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바댜를 통한 신앙적 행위
성공한 열심인들
인생에 있어서 성공한 사람들의 대부분의 특징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있어서 남다른 열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공부를 하든지, 운동을 하던지, 비즈니스를 하든지 상관없이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부분에서든지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최고의 자리에 앉거나 승리자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교회생활이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나 봉사생활 등에 열심을 나타내는 분들이 결국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되고 신앙이 날로 성장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하기 위해서도 신앙적 열심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심이 방향감각을 상실하여 오히려 신앙에 장애가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며 열심의 목적 자체가 빗나갈 때가 더러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일에 열심이다 보니 자신의 당과 주군에게는 충성을 다하지만 백성들의 아픔을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결국 그 열심은 자신의 출세를 위한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죽이고 옥에 가두기도 한 사울의 왜곡된 열심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이러한 왜곡된 열심에 사로잡힐 때가 더러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열심이 있는 기독교인들은 그 열심이 자기 중심적 열심이 되고 급기야는 그러한 열심이 교만으로 가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이 있는 분들은 항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열심으로 인해서 혹 다른 사람들이 상처나 받지는 않을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성찰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 열심이 하나님 중심적이라기 보다는 자기중심적이 될 때 그 열심은 간혹 다른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결과로 빚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결국 열심은 비신앙적 행위로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나중에는 육체로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열심이 있었던 베드로의 삶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어떤 일에 열심이 있을 때 그 열심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열심의 주체가 하나님일 수 있고 자기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의도성 있는 열심은 결국 자기중심적이 되고 그것은 결국 힘으로 연결이 됩니다. 분규교회에 가면 신도들의 열심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심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열심이 있을 수도 있고, 목사를 위한 열심일 수도 있고, 교회건물을 위한 열심일 수도 있습니다. 모두 다 신앙적인 모습으로 보이지만 열심의 주체가 누구이며 무엇이냐에 따라서 비신앙적인 모습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대장금에서 정상궁은 중요한 교훈을 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갖고서 힘을 갖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한상궁과 장금이는 왕이 자신들의 음식을 먹고 입가에 미소를 띠는 것에 목표를 두고 열심히 만들지만 최상궁은 자신이 힘을 갖기위해 음식을 열심히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힘을 갖는 열심은 자기중심적인 열심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열심과 힘을 연결시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열심이 아닙니다. 참열심은 갖고있는 기득권을 다 내어버리는 것이고 어떤 권세나 공로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의 주체가 나인가 하나님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열심의 주체가 내가되면 결국 신앙없는 자기중심적이 되고 그것은 한 집단내에서 권력이나 힘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 열심의 댓가로서 기득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겉에서 보았을 때는 열심의 본질과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열매의 결과는 남들보다 모든 일에 있어서 열심을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신앙 없는 한 초라한 인간의 모습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열심을 낸 사람들의 억울함인 것입니다.
엘리야의 자기중심적 열심과 객기
성경에 나오는 엘리야가 대표적인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기적의 사람이요, 이단을 박멸한 사람이고, 십계명 중 3계명인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을 철저히 지키게끔 본을 보여준 열심있는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아니러니칼하게도 바울이 “이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라고 당당하게 선포한 것과 달리, “언제 내가 기적을 행하였느냐, 죽여주소서”라고 말하는 한 초라한 인간으로서 비신앙적인 모습으로 결과를 맺게 합니다. 그의 열심은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감을 듣고 나오는 열심이라기 보다는 때로 자기 중심적인 객기의 열심이기에 열심의 한계를 드러내고 마는 법입니다.
엘리야의 언어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왕으로서 아합이 이세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법도에서 벗어나자 그를 만나서 수년 동안 이슬과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을 선포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시킨 것 없이 엘리야가 일방적으로 선포합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왕상 17:1) 실제로 그 예언의 결과로서 비가오지 않아 개울이 마르게 됩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7)
엘리야가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할지라도 결론은 엘리야가 말한 그대로 됩니다. 사렙다 과부한테 갈 때,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갑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왕상 17:8-9)
여기에서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라는 축복을 선포합니다. 자신의 일방적 선포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결과는 그대로 됩니다.
