사건은 무장대의 도덕적 정당성에도 큰 오점으로 남는다. 


1948년 11월에 무장대는 수차례 대정과 모슬포를 습격하였다. 15일 월요일에는 허성재 장로의 집을 포위하였다. 허 장로는 교회 밖에서도 성자와도 같은 품성과 덕망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둘째 아들 허운봉이 청년단장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무장대는 “허운봉이 나오라”고 소리질렀다. 허 장로는 “이 사람들, 운봉이는 여기 살지 않고, 자기 집에 있지 않은가, 거기 가 보게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죽창이 가슴을 찔렀다. 일곱 군데를 찔려 그는 절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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