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은 최고의 가치를 따르는 것
지난 한 주,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각종 게이트로 얼룩진 정치적인 사건을 밀어제치고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한 적이 있었다. 더구나 현재 살고 있는 동네 이웃들이 당한 일이라 더욱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던 택시와 행인들을 유심히 살피게 되더라는 말이다.
시신을 싣고 다니면서 재차 살인을 하는 모습을 두고 담대하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새 둥지 안에 있는 알 하나 꺼내 먹지 못하는 유약한 성품으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카드 빚이 무섭다고 하더라도 하루 이틀 사이에 5명의 힘없는 여인들을 무참하게 죽일 수 있느냐는 말이다. 회사를 그만둘 때는 찾아가 사직서를 낼만큼 사회적 구조를 이해할 줄 알고 적응력도 제법 갖춘 우리시대 평범한 청년들인데, 도무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새삼, 사람다움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도대체 사람답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말이다.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하고 사족을 달 수 있지만, 여기서 나는 ‘생각’이라는 구조 안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 물론 생각은 남녀노소 누구나 다 한다. 따라서 사람다움을 규정하는 준거가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생각다운 생각’이다. 생각다운 생각이 사람다움의 준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생각다운 생각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말로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전적인 의미로는 “인간이 자기를 포함한 세계나 그 속의 사상(事象)에 대하여 가지는 평가의 근본적 태도”라고 밝히고 있다. 즉 인간만이 가지는 인간다운 생각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는가는 바로 이 가치관에 따라 결정된다고 봐야한다. 결국, 엊그제 일어난 엽기적인 살인행각도 비뚤어진 가치관 때문에 생긴 일들이다. “돈이 행복이고 ,따라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이 천박한 가치관이 바뀌지 않는 한 제2, 제3의 엽기적 살인행각은 계속될 것이다.
이 가치관은 제 스스로 형성되거나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것은 아니다.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에서 받은 교육과 체험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나라의 일제잔재를 말끔히 청산하지 못한 죄는 자못 크다. 그 친일 세력들이 반공이라는 이념을 들고 나와 이제껏 색깔론으로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막고 있지 않은가?
독재정권과의 밀월을 통해 쌓은 경제력으로 이 땅의 수구 기득권세력으로 군림하는 이상한 나라에 사는 후손들이 바른 가치관을 갖고 산다는 것은 오히려 무리가 아닐텐가? 비뚤어진 민족의 정기를 바로잡는 일은 그래서 시급하고 의미있는 일이다. 적당히 시류와 야합하여 기득권을 누리는 수구세력들이 이 땅의 주인행세를 하는 한 이 땅의 후손들에게 올바른 가치관 교육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가치관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최고의 가치관은 무엇인가? 이는 생명의 관점에서 살펴야한다. 생명을 빼놓고 가치관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타인의 생명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가치관다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최고의 가치관을 갖는다는 말이 된다. 타인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줄 수 있는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모든 목회자들의 본이 되고 있는 바울의 행적은 참으로 눈물겹도록 헌신적이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이렇게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 줄 생각이었습니다”(살전2:8).
예수께서 몸으로 보여주신 삶도 그러하고 그 제자들이 가르쳐준 삶도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불가의 가르침이나 성인들의 가르침이 그리하기에 우리는 그들의 가르침을 “최고의 가르침-宗敎”라고 하지 않던가?
이 땅에 난무하는 천박한 가치관과 범죄가 무관하지 않다면, 이에 최고의 가치관을 가르쳐야 할 종교인들의 책임은 참으로 크다. 종교 간의 세 불리기로 비롯된 마찰과 사회적 폐해는 참으로 막중하다. 축복과 성공을 만들어내는 도깨비 방망이로 전락한 종교, 성직자라는 사회적 지위와 권력에 안주하기 위해 교권 다툼에 여념이 없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이 땅에서 인권을 논하고 민족의 정기를 논하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까?