열왕기상 18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아합한테 보이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비를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18:1)
이 예언의 말씀 역시 갈멜산 사건 이후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여기에서 사실상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굳이 갈멜산에 모여서 전투를 요청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문제는 가뭄에 있었던 것입니다. 아합에게만 보이고 그냥 기다리기만하면 비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갈멜산의 전쟁은 엘리야의 일방적 주도
그러나 야훼 하나님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있는 엘리야는 이방 선지자들을 눈뜨고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고비는 일방적으로 주도한 갈멜산 사건에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합을 만나러 가서 당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버렸고 바알을 따랐다고 말하면서 바알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나오라고 보무도 당당하게 야훼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갖고 일방적으로 선포를 합니다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18:19)
“니들 갈멜산으로 다 나와서 한판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열심입니다. 그의 성격상 하나님의 명령을 져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산의 결투는 하나님의 음성에 입각해서라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엘리야가 주도해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를 만나러 갈 때나 아합을 만나러 갈 때 항시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단지 수동적으로 순종만 하는 부분이 나오지만 갈멜산의 사건은 특유의 엘리야의 신앙적 열심이 생겨나 능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자신만 선지자인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고 바알의 선지자는 450명입니다”는 말은 훗날 로뎀나무 밑에서 재현됩니다.
엘리야의 비신앙성
그러나 하나님은“너만이 선지자가가 아니라 네가 알지 못하는 참선지자 7000명을 남겨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자기중심적 열심인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적 열심은 로뎀나무 밑에서 더할 수 없이 갸날픈 여인, 우상숭배자의 여인 앞에서 두려움에 앞선 나머지 자신을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하소연 하는 겁쟁이로서 나타납니다. 갈멜산의 담대성은 어느듯 사라져버리고 죽는 일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송아지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하나님을 부를 때 불로서 응답하여 이방신의 선지자들 850명을 호령할 때의 담대함은 더 이상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초라함에도 불구하고 갈멜산의 사건으로 인한 엘리야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이스라엘에 퍼져 전설적 스타로서 신약시대에까지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시 신약시대까지 퍼져 예수님이 하도 기적을 잘 행하니 어떤 사람은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 오지 않았으냐고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엘리야의 위치는 이스라엘 선지자중에서 큰 위치를 차지합니다.
갈멜산의 후유증, 결국 이스라엘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패배
그러나 엘리야가 위대한 선지자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겁쟁이 선지자였고 갈멜산의 결과가 이스라엘에게 가져다 준 것이 사실상 별로 없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한 이후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패배하고 아합은 전쟁에서 죽고 맙니다.
엘리사가 선지가가 된 이후에야 이스라엘이 아람과 싸워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멜산 사건은 선지자 850명을 죽인 것 이외에 이스라엘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준 사건이 못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선지자의 말이기에 그 당시는 축복을 해주었지만 이스라엘에게 종국적인 승리는 가져다 주지 못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일시적 승리자
엘리야에게도 일시적인 승리는 가져다주었을지언정 궁극적인 승리는 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도 아무리 목회를 잘하고 큰 교회를 이루었어도 은퇴 말년에 초라해지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단위에서 외쳤을 때의 담대함이 어느듯 현실의 초라함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왕상 19:1절을 보면 아합이 이세벨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알려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엘리야는 죽음의 공포앞에 떨게되고 결국 예언자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 열왕기상 마지막 절을 보면 결국 아합의 아들 아하시아 왕이 바알을 섬기고 그것에 절을 하여 그의 아버지가 한 것과 마찬가지로 행하자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마침내 갈멜산의 놀라운 기적은 엘리야의 사망선언과 이스라엘의 전쟁패배와 아들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놀라운 기적 뒤에 오는 후유증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정한 은혜는 놀랍지도 않으면서 평범하며 조용하며 누구도 잘 모르는 내면의 기적과 안보이는데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항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며 화려하지도 않은 평범한 선지자 엘리사는 엘리사처럼 피를 보지도 않으면서 아람군대를 모두 생포합니다.
피를 보지 않고도 상대방을 이길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손자병법을 초월하는 진정한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은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무대위에 드러나지도 않는 조용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엘리야의 후퇴와 오바댜의 등장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오바댜의 동굴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는 이세벨의 궁내대신으로 있으면서 죽음을 무릎쓰고서 선지자 100여명의 음식을 제공합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순교정신으로 참선지자를 도우는 오바댜의 은밀한 행위에 관심을 기울이어야 합니다.
오바댜는 동굴속에 있는 선지자들을 죽음을 각오하고 보살폈는데 갈멜산의 엘리야는 동굴속에서 죽기를 갈구하는 비겁자의 위치에 서있습니다. 이처럼 평상시는 열심이지만 교회가 어려울 때 뒤로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면에서지 않고 뒤에서 몰래 기도하며 끊임없이 성경을 읽으며 약자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이야말로 오바댜 같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보이는 곳에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을 내며 화려한 곳보다 후미진 곳을 찾으며, 최상궁이 찾는 힘보다는 한상궁처럼 정신과 명예를 존중히 하는 사람입니다.
열심이 있되 소리가 나거나 외식되지 않으며, 또한 자기 중심적이거나 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나 위기 앞에서도 초라한 겁쟁이로 전락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바댜처럼 남몰래 하나님의 본질적인 사역을 추구하는 사람이 참열심있는 사람입니다. 지나친 열심을 추구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외식적인 열심을 추구했던 사람들, 그리고 열심을 교회의 힘으로 연결시켰던 사람들은 교회의 위기시 뒤로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무대의 조명과 영적인 초라함
이들은 무대의 조명은 좋아하고 사람들의 칭찬을 좋아하지만 가슴한구석에는 영적인 초라함이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열쇠를 가진 수제자가 계집 소녀 앞에서 거짓말을 합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린 선지자가 이방신 숭배자인 여인 앞에서 죽기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열심신앙이면에 숨겨있는 인간의 나약함과 초라함입니다.
장금이 앞에서 무릎 꿇며 진심없이 용서해달라고 하며, 화장실 간다고 몰래 도망치며 얼음창고에 숨는 최상궁, 결국 자결의 길로 끝나는 초라함이 그의 실체였습니다. 로뎀나무 밑의 엘리야가 어쩌면 엘리야의 실체였는지 모릅니다. 골리앗 앞에서 천하를 호령할 듯이 외치며 당당하던 다윗이 밧세바 앞에 무릎꿇는 것이 그의 정체였을는지 모릅니다. 목회자들도 강단에서 강력하게 외치지만 단 밑에 내려가면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한 초라함이 서려있지 않기 위해 늘 근신하는 자세로 살아가야합니다.
죽음앞에서 생명을 갈망한 비신앙적인 선지자
요셉푸스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를 죽였을 때 생명을 갈망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열심신앙은 이렇게 비신앙으로 변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분규교회를 가면 대부분이 집단적으로 통성기도를 잘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마귀사단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들보다는 자신들의 집단의 결속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열심신앙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심신앙은 종종 비신앙적인 모습으로 빠질 때가 있습니다. 겉은 열심히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보이지만 내면은 물질과 부동산을 추구하는 경향이 종종 있습니다. 결국 비신앙인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적극적인 분들은 큰 일을 많이 하고 교회에서도 칭찬을 받고 항시 존경을 받지만 그러나 언젠가 비신앙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것을 늘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바울도 고백합니다. "너희가 선 줄로 생각하거든 쓰러질까 조심하라. 내가 전파된 다음에 버림이 될 까 두려워함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것 보다도 주님이 오늘 내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때 오바댜 처럼 평상시 열심있는 신앙인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도 순교를 각오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살피는 참선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택한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보다는 오바댜가 되기를 간구해야
오늘 우리에게는 기적을 잘 행하고 늘 무대의 중심에 서지만 어느날 갑자기 초라해 지는 엘리야가 되기보다는 그늘진데서 말없이 일하는 오바댜가 되기를 간구합시다. 그것이 진정한 열심있는 신앙인인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열심히 통성기도하는 것이 열심신앙인이 아니라 안보이는 곳에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골방에서 간절히 하나님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열심신앙인 것입니다.