신앙인들에게 있어 가치관은 현실화된 최고의 가르침(宗敎)이다. 교리나 개념화된 신의 이름에 얽매이는 것은 자신의 생명만을 위하려는 천박한 가치관이요, 신에 대한 철저한 기만이다. 가난과 절제 그리고 끊임없는 수행의 길을 가는 것을 최고의 미덕을 삼는 종교가 타인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줄 수 있다는 최고의 가치관 위에 똑바로 서서 이 땅의 희망이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위글은 2002년 5월6일 수원일보에 실린 종교칼럼(사람다움을 위하여 - 신앙은 최고의 가치를 따르는 것)입니다. 필자의 허락을 얻어 본보에 게재합니다
시신을 싣고 다니면서 재차 살인을 하는 모습을 두고 담대하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새 둥지 안에 있는 알 하나 꺼내 먹지 못하는 유약한 성품으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카드 빚이 무섭다고 하더라도 하루 이틀 사이에 5명의 힘없는 여인들을 무참하게 죽일 수 있느냐는 말이다. 회사를 그만둘 때는 찾아가 사직서를 낼만큼 사회적 구조를 이해할 줄 알고 적응력도 제법 갖춘 우리시대 평범한 청년들인데, 도무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새삼, 사람다움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도대체 사람답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말이다.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하고 사족을 달 수 있지만, 여기서 나는 ‘생각’이라는 구조 안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 물론 생각은 남녀노소 누구나 다 한다. 따라서 사람다움을 규정하는 준거가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생각다운 생각’이다. 생각다운 생각이 사람다움의 준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생각다운 생각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말로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전적인 의미로는 “인간이 자기를 포함한 세계나 그 속의 사상(事象)에 대하여 가지는 평가의 근본적 태도”라고 밝히고 있다. 즉 인간만이 가지는 인간다운 생각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는가는 바로 이 가치관에 따라 결정된다고 봐야한다. 결국, 엊그제 일어난 엽기적인 살인행각도 비뚤어진 가치관 때문에 생긴 일들이다. “돈이 행복이고 ,따라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이 천박한 가치관이 바뀌지 않는 한 제2, 제3의 엽기적 살인행각은 계속될 것이다.
이 가치관은 제 스스로 형성되거나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것은 아니다.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에서 받은 교육과 체험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나라의 일제잔재를 말끔히 청산하지 못한 죄는 자못 크다. 그 친일 세력들이 반공이라는 이념을 들고 나와 이제껏 색깔론으로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막고 있지 않은가?
독재정권과의 밀월을 통해 쌓은 경제력으로 이 땅의 수구 기득권세력으로 군림하는 이상한 나라에 사는 후손들이 바른 가치관을 갖고 산다는 것은 오히려 무리가 아닐텐가? 비뚤어진 민족의 정기를 바로잡는 일은 그래서 시급하고 의미있는 일이다. 적당히 시류와 야합하여 기득권을 누리는 수구세력들이 이 땅의 주인행세를 하는 한 이 땅의 후손들에게 올바른 가치관 교육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가치관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최고의 가치관은 무엇인가? 이는 생명의 관점에서 살펴야한다. 생명을 빼놓고 가치관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타인의 생명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가치관다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최고의 가치관을 갖는다는 말이 된다. 타인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줄 수 있는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모든 목회자들의 본이 되고 있는 바울의 행적은 참으로 눈물겹도록 헌신적이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이렇게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 줄 생각이었습니다”(살전2:8).
예수께서 몸으로 보여주신 삶도 그러하고 그 제자들이 가르쳐준 삶도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불가의 가르침이나 성인들의 가르침이 그리하기에 우리는 그들의 가르침을 “최고의 가르침-宗敎”라고 하지 않던가?
이 땅에 난무하는 천박한 가치관과 범죄가 무관하지 않다면, 이에 최고의 가치관을 가르쳐야 할 종교인들의 책임은 참으로 크다. 종교 간의 세 불리기로 비롯된 마찰과 사회적 폐해는 참으로 막중하다. 축복과 성공을 만들어내는 도깨비 방망이로 전락한 종교, 성직자라는 사회적 지위와 권력에 안주하기 위해 교권 다툼에 여념이 없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이 땅에서 인권을 논하고 민족의 정기를 논하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까?
신앙인들에게 있어 가치관은 현실화된 최고의 가르침(宗敎)이다. 교리나 개념화된 신의 이름에 얽매이는 것은 자신의 생명만을 위하려는 천박한 가치관이요, 신에 대한 철저한 기만이다. 가난과 절제 그리고 끊임없는 수행의 길을 가는 것을 최고의 미덕을 삼는 종교가 타인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줄 수 있다는 최고의 가치관 위에 똑바로 서서 이 땅의 희망이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위글은 2002년 5월6일 수원일보에 실린 종교칼럼(사람다움을 위하여 - 신앙은 최고의 가치를 따르는 것)입니다. 필자의 허락을 얻어 본보에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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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에있는것을 예수교라고 할수있을까요?마틴 루터가 종교개혁할당시의 구교승려들보다 더썩고탐욕적이며 문란한 먹사와 그추종자들뿐인데 무슨 종교적인 가치관을 기대할수잇습니까?한국은 한국인 먹사들을 모두땅속에 묻어버리고 새로선교사를 받아들여 신앙의 씨앗을 새로 심어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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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가치관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지않는가 !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훼손되었다. 예수님은 몸소 자신의 몸을드려 이웃사랑의 실천을 보여주셨고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셨으며 이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오늘날의 수많은 목회자들의 모습속에서는 예수님의 모습은 찾아볼수없으니 너무나 안타깝다. 위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고 어린이는 어른들의 행실을 보고배워서 그대로 답습한다. 나는감히 오늘날의 행태를 모양만 목회자인 목회자들을 용납하는 교계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묻고싶다.
이러한 어용묵회자들을 청산하고 진정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할수있는 목회자들로 채워진다면 이 사회에도 희망은 있을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