겉에는 열심신앙인으로 보이지만 내면은 비신앙적인 모습으로 빠진 엘리야보다 겉은 아합과 이세벨을 섬기는 궁내대신으로서 비신앙적인 모습으로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선지자들을 섬기는 진정한 열심신앙인 오바댜처럼 내용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에 있어서 성공한 사람들의 대부분의 특징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있어서 남다른 열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공부를 하든지, 운동을 하던지, 비즈니스를 하든지 상관없이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부분에서든지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최고의 자리에 앉거나 승리자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교회생활이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나 봉사생활 등에 열심을 나타내는 분들이 결국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되고 신앙이 날로 성장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하기 위해서도 신앙적 열심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심이 방향감각을 상실하여 오히려 신앙에 장애가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며 열심의 목적 자체가 빗나갈 때가 더러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일에 열심이다 보니 자신의 당과 주군에게는 충성을 다하지만 백성들의 아픔을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결국 그 열심은 자신의 출세를 위한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죽이고 옥에 가두기도 한 사울의 왜곡된 열심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이러한 왜곡된 열심에 사로잡힐 때가 더러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열심이 있는 기독교인들은 그 열심이 자기 중심적 열심이 되고 급기야는 그러한 열심이 교만으로 가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이 있는 분들은 항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열심으로 인해서 혹 다른 사람들이 상처나 받지는 않을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성찰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 열심이 하나님 중심적이라기 보다는 자기중심적이 될 때 그 열심은 간혹 다른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결과로 빚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결국 열심은 비신앙적 행위로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나중에는 육체로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열심이 있었던 베드로의 삶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어떤 일에 열심이 있을 때 그 열심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열심의 주체가 하나님일 수 있고 자기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의도성 있는 열심은 결국 자기중심적이 되고 그것은 결국 힘으로 연결이 됩니다. 분규교회에 가면 신도들의 열심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심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열심이 있을 수도 있고, 목사를 위한 열심일 수도 있고, 교회건물을 위한 열심일 수도 있습니다. 모두 다 신앙적인 모습으로 보이지만 열심의 주체가 누구이며 무엇이냐에 따라서 비신앙적인 모습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대장금에서 정상궁은 중요한 교훈을 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갖고서 힘을 갖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한상궁과 장금이는 왕이 자신들의 음식을 먹고 입가에 미소를 띠는 것에 목표를 두고 열심히 만들지만 최상궁은 자신이 힘을 갖기위해 음식을 열심히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힘을 갖는 열심은 자기중심적인 열심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열심과 힘을 연결시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열심이 아닙니다. 참열심은 갖고있는 기득권을 다 내어버리는 것이고 어떤 권세나 공로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의 주체가 나인가 하나님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열심의 주체가 내가되면 결국 신앙없는 자기중심적이 되고 그것은 한 집단내에서 권력이나 힘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 열심의 댓가로서 기득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겉에서 보았을 때는 열심의 본질과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열매의 결과는 남들보다 모든 일에 있어서 열심을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신앙 없는 한 초라한 인간의 모습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열심을 낸 사람들의 억울함인 것입니다.
엘리야의 자기중심적 열심과 객기
성경에 나오는 엘리야가 대표적인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기적의 사람이요, 이단을 박멸한 사람이고, 십계명 중 3계명인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을 철저히 지키게끔 본을 보여준 열심있는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아니러니칼하게도 바울이 “이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라고 당당하게 선포한 것과 달리, “언제 내가 기적을 행하였느냐, 죽여주소서”라고 말하는 한 초라한 인간으로서 비신앙적인 모습으로 결과를 맺게 합니다. 그의 열심은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감을 듣고 나오는 열심이라기 보다는 때로 자기 중심적인 객기의 열심이기에 열심의 한계를 드러내고 마는 법입니다.
엘리야의 언어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왕으로서 아합이 이세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법도에서 벗어나자 그를 만나서 수년 동안 이슬과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을 선포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시킨 것 없이 엘리야가 일방적으로 선포합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왕상 17:1) 실제로 그 예언의 결과로서 비가오지 않아 개울이 마르게 됩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7)
엘리야가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할지라도 결론은 엘리야가 말한 그대로 됩니다. 사렙다 과부한테 갈 때,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갑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왕상 17:8-9)
여기에서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라는 축복을 선포합니다. 자신의 일방적 선포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결과는 그대로 됩니다.
열왕기상 18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아합한테 보이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비를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18:1)
이 예언의 말씀 역시 갈멜산 사건 이후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여기에서 사실상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굳이 갈멜산에 모여서 전투를 요청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문제는 가뭄에 있었던 것입니다. 아합에게만 보이고 그냥 기다리기만하면 비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갈멜산의 전쟁은 엘리야의 일방적 주도
그러나 야훼 하나님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있는 엘리야는 이방 선지자들을 눈뜨고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고비는 일방적으로 주도한 갈멜산 사건에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합을 만나러 가서 당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버렸고 바알을 따랐다고 말하면서 바알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나오라고 보무도 당당하게 야훼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갖고 일방적으로 선포를 합니다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18:19)
“니들 갈멜산으로 다 나와서 한판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열심입니다. 그의 성격상 하나님의 명령을 져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산의 결투는 하나님의 음성에 입각해서라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엘리야가 주도해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를 만나러 갈 때나 아합을 만나러 갈 때 항시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단지 수동적으로 순종만 하는 부분이 나오지만 갈멜산의 사건은 특유의 엘리야의 신앙적 열심이 생겨나 능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자신만 선지자인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고 바알의 선지자는 450명입니다”는 말은 훗날 로뎀나무 밑에서 재현됩니다.
엘리야의 비신앙성
그러나 하나님은“너만이 선지자가가 아니라 네가 알지 못하는 참선지자 7000명을 남겨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자기중심적 열심인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적 열심은 로뎀나무 밑에서 더할 수 없이 갸날픈 여인, 우상숭배자의 여인 앞에서 두려움에 앞선 나머지 자신을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하소연 하는 겁쟁이로서 나타납니다. 갈멜산의 담대성은 어느듯 사라져버리고 죽는 일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송아지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하나님을 부를 때 불로서 응답하여 이방신의 선지자들 850명을 호령할 때의 담대함은 더 이상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초라함에도 불구하고 갈멜산의 사건으로 인한 엘리야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이스라엘에 퍼져 전설적 스타로서 신약시대에까지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시 신약시대까지 퍼져 예수님이 하도 기적을 잘 행하니 어떤 사람은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 오지 않았으냐고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엘리야의 위치는 이스라엘 선지자중에서 큰 위치를 차지합니다.
갈멜산의 후유증, 결국 이스라엘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패배
그러나 엘리야가 위대한 선지자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겁쟁이 선지자였고 갈멜산의 결과가 이스라엘에게 가져다 준 것이 사실상 별로 없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한 이후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패배하고 아합은 전쟁에서 죽고 맙니다.
엘리사가 선지가가 된 이후에야 이스라엘이 아람과 싸워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멜산 사건은 선지자 850명을 죽인 것 이외에 이스라엘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준 사건이 못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선지자의 말이기에 그 당시는 축복을 해주었지만 이스라엘에게 종국적인 승리는 가져다 주지 못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일시적 승리자
엘리야에게도 일시적인 승리는 가져다주었을지언정 궁극적인 승리는 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도 아무리 목회를 잘하고 큰 교회를 이루었어도 은퇴 말년에 초라해지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단위에서 외쳤을 때의 담대함이 어느듯 현실의 초라함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왕상 19:1절을 보면 아합이 이세벨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알려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엘리야는 죽음의 공포앞에 떨게되고 결국 예언자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 열왕기상 마지막 절을 보면 결국 아합의 아들 아하시아 왕이 바알을 섬기고 그것에 절을 하여 그의 아버지가 한 것과 마찬가지로 행하자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마침내 갈멜산의 놀라운 기적은 엘리야의 사망선언과 이스라엘의 전쟁패배와 아들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놀라운 기적 뒤에 오는 후유증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정한 은혜는 놀랍지도 않으면서 평범하며 조용하며 누구도 잘 모르는 내면의 기적과 안보이는데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항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며 화려하지도 않은 평범한 선지자 엘리사는 엘리사처럼 피를 보지도 않으면서 아람군대를 모두 생포합니다.
피를 보지 않고도 상대방을 이길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손자병법을 초월하는 진정한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은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무대위에 드러나지도 않는 조용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엘리야의 후퇴와 오바댜의 등장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오바댜의 동굴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는 이세벨의 궁내대신으로 있으면서 죽음을 무릎쓰고서 선지자 100여명의 음식을 제공합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순교정신으로 참선지자를 도우는 오바댜의 은밀한 행위에 관심을 기울이어야 합니다.
오바댜는 동굴속에 있는 선지자들을 죽음을 각오하고 보살폈는데 갈멜산의 엘리야는 동굴속에서 죽기를 갈구하는 비겁자의 위치에 서있습니다. 이처럼 평상시는 열심이지만 교회가 어려울 때 뒤로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면에서지 않고 뒤에서 몰래 기도하며 끊임없이 성경을 읽으며 약자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이야말로 오바댜 같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보이는 곳에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을 내며 화려한 곳보다 후미진 곳을 찾으며, 최상궁이 찾는 힘보다는 한상궁처럼 정신과 명예를 존중히 하는 사람입니다.
열심이 있되 소리가 나거나 외식되지 않으며, 또한 자기 중심적이거나 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나 위기 앞에서도 초라한 겁쟁이로 전락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바댜처럼 남몰래 하나님의 본질적인 사역을 추구하는 사람이 참열심있는 사람입니다. 지나친 열심을 추구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외식적인 열심을 추구했던 사람들, 그리고 열심을 교회의 힘으로 연결시켰던 사람들은 교회의 위기시 뒤로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무대의 조명과 영적인 초라함
이들은 무대의 조명은 좋아하고 사람들의 칭찬을 좋아하지만 가슴한구석에는 영적인 초라함이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열쇠를 가진 수제자가 계집 소녀 앞에서 거짓말을 합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린 선지자가 이방신 숭배자인 여인 앞에서 죽기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열심신앙이면에 숨겨있는 인간의 나약함과 초라함입니다.
장금이 앞에서 무릎 꿇며 진심없이 용서해달라고 하며, 화장실 간다고 몰래 도망치며 얼음창고에 숨는 최상궁, 결국 자결의 길로 끝나는 초라함이 그의 실체였습니다. 로뎀나무 밑의 엘리야가 어쩌면 엘리야의 실체였는지 모릅니다. 골리앗 앞에서 천하를 호령할 듯이 외치며 당당하던 다윗이 밧세바 앞에 무릎꿇는 것이 그의 정체였을는지 모릅니다. 목회자들도 강단에서 강력하게 외치지만 단 밑에 내려가면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한 초라함이 서려있지 않기 위해 늘 근신하는 자세로 살아가야합니다.
죽음앞에서 생명을 갈망한 비신앙적인 선지자
요셉푸스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를 죽였을 때 생명을 갈망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열심신앙은 이렇게 비신앙으로 변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분규교회를 가면 대부분이 집단적으로 통성기도를 잘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마귀사단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들보다는 자신들의 집단의 결속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열심신앙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심신앙은 종종 비신앙적인 모습으로 빠질 때가 있습니다. 겉은 열심히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보이지만 내면은 물질과 부동산을 추구하는 경향이 종종 있습니다. 결국 비신앙인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적극적인 분들은 큰 일을 많이 하고 교회에서도 칭찬을 받고 항시 존경을 받지만 그러나 언젠가 비신앙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것을 늘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바울도 고백합니다. "너희가 선 줄로 생각하거든 쓰러질까 조심하라. 내가 전파된 다음에 버림이 될 까 두려워함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것 보다도 주님이 오늘 내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때 오바댜 처럼 평상시 열심있는 신앙인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도 순교를 각오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살피는 참선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택한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보다는 오바댜가 되기를 간구해야
오늘 우리에게는 기적을 잘 행하고 늘 무대의 중심에 서지만 어느날 갑자기 초라해 지는 엘리야가 되기보다는 그늘진데서 말없이 일하는 오바댜가 되기를 간구합시다. 그것이 진정한 열심있는 신앙인인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열심히 통성기도하는 것이 열심신앙인이 아니라 안보이는 곳에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골방에서 간절히 하나님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열심신앙인 것입니다.
겉에는 열심신앙인으로 보이지만 내면은 비신앙적인 모습으로 빠진 엘리야보다 겉은 아합과 이세벨을 섬기는 궁내대신으로서 비신앙적인 모습으로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선지자들을 섬기는 진정한 열심신앙인 오바댜처럼 내용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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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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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목사님이 담임목사, 장로를 안 해 봐서 그런 것 아닌가 싶습니다.
담임목사, 장로를 해 보면
모임에 열심히 나와 주는 사람들,
열심히 헌금 잘 내 주는 사람들,
목사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아멘으로 화답하는 사람들이 가장 훌륭한 교인이죠.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지요.
그런 좋은 말씀으로 광성교회 교인들과 목사들, 장로들을 좀 말려 주세요.
지금까지 한 것을 보면 그 사람들은 그 누구의 말도 안 들을 겁니다. -
적지않은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교회의 직분자들이 복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린채
세상의 가치와 혼합되는 요즈음, 황목사님의 귀한말씀에 감사드립니다.
계속적으로 한국교회의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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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성공출세을 나을 위한 것이면서도 하나님을 위한것 처럼
얼마나 우리는 위장 변술을 잘하는 카멜레온
같은 행위를 많이 했나 생각합니다.
에클레시안이 몇년전보다 많이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로 좋은 기독교 매체라고 소개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뉴스앤조이보다
더 활성화 되는 매체가 되도록 기도하고 습니다.
황목사님 화이팅!